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어울리게 등장하는 주인공은 78세의 할아버지 칼 프레드릭슨(에드워드 아스너)이다. 지금은 홀로 남아 죽을 날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노인네지만 그에게도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 모험가를 꿈꾸던 유년 시절, 동네의 버려진 집에서 엘리(엘리 닷터)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까지 골인, 남미 어딘가에 있는 파라다이스 폭포를 함께 여행하자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엘리는 먼저 세상을 떠나고 칼은 집에 처박혀 과거에 사로잡힌 채 절망에 빠져있던 차, 집까지 빼앗길 위기에 몰린다. 그때 칼은 수천 개의 풍선을 공중에 띄워 집을 타고 하늘을 날아 모험을 시작한다. 바로 그 때, 노크소리에 놀라 현관문을 열어보니 그곳에 여덟 살 소년 러셀(조던 나가이)이 서있다.
흔히 모험이 소재인 영화는 꿈을 이루는 것으로 해피엔딩을 장식하기 일쑤지만 <업>은 칼이 파라다이스 폭포에 당도한 순간, 그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친다. 그러니까 이 애니메이션은 하늘을 나는 집을 무대로 펼쳐지는 꿈과 사랑이 가득한 모험담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기대했을 법한 하늘을 나는 집의 활약(?)은 채 5분도 되지 않아 끝을 맺는다. 대신 영화는 파라다이스 폭포 근처에 불시착한 칼과 러셀이 공중에 떠있는 집을 줄에 매달아 끌고 다니는 장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 <업>에서 칼은 엘리와의 추억이 서린 과거의 시간을 포기하기 싫어 모험하는 내내 집을 이고 다닌다. |
사실 이 장면은 굉장히 기이한 에너지를 풍긴다. 파라다이스 폭포가 멀지 않고, 더군다나 삶에 대한 의지보다 죽음에 대한 갈망이 더 큰 칼에게 집은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그럼에도 고집스러울 정도로 집에 집착을 갖는 이유는 바로 엘리의 손길과 추억이 서린 과거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칼은 과거의 향수, 즉 보수적인 가치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런 유형의 주인공을 올해 초 만난 적이 있다.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에서다.
개인적으로 <업>을 보는 내내, 더 정확히는 칼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고집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괴팍한 노인네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코왈스키 역시도 칼처럼 부인을 잃고 홀아비 신세가 되어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히 보내려는 인물이다. 하지만 젊은 갱들은 동네의 안전을 위협하고 아시아인들로 채워지는 이웃들은 자꾸 코왈스키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며 가족들은 애지중지 아끼는 그랜 토리노에 호시탐탐 눈독을 들인다. 이는 마치 개발업자들에게 집을 압류 당할지도 모르고, 아시아계 소년 러셀(그렇다, 검은머리에 쭉 찢어진 눈매의 러셀은 한국계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피터 손을 모델로 했다!)이 봉사활동을 이유로 귀찮게 구는 칼의 처지와 무척이나 닮았다. 한마디로 코왈스키와 칼은 '변화'가 싫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신의 신념만은 지키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이들이 지키려는 것, 즉 코왈스키의 그랜 토리노와 칼의 집이 남들에게 하찮아 보이는 이유는 모두 오래되고 낡은 '과거'이기 때문이다.
▲ <그랜 토리노>에서 코왈스키 역시 <업>의 칼처럼 과거에 대한 미련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 하지만, 칼과 코왈스키를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이 이들의 이웃이 된 아시아계 소년이다. |
아시다시피 코왈스키의 그랜 토리노는 포드사(社)에서 1972년에 선보인 모델로 한때 미국을 대변하였지만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자동차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1940년대 훨씬 이전에 지어진 칼의 집은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현재에는 가장 우선적으로 헐어야할 건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칼이 짐처럼 힘들게 집을 이고 다니는 본질적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추론해볼 수 있다. 이는 과거의 미국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칼의 상징적인 행동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과거의 미국적 가치라는 것이 이제는 새롭게 재정립해야 할 낡은 유물이라는 사실이다. 칼이 파라다이스 폭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어릴 적 우상 찰스 먼츠(크리스토퍼 플러머)는 그런 과거에의 집착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파라다이스 폭포에서 수십 년 동안 칩거하며 4미터가 넘는 무지개 빛깔의 새 케빈을 포획하기 위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찰스는 정복자 백인의 약탈꾼적 세계관을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찰스의 본모습을 본 후 "집은 그저 집일 뿐이지"라고 말하면서 집과 연결된 줄을 미련 없이 놓아버리는 칼의 행동은 <업>의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이제 당신의 새로운 여행을 떠나세요." 엘리가 눈을 감기 전 칼에게 남겨놓은 편지의 글귀는 <업>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대변할 뿐 아니라 이미 <그랜 토리노>가 선보인 주제이기도 하다. <그랜 토리노>에서 코왈스키는 몽족 이민자 소년 타오(비 뱅)가 그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백인과는 다른 유색인종이어서가 아니라 도대체가 미국 시민으로 융합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왈스키가 타오를 올바른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켜야 할 책임감을 느끼듯이 칼 또한 마찬가지로 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러셀과 함께 먼츠에 대항해 위기를 극복하며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다. 코왈스키가 그랜 토리노의 운전을 타오에게 맡겨 새로운 미래에 기대를 걸듯 칼은 러셀을 받아들임으로써 다시금 삶에 대한 의지를 얻는 것. 이제 미국은 더 이상 백인만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코왈스키와 칼의 보수적 신념은 외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아닌 교화와 융화를 통한 발전적 모색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현재의 꿈은 미래를 추구하는 법이지만 때론 과거형으로 전락할 때가 있다. 꿈은 꿈으로써 존재할 때 행복하지만 집착하게 될 경우, 꿈에 발목 잡혀 삶이 불행해질 수 있다, 고 <업>은 말한다. (<그랜 토리노>는 꿈 대신 미래라는 단어를 썼다!) 칼의 대사를 빌자면, "중요한 건 여행이지 목적지가 아니"듯 꿈 역시 중요한 건 꿈을 꾸는 그 자체다.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건 성공했을 때는 모르지만 실패하게 될 경우, 또 다른 경우의 수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꿈을 버려야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듯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칼과 코왈스키는 증명한다.
픽사는 늘 모험을 이야기의 축으로 삼지만 결말은 항상 정신적인 성장에 맞닿아있다. 남은 것이라고는 편안히 죽음을 기다리는 일밖에 없을 것 같은 78세의 노인 칼도 <업>에서는 성장을 이룬다. 3D로 보는 <업>의 영상은 그야말로 찬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메시지 역시나 3D만큼이나 깊이가 있고 심금을 울린다. <그랜 토리노>를 우리 시대의 클래식이라고 부를 수 있듯 <업> 또한 애니메이션의 클래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업>은 픽사의 또 하나의 걸작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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