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5일 오전 10시경,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늘 조용하고 한적하던 태국 주재 한국 대사관 앞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50여 명의 시위대가 민주노총의 깃발을 앞세우고 태국어와 영어로 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계 기업의 횡포와 부당노동행위에 맞서 노동자들이 해외 주재 한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니다. 그런데 웬 민주노총 깃발? 사정인즉 이들은 자신들의 사안이 아니라 국제연대, 구체적으로는 2006년 11월 15일로 예정된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을 지지하고 한국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한 태국 노동자들이었다.
"노조 탄압 중지하라. ILO 권고를 즉각 이행하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라. 수감된 노동운동가들을 석방하라."
대사관에서 나온 담당자는 회의 참석차 방콕에 왔다가 그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민주노총 산하 모 연맹 부위원장과 멱살잡이 비슷한 몸싸움을 하고 상대의 명함을 요구했지만, 자신은 성명조차 밝히기를 거부했다.
집회는 한국 대통령의 사진을 태우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화장(火葬)이 일반적인 장례 문화인 태국에서 사진을 불에 태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대사관 관계자가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대해 매우 불쾌해 했다.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쓸데없는 내정 간섭'이라는 단어가 들리기도 했다. 이날 집회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월차 휴가는 없고, 대부분 일당으로 임금이 지급되는 태국의 노동 관행을 고려할 때, 이들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반나절, 혹은 하루치의 임금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 자리에 모인 것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대사관 앞으로 모여들게 만든 것일까?
집회를 준비했던 '민주 노조 연대 (Alliance of Democratic Trade Unions)'의 소묫 프룩사카셈석(Somyot Pruksakasemsuk) 의장은 간단하게 정리한다.
"우리의 힘은 작고 약하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잘 싸워서 좋은 사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들은 우리한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들의 의식에 그리고 대정부 교섭에서…."
위의 이야기는 태국 노동운동 속에 한국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운동, 특히 노동운동은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전투적인 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운동 세력에 대한 기대도 크다. 실제 태국의 한 활동가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아시아 노동운동을 전략이든, 실천이든, 재정이든, 도덕이든 모든 면에서 리드해야 하고,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까지 말한다. 많은 부분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운동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는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운동은 아시아의 이웃들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객관적인 조건은 형성돼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한류가 그것이다. 한류의 열풍이 거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동아시아든, 동남아시아든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보통 나오는 이야기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 혹은 연예인 이야기다. 이는 남아시아에까지 서서히 번져가고 있다.
자본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이런 한류에서 자본주의, 더 나아가 제국주의의 냄새를 맡기란 어렵지 않다. 한국 드라마 혹은 영화가 얼마에 팔렸네, 한국 드라마의 유행 이후 해당 국가에서 한국 상품이 얼마 더 팔렸네,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들리는 한편에서는, 뛰어난 한국의 문화 상품들이 아시아 각국의 안방을 점령하고 있다는 문구가 버젓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다른 나라와 경쟁하고 상품 수출하는 데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는데 무슨 말이 많으냐고 한다면, 정치관, 경제관, 세계관의 차이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논쟁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성격의 한류에 대해 한국의 소위 진보적인 세대들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흐름에 대응하는 카운터의 흐름을 만들지 않는다면, 한국의 진보적 세력들 역시 기존의 한류가 생산해 내고 있는 한국과 이웃 나라에 대한 편협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즉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며, 그 속에서 이윤을 얻는 생산자로서의 한국과 단순 수용자, 소비자로서의 이웃 나라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시아 연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 특히 한국의 진보 세력이 아시아 이웃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에 있어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아시아 연대에서 한류를 만들어 간다면 그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선,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여성 등 한국의 주변화된 집단의 목소리로부터 연대가 시작돼야 한다. 그 목소리가 이웃의 주변화된 목소리와 만날 때 그것은 큰 울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분법에서 탈피해 연대하고자 하는 상대가 필요한 것들을 주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한국과 아시아의 이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닌, 연대의 쌍방이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나누는 관계일 것이다.
멍석은 깔렸다. 그 위에서 어떻게 노느냐 하는 것은 아시아 연대를 고민하는 자들의 몫이다.
사족 하나. 최저임금에 준하는 임금을 받으면서, 얼굴도 모르는 먼 나라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하루치의 임금을 기꺼이 포기한 태국 노동자들의 연대의 마음을 우리는 언제 배우고 실천할 수 있을까? 인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 현대 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그 날을 우리는 볼 수 있을까?
* [아시아 생각]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격주간으로 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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