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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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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시론] 현실에 발 딛은 정의

미국 하버드 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발간 6개월 만에 59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 이 이례적인 현상의 원인을 놓고 우리 사회의 정의의 부재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이 책의 열풍이 우리 사회 정의의 실현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일 게다. 마침, 지난해 대학 교수 직을 그만두고 시민운동가로 나선 하승수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소장이 <정의란 무엇인가> 현상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글을 <녹색평론> 최신호(11~12월호)에 발표했다.

정의란 딜레마 상황에서의 선택에 관한 '지적 유희'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다 정의롭게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실천의 문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녹색평론> 측의 허락을 얻어 하승수 소장의 '현실에 발 딛은 정의' 전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갑자기 한국 사회에서 '정의', '공정' 같은 단어들이 화두가 되고 있다. 하버드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올해 출판계를 휩쓸었다. 책 안 읽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인문·사회과학 책은 특이한 사람들만 읽는 책이 된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3개월 만에 32만 권이 팔리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8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국정 지표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과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한 사회'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전혀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정의'나 '공정'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니

나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열풍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그래서 몇 달 동안은 외면했다. 그런데 두 달 전쯤에는 한 주간지에서 '정의'에 관한 기사를 특집으로 쓴다면서 연락이 왔다. 담당 기자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봤냐고 물었다. 솔직히 안 읽어봤다고 했다. 왠지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이 책을 외면했다는 심정도 얘기했다. 책은 안 읽어봤지만, '정의'에 대해 할 말은 많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상식적이고 소박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결과의 평등은 고사하고 기회의 평등조차도 거론하기 어려워지는 한국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이라도 보장된다면 좀더 정의로워지는 것 아니겠냐는 얘기를 했다. 빈곤 아동·청소년이 100만 명에 달하는데, 4대강 파헤치는 데 돈을 쓰고 있는 이런 부정의가 사라지는 게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했다.

전화를 끊고보니, 그래도 한번 읽어보기나 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샀다. 책을 사서 읽어보니, 미국 학자답게 많은 사례들을 통해 정의에 관한 이론과 논쟁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는 쉬운 책도 아니고,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책도 아니다. 과연 이 책을 구입한 수십만이 넘는 사람들 중에서 몇%가 이 책을 끝까지 읽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만약 마이클 샌델이 하버드대 교수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기 강좌를 바탕으로 쓴 책이 아니었다면, 과연 한국에서 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렸을까? 짐작하기에는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는 책 표지의 설명이, 그것을 부각시킨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 그리고 책을 소개하면서 '하버드대'를 기사로 부각시켜준 언론이 사람들의 구매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일류선호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상한 과소비를 초래한 것은 아닐까?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많은 사례들을 들고 있다. 그중에는 실제 사례들도 있지만, 질문을 하고 논쟁을 붙이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사례들도 있다. 그런 사례들은 도덕적 딜레마에 관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여러 군데에서 등장하는 '철로를 이탈한 전차'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신은 철로를 바라보며 다리 위에 서있다. 그런데 저 아래 철로로 전차가 들어오고 있다. 철로 끝에는 다섯 명의 인부가 있다. 그런데 전차의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전차가 인부 다섯 명을 들이받기 직전이다. 피할 수 없는 재앙 앞에 무력감을 느끼다가 문득 당신 옆에 서있는 덩치가 산만한 남자를 발견한다. 당신은 그 사람을 밀어 전차가 들어오는 철로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면 그 남자는 죽겠지만, 인부 다섯 명은 목숨을 건질 것이다(당신이 직접 철로로 몸을 던질까 생각도 했지만, 전차를 멈추기에는 몸집이 너무 작다).

이런 사례를 놓고 마이클 샌델은 덩치 큰 남자를 철로로 미는 행위가 옳은 것인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하면 많은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원칙과, 아무리 명분이 옳다 해도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원칙 사이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현실에서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던 안락사, 장기(臟器) 거래, 징병제, 대리모, 소수집단우대정책에 관한 사례들도 이용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수강을 하는 학생들에게 사고력의 훈련, 지적인 훈련을 시키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번역자도 이 책이 '정의에 관한 고난도의 지적 유희'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지적 유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 철학에 대한 지식을 쌓고, 사고력은 훈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에서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닌 가상의 사례나, 나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 사례들을 가지고 던진 질문들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다가갈지는 의문이다. 정의를 위해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필요한 질문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이다. 마이클 샌델이 살고 있는 미국 사회, 그리고 그와 학생들이 강의를 하고 강의를 듣는 하버드 대학은 과연 정의로운가?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정의란 무엇인지를 찾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질문은 아닐까?

하버드대의 두 정의 이야기

하버드대에서도 정의를 '지적 유희'가 아닌 현실 속에서 찾으려는 치열한 노력이 있어왔다. 2001년 하버드대에서는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의 정의'를 찾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생활임금캠페인'으로 불린 이 캠페인은 50여 명의 학생들이 비폭력 직접행동의 하나인 연좌시위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정의'였다. 그들은 하버드 대학 캠퍼스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고용을 좀더 안정시킬 대책을 요구했다.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대학이라는 하버드 대학의 비정규 노동자들은 1,0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주로 수위, 청소부, 시설관리인 같은 일들을 하고 있었는데, 최저생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못 미치는 시간당 6.5달러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연좌시위를 시작한 학생들은 자신들이 기숙사에서, 식당에서, 캠퍼스 곳곳에서 누리는 편리함과 안락함이 이런 비정규·저임금 노동에 기초한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학생들은 연좌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연좌시위에 대한 하버드 대학당국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학생들의 연좌농성은 3주에 걸쳐 이어졌고, 점차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빈곤과 인간의 존엄성 결여가 하버드 대학의 경제적 기반이어서는 안된다"고 호소했다. 일부 졸업생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버드대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임금을 시간당 10.25달러로 올리기로 약속한다. 물론 책에는 이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빈곤과 불평등에 관한 얘기는 중간 중간에 나오지만, 정작 하버드 대학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를 생각하면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질문이다. 과연 내가 있는 곳은 정의로운가? 저임금·비정규 노동에 기초하고 있는 대학은 정의로운가? 정의에 관한 대학에서의 논의는 이런 현실에서 출발할 때에,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력을 가진 토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샌델이 하버드 대학의 문제에 눈감고 지적인 유희만 즐기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버드대 생활임금캠페인을 알고 있었고, 참여도 했다. 하버드대 생활임금캠페인이 벌어질 당시에 지지서명을 한 하버드대 교수명단을 찾아보니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Professor of Government)'이라고 명단에 나와있다. 샌델도 자신이 발딛고 있는 하버드대의 현실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문제는 마이클 샌델의 책 자체라기보다는 그 책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이다. 그의 책은 좋은 교재일 수 있고 좋은 교양서일 수도 있다. 어려운 정치철학의 문제들, 정의에 관한 이론들을 그래도 이해하기 쉽게 잘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샌델은 '정의'에 관해서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한 훌륭한 학자임이 분명하다.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보고 읽으면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연구주제인 '정의'에 대입해보기도 하고 분석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학문적인 열정은 높이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책이 한갓 장식품일 수도 있는 게 한국 사회이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는 정의에 관한 회의와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밥상이나 술자리의 화제로 올릴 수 있는 게 한국 사회이다. 주로 생각하는 것은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이면서도 때로는 "정의란 무엇인가"로 자신의 교양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곳이 한국 사회이다.

'지적 유희'가 아닌 '현실의 정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제목을 들었을 때에 떠오른 또다른 '정의'에 관한 책이 있다. 그 책은 리 호이나키가 쓴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이다. 리 호이나키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도미니크수도회에 들어가서 사목활동을 하기도 하고, 이반 일리치와 같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활동하기도 하다가, 나이 사십에 미국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박사논문을 작성하던 중에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와 미국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부도덕에 대한 항의 표시로 가족과 함께 베네수엘라로 자발적인 망명을 한다. 그랬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받고, 일리노이주에 있는 생거먼주립대학이라는 실험적인 대학의 교수가 된다. 그곳에서 그는 7년을 근무하고 정년보장 교수가 된 직후에 대학을 그만두고 시골로 가 농부가 되었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는 리 호이나키가 자신의 이런 인생역정을 돌아보면서 쓴 책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대학 교수를 그만두게 된 이유였다. 호이나키가 근무하고 있던 대학은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대학이었다. 그래서 그가 이 대학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그는 초기에는 열정적으로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한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대학의 분위기는 정체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에 대학에서 교수노조가 조직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때 호이나키는 다른 교수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사회 전반의 임금과 급료 구조로 볼 때 우리가 받는 봉급이 과분한 것이라는 내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그들과 한층더 멀어져버렸다. 이 나라의 대학 교수들이 이미 누리고 있는 물질적 및 정신적 혜택에 비추어 교수노조를 결정하려는 욕망은 당혹스러울 만큼 병적인 것이었다.

호이나키가 보기에는 이미 충분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대학 교수들이 교수노조를 결성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주장하려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후 여러 질문들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부정(不正)한 사회의 가운데서 엘리트그룹의 일원으로 어떻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나날의 고투 속에서 기진맥진해 있는 동안에 어떻게 내가 특권적인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그를 괴롭혔다. 그가 보기에 대학은 명예스러운 일터였지만, 미국의 대중을 위하여 필요한 비판적 목소리를 낼 역량은 모자랐다. 그는 점점더 대학사회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는 정년보장 교수직을 얻은 다음에 호숫가에서 명상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자기자신에게 물어본다.

창조세계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데 내가 어떻게 동참할 수 있단 말인가? 현대사회에 의해 버려진 사람들과 희생자들을 생각할 때, 내가 어떻게 고액의 급여와 특권이 평생 보장되는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대학 교수를 그만둔다.

대학 교수로서의 안락하고 안정된 생존은 생각해보면 마음 편한 것이 아니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수많은 의문들이 나를 괴롭혔다. … 아마도 이제는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 때였다. 나는 내가 빠져있는 수많은 갈등을 가지고 더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진정한 정의는 비틀거리며 찾아가는 것

나는 리 호이나키처럼 신념이 강하지도 않고 호이나키와는 생각이 다른 점들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는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늘 정의에 관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적 유희'보다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택했다. 그게 그의 글이 마이클 샌델의 글과 다른 점이다.

나는 작년 연말에 지방 국립대 교수를 사직했다. 여러가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 교수가 되었을 때에는 평생 교수를 할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시민운동에도 지치고, 나 자신과 삶에 대해서도 지쳐갈 때였다. 그때 지방 국립대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내게는 환상적인 자리로 보였다. 그래서 교수가 되었고, 교수가 된 다음에도 대학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승진과 정년보장에 필요한 논문 편수도 채워두었고, 강의준비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했다.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웠다. 아마도 이제까지 가진 직장 중에서 가장 내 적성에 맞는 직장이었던 것 같다. 물론 가장 안정된 직장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회의가 찾아왔다. 회의는 이럴 때 왔다. 연구실로 들어가는 길에 청소를 하고 있는 비정규직 아주머니를 볼 때 회의가 왔다. 어느새 대학 교수라는 직업에 안주하려는 나 자신을 보면 회의가 왔다. 연구용역에 매달리고, 정치권이나 관료들이 요구하는 대로 립서비스를 해주는 교수들을 보면 회의가 왔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지 못해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는 학생들을 보면, 그리고 졸업한 학생들이 진로를 잡지 못해 방황하는 것을 보면 회의가 왔다. 사회는 점점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대학은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표류하고 있었다. 과연 나는 진실한 것을 말하고 진실되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서있는 자리는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물론 내가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논문과 책을 쓰면, 나는 성실한 교수이고 대학의 공식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샌델이 설명하는 그 어떤 정의에 관한 이론에서도 그런 삶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정의한 사회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자기 의무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자기가 속한 조직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들 그 부정의한 사회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손에 잡았던 것 같다. 호이나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고민과 그의 결단을 훔쳐보면서 부러워했던 것 같다. 그리고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순간에도 그가 생각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호이나키와는 달리, 나는 농촌이 아니라 도시를 택했고, 욕망으로 가득 찬 사회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아직은 여기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맞든 틀리든, 이 부정의한 사회시스템에 제대로 한번 맞서보고 변화를 위해 노력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달 정도가 지났다. 나는 다시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물론 쉽지는 않다. 대학을 그만두고는 한번도 후회를 하지 않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쉬운 적이 여러번 있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틀거린 적이 없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정의를 향한 길을 가고 싶다.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정의'라는 말을 좋아한다. '정의'는 여전히 소중한 가치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정의'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복잡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의는 소박한 것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정의이다. 나 혼자 잘살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협동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뤄가는 사회, 사람들이 불안에 휩싸여 무한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생하고 공존하는 사회, 모든 아이들이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사회, 돈과 권력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돈과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정의이다.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자의 독점물도 아니고 하버드대생들의 지적 유희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곳곳에서 던지면서 연대하고 실천할 때, 정의는 우리 앞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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