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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이를 죽이는 부모…죽은 엄마의 젖을 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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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이를 죽이는 부모…죽은 엄마의 젖을 문 아이

[노근리, 60년 전 오늘]<3> 쌍굴에서의 악몽, 7월 26일 ②

☞ <1> "비극의 시작, 7월 25일" 바로가기
☞ <2> "잔인한 폭격, 7월 26일 ①" 바로가기


시체더미가 쌓인 철로 위로 미군 병사들이 나타나 돌아다녔다. 그들은 시신을 군홧발로 툭툭 차면서 생사를 확인했다. 그리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모아 쌍굴 쪽으로 몰고 갔다.

작은 배수구에서도 피난민들이 줄줄이 걸어 나왔다. 잘못도 없는데, 이들은 투항하듯 양팔을 크게 들고 울먹이며 미군의 지시를 따랐다. 걷는 길엔 형제의, 부모의, 이웃의 시신이 나뒹굴었다. 모두의 새하얗던 저고리는 새빨갛게 젖어 있었고 얼굴은 탄약 그을음과 땀으로 끈적였다.


미군 병사들은 반사 상태로 뒹굴 대는 부상자들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탕! 소리에 이어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자식에게 먼저 도망치라 손짓했던 늙은 어머니, 부모와 헤어져 울던 아이들이 살려달란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벌레처럼 죽어갔다.

열 살 난 해찬도 다리 부상에 걷지 못하는 엄마, 어린 동생, 눈알이 빠진 누나를 인솔하며 쌍굴까지 걸어갔다. 해찬은 가족들이 걸음이 느려 미군이 총을 쏘면 어쩌나 연신 불안했다. 불붙은 덤불과 짐 더미를 피하고 동강난 이웃들의 시체를 넘다보니 쌍굴에 이르렀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그들은 쌍굴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빠졌다.


콘크리트 쌍굴은 내부 둥근 천장의 높이가 10.5미터, 각각의 폭이 7미터, 길이는 24.5미터정도였다. 쌍굴 안으로 냇물이 흘렀으나 동쪽 굴로 지나갔고, 서쪽 굴로는 아주 조금만 흘렀다. 서쪽 굴은 큰길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노근리로 가는 샛길로 쓰였다. 그래서 피난민들은 주로 서쪽 굴에 몰려 있었지만, 동쪽 굴에도 100여 명의 피난민들이 있었다.

해질 무렵, 동쪽 굴 안으로 미군 위생병 둘이 들어왔다. 그들은 간단한 상비약과 붕대로 부상자들을 치료해주기 시작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피난민들은 한국말로 "우리를 보내달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들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대학생이 한 명 있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왜 우리를 죽이는 거냐"고 물었다.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먹이는 이들을 제치면서, 그들은 그 대답만을 남기고 떠났다. 모두 절망으로 얼굴을 쥔 채 흐느꼈다.


굴 안엔 시신과 산 사람, 살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이 뒤엉켜 있었다. 부상자들은 갈증을 참지 못해 헉헉 거렸다. 더운 날씨 탓에 시체엔 순식간에 파리떼가 꼬였다. 이 악몽같은 시간 속에서도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신음소리를 내지 못했다. 또 총알이 날아올까 봐 숨을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총격이 시작됐다. 굴 반대쪽에서도 총알이 날아왔다. 좁은 곳에서 수백 명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미군들이 굴 양쪽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고지 위에서 굴 입구를 조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총알이 쏟아졌고, 쌍굴 속 피난민들은 독안에 든 쥐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더위를 먹었는지, 자포자기한 건지, 또 한 남자가 쌍굴 밖으로 나가겠다며 일어났다. 그는 쌍굴 그늘도 넘기 전에 총탄에 맞아 죽었다. 총격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비통한 흐느낌만이 정적을 감돌았다.


이번엔 또 포탄 공격이었다. 생각이나 판단, 그런 것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폭 7미터에 길이 24.5미터짜리 지옥에서 사람들은 살겠다고 안쪽 벽에 달라붙었다. 급기야 어떤 이들은 시신 두세 구를 방패삼아 쌓고 그 안으로 숨었다. 어떤 사람은 철길 위에 팽개쳐진 짐 꾸러미에서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고 둑 위를 기어오르다 총에 맞아 굴러 떨어져 그대로 죽었다.

미군의 공격은 10~20분 간격으로 계속됐다. 총격이 멈춘 순간에도 쌍굴 속은 먹을 것도 바람 한 점도, 희망도 빛도 아무 것도 없는 지옥임에는 변함없었다. 그렇게 해가 져갔다.


사람들은 물을 떠다 놓고, 무릎을 꿇고, 성경 구절을 되뇌며 각자 신을 찾기 시작했지만 이미 마음은 절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은 에누리 없이 흘렀고, 절망에 지친 사람들은 졸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관총이 또 불을 뿜더니 쇳소리를 내며 콘크리트벽에 무수한 불똥이 튀었다. 바람을 쐬기 위해 입구께로 나갔던 사람과 안쪽에 있던 사람들이 또 총탄에 죽어 갔다.

피비린내가 무더운 바람에 실려 굴 입구로 들어오고, 굴 안은 전율과 비통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어떤 여인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악다문 이에서 끙끙 새어나오던 신음이 결국 듣는 사람마저 아프게 하는 끔찍한 것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산모였던 것이다.


바로 옆, 서쪽 굴에서도 끔찍한 살상극이 벌어졌다. 이 굴엔 시내가 흐르고 있었는데, 모두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한 청년이 시체를 안아다가 벽 밑에 바리케이드를 쌓더니 이내 다른 청년들도 거들었다. 그러나 이 시체 방벽도 총알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젖먹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 울어댔다. 다 같이 죽음 앞에 놓인 사람들 마음은 똑같았다. 울음소리에 다시 총격이 날아올까 봐 젖먹이의 입이라도 막으라며 윽박지르고 애원했다. 부모들은 끔찍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남자니께, 어떻게든 탈출해야 헌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야 혀! 꼭…"

밤이 깊어지자, 여자들은 자기 남편이나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치마 입고 애 업고 뛰지도 못할 바에야 당신들이나 빨리 도망쳐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꼭 전해 달라고, 부디 대를 이어달라고. 잠시 후 여인들의 울먹이는 소리가 굴 안을 메웠다.


자정을 넘어설 무렵, 옷을 벗고 몸에 진흙을 바른 남자들이 탈출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살금살금 굴을 빠져 나갔다. 쌍굴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남자들이 빠져나가자 굴 안엔 더 심한 공포와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긴 싫다며 움직였던 이들에겐 총알이 날아왔다. 죽음, 또 죽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7월 26일이 끝났다. 하지만 비극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 본 기사에 쓰인 삽화는 박건웅의 <노근리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며 저작권은 출판사 '새만화책'에 있음.

☞ <4> "두 얼굴의 미군, 7월 27일·28일"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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