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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日王, 은밀한 거래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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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日王, 은밀한 거래에 나서다

[화제의 책] <히로히토와 맥아더>

"'나(히로히토 일왕)는 국민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정치·군사 양면에서 행했던 모든 결정과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자로서 나 자신을 당신(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총사령관)이 대표하는 모든 나라의 결정에 맡기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나(맥아더)는 큰 감동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죽음을 무릅쓸 정도의 책임감. (…) 용기에 가득 찬 태도는 나의 뼛속까지 흔들어놓았다." (<맥아더 회고록> 일부)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일왕과 맥아더 사령관의 1차 회담. 히로히토의 이 발언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1947년 5월 시행된 신헌법('평화헌법') 아래서 그는 책임감 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일왕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 간사이가쿠인 대학 법학부의 도요시타 나라히코(豊下楢彦) 교수는 그의 말이 거짓이었다고 단호히 말한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전후 일본의 처리 문제에서 일왕이 승전국 미국의 요구에 수동적으로만 움직였다는 일본 우파의 시각을 뒤집는 것이다.

히로히토, 전쟁 책임 회피하기 위해 맥아더와 협상

▲ <히로히토와 맥아더>(도요시타 나라히코 지음, 권혁태 옮김, 개마고원 펴냄). ⓒ프레시안
<히로히토와 맥아더>(도요시타 나라히코 지음, 권혁태 옮김, 개마고원 펴냄)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패전 후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자신이 전쟁범죄인으로서 처벌받는지 여부와 냉전대결 구도에서 공산주의로 인해 일본 천황제가 붕괴되는지 여부였다.

저자 도요시타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맥아더와 '전략적 거래'를 통해 이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1945년 1차 회담에서 1951년 4월까지 11차례 맥아더와의 회담이 그것이다.

또한 맥아더 역시 자신의 필요 때문에 히로히토의 거래를 용인했다. 원활하게 패전 처리를 하고 미국의 점령 정책을 펼치는데 히로히토의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맥아더는 히로히토가 재판에 기소되지 않게 미국 정부를 강하게 설득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히로히토가 펼친 '이중전술' 방식은 그의 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쟁에 대한 무한책임을 진다고 말을 하면서, 전쟁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로 대표되는 군부에 자신의 책임을 전가한 행동이 그것이다.

예컨대, <뉴욕타임스> 프랭크 클럭혼(Frank Kluckhorn) 기자와의 인터뷰가 일본에 보도됐을 때 그의 대응을 살펴보자. 당시 히로히토는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미국 여론을 향해 진주만 급습을 명령한 '선전조서'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밝혔다.

"'미국의 참전을 초래한 진주만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서 선전조서를 도조 히데키 대장이 사용한 것처럼 사용한 것이 천황의 의사였는가?'라는 물음에 히로히토는 '선전조서를 도조 대장이 사용했던 것처럼 사용할 의도는 없었다'고 답하였다. (…)

하지만 사태는 급변한다. 클럭혼의 기사가 일본신문에 게재되자, 갑자기 내무성이 '일본 국민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이 기사를 게재한 신문을 압수해 버린 것이다. (…) '일본 국민은 천황 자신이 도조 히데키를 비난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커다란 소동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내각 정보국 대변인이 말했다."

이렇게 히로히토는 도조 히데키의 책임을 점령국인 미국 등에 유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는 식의 교묘한 이중전술을 펼쳤다. 이 전술은 성공해 그는 전범재판인 '도쿄재판'에 서지 않았고, 일본 사회 내 자신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히로히토 앞에선 평화헌법도 무용지물

불평등 조약으로 유명한 미일 안보조약과 미군의 오키나와 주둔 역시 히로히토의 작품이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공산주의에 의한 천황제 타도를 걱정했던 히로히토는 미군의 일본 주둔이 문제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9년 '시모야마 사건'(일본 국유 철도의 총재인 시모야마 사다노리가 실종된 후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으로 당시 공산당의 소행으로 알려짐) 등의 국내 문제를 겪으며 본격적으로 미군 주둔을 요구했고,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을 이용해 미국과 미일 안보조약을 성사시킨다.

이 과정에서 히로히토는 당시 일본 내각과 미군 점령당국을 거치지 않고 미 국무부와 직접 접촉했다. 이런 외교에 있어 '초헌법적인' 행동은 왕의 정치 개입을 금지한 신헌법의 규정을 위반한 것이었다.

당시 맥아더는 일본 처리에 있어 '극동의 스위스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도요시타는 이 기간 히로히토와 맥아더의 회담 내용을 분석하며 맥아더와 견해차를 느낀 히로히토가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지 밝혀나갔다.

전후 일본사에서 히로히토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었다. 이 책은 일왕의 '전쟁 책임'만을 연구한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 전후 일본을 처리하는데 개입한 일왕의 '전후 책임'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히로히토가 전후 야스쿠니 신사를 한 번도 참배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평화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A급 전범을 처형하고 자신을 살려준 맥아더에게 '감사의 뜻'이 있어서라고 분석한 대목 또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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