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탈냉전 이후 미국이 전세계 군사비 총액의 50% 안팎을 차지할 정도로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해왔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압도적인 군사력의 유지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전략적인 중심축이었다. 이는 거꾸로 미국의 군비 삭감이 미국의 패권 전략은 물론이고 국제 질서 전반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임을 예고해준다.
한국은 그 영향권의 중심에 있다. 한반도의 북쪽은 미국과 군사적 적대관계에 있고 한반도의 남쪽은 미국의 종속적인 동맹국이며 미국이 전략적 중심축을 아시아-태평양으로 옮기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미국의 군비 삭감이 한국에 미칠 영향도 대단히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 MB 정부의 '한미동맹 올인 외교'를 딛고 슬기로운 외교안보 전략을 마련해야 할 까닭이 아닐 수 없다.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2일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오른쪽)의 안내로 미 국방부 청사 펜타곤에 들어가고 있다. ⓒ프레시안 |
부시, 4조3000억 달러를 쏟아 붓고도
여기서 잠깐 미-소 냉전 종식 이후 미국 군사비의 추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설적으로 미국 군사비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면서도 패권적 지위를 공고히 했던 클린턴 행정부 때와는 달리, 부시 행정부는 임기 8년간 4조3000억 달러를 군사비로 쏟아 붓고도 미국의 쇠퇴를 재촉했기 때문이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앞세워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아버지)을 제압한 빌 클린턴은 군사비를 대폭 감축했다. 레이건 행정부와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 연간 4000억 달러를 상회했던 군사비는 클린턴 행정부 임기 동안 3000억 달러 수준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군수산업체들은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을 통해 생존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산복합체에게 '잃어버린 8년'은 조지 W. 부시(아들)가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충분히 보상받게 된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 들어 미국의 군사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임기 첫해인 2001년에 33000억 달러였던 군사비는 미사일방어체제(MD)와 F-22 전투기 사업 등 대형 무기 프로그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2003년에 4500억 달러, 2005년에 5200억 달러, 2007년 6200억 달러를 지나, 임기 마지막 해인 2009년에는 7100억 달러를 넘긴 군사비를 남기고 백악관을 떠났다. 이 액수에는 국방부 소관 예산과 함께 에너지부의 핵무기 관련 예산이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부시 행정부가 막대한 군사비를 쏟아 붓고도 목표했던 바를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부시 행정부는 임기 8년간 군사비로 약 4조3000억 달러를 쓰면서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또한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이라고 불렀던 북한과 이란의 핵 개발도 막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위를 통해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의 부상을 봉쇄하겠다던 대전략(grand strategy)은 역효과만 냈다. 부시 8년간 중국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끝에 오늘날에는 'G2'라고 불릴 정도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또한 부시의 군사비 증액은 '부자 감세'와 조우하면서 미국 재정 적자의 핵심적인 이유가 되고 말았다.
4500억 달러가 줄어들어도
뒤이어 등장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과도한 군비 지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 <담대한 희망>을 통해 "펜타곤과 방위 산업체, 그리고 국방 예산이 대규모로 집행되는 지역구에 속한 의원들로 구성된 '철의 삼각 지대'(iron triangle)가 미국 외교정책 수립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비판하면서, 미국의 새로운 안보전략은 "새로운 현실에 맞춰 국방비 지출과 군사력 구조를 조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대선 1년 전인 2007년 10월 한 연설에서는 "나는 낭비가 심한 군사비 가운데 수백억 달러를 삭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집권 초기에 군비 삭감을 추진하지 않았다. 일례로 당선 직후 내놓은 '오바마-바이든 플랜'에는 군사비 감축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프간 투입 미군 증강을 추진하고 공화당에게 MD와 핵무기 현대화를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역주행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라 빚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미국의 군사비 삭감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초당적으로 구성된 '슈퍼 위원회'는 향후 10년간 4500억 달러의 군사비 삭감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고, 슈퍼 위원회가 총 1조2000억 달러의 예산 감축안을 11월말까지 합의하지 못하면 펜타곤은 5000억 달러를 추가적으로 삭감해야 할 판이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펜타곤은 상하원의 군사위원회와 함께 추가적인 군사비 삭감을 금지하는 법안도 마련중이다.
이처럼 군사비 삭감의 필요성은 높아지고 있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백악관 예산 국장 출신으로 국방장관에 기용된 리언 패네타 국방장관이 엄청난 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고 실토할 정도이다. 그는 11월 6일자에 게재된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군인 연금 및 건강보험 개혁, 불필요한 군사 기지 폐쇄, 유럽 주둔 미군 감축, 핵무기 추가 감축, F-35 전투기 등 일부 무기 개발 및 생산 조정 등을 통해 군사비를 삭감해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병력 감축 의사도 나타냈는데 2015년부터 육군 5만 명, 해병대 1만5000명 정도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현재 7000억 달러에 달하는 국방부 소관 예산을 2017년에는 5200억 달러 수준으로 감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비 삭감 계획이 구체화될수록 반발의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삭감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무기 사업 및 기지 폐쇄 후보 지역의 의원들은 지역 경제 위축 및 실업난 가중을 이유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대표적인 삭감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는 MD와 핵무기 관련 예산 삭감은 '절대안보'를 신봉하는 공화당의 반대에 막혀 있다.
이처럼 군비 삭감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군산복합체 및 이와 결탁된 의원, 언론, 안보 전문가들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지만, 향후 10년간 미국 군사비는 5000억 달러 정도 줄어들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10년 후에 이 정도가 줄어들더라도 미국의 국방부 소관 예산은 연 5000억 달러, 여기에 에너지부 소관의 핵무기 관련 예산을 포함하면 6000억 달러 안팎에 달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군비 삭감 시대의 미국의 '엄살 섞인 횡포'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미국 외교안보정책 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군산복합체 및 이와 결탁된 세력은 군비 감축을 저지하고 위해 외부의 위협을 더더욱 부풀릴 것이다. 미국 정부는 지갑이 얇아졌다며 동맹국들에게 더 많은 역할과 비용 부담을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50년 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사에서 역설한 경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거대한 군사집단과 대규모 무기산업이 결탁해 행사하는 영향력은 미국의 새로운 경험이다. 이들은 경제와 정치는 물론이고 우리의 영혼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잘못된 군산복합체의 파워의 부상에 따른 잠재적인 재앙은 지금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깨어있는 시민들과 함께 정부 각 위원회에서 군산복합체가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 다음에 이어질 글: 군비 삭감 시대의 미국, 세계전략은 어떻게 바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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