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외세가 그은 국경선, 반외세 저항의 전선이 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외세가 그은 국경선, 반외세 저항의 전선이 되다

[이웅현 '비극의 아프가니스탄']<3> 파슈투니스탄에서 탈레바니스탄까지

듀란드 패밀리

살아 있었더라면 조국의 운명을 바꾸어놓았을지도 모를 아프가니스탄의 두 '국민 영웅'이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압둘 하크였다면, 거꾸로 이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이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를 즉,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의 운명을 결정지은 세 영국인이 있었다. 셋 모두 19세기의 인물들이었고, 듀란드 가문(Durand家)의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헨리 듀란드는 '가즈니의 영웅'이라 불렸다. 1838년 12월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두려워 한 영국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개전의 목표는 영국이 보기에 '의심스런' 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 도스트 모하메드(Dost Mohammed)를 영국이 보호하고 있던 샤 슈자(Shah Shuja)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를 출발한 '인더스군'이 카불로 진격하면서 부딪친 난관 가운데 가장 막강했던 것이 카불 남쪽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요새 가즈니였는데, 이곳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카불 게이트'를 폭파해 인더스군의 병참과 진군의 장애물을 제거한 사람이 당시 26세였던 '벵갈 지역 주둔 공병' 듀란드였다.

하지만 결국 1842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 엘핀스턴 장군의 1만6000여 명의 병력 가운데 군의관 윌리엄 브라이든 박사만이 유일하게 탈출하는 치욕을 겪었지만, 영국은 이 전쟁을 통해 두라니 왕조 아프가니스탄에 무력 개입해 통치자를 교체하는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샤 슈자 역시 영국군 철수와 함께 도스트 모하메드에 의해서 축출되었다) 그리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물론 인도 세포이 반란의 진압 과정에 활약한 헨리 듀란드는 1871년 식민지 인도의 펀자브주 부지사까지 올랐다.
▲ 앨저넌 듀란드

헨리의 셋째 아들 앨저넌(Algernon) 듀란드 대령은 1889년 캐시미르 북단의 산악지역 길기트(Ghilgit)로 파견되어, 치트랄(Chitral) 나가르(Nagar) 훈자(Hunza) 등 파미르 고원의 남부와 힌두쿠시 산맥의 동부 일대를 확보했다. 특히 훈자를 공략하던 1891년, 암벽과 바위투성이의 요새들을 60년 전 아버지의 수법으로 파괴하고 진군함으로써 전공을 세웠고, 이 전공으로 대영 제국의 훈장을 받았다. 앨저넌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이 지역은 러시아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거나, 아프가니스탄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헨리의 첫째 아들 에드워드는 아프가니스탄의 운명과는 관계가 없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을 철도로 탐험하는 등 아프가니스탄 북서쪽을 무대로 활동했다.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인도를 잇는 지대를 벌판으로 삼아 형과 동생이 종횡무진 누비던 1893년 카불의 압두르 라만(Abdur Rahman) 왕을 방문,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의 운명, 아니 적어도 아프가니스탄의 동남부 국경 또는 파슈툰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람이 헨리의 둘째 아들 헨리 모티머(Mortimer) 듀란드였다. 이 주니어 헨리는 인도총독부의 외상이었고, 따라서 그의 국경획정은 영국 정부의 훈령을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19세기 말에 그가 그어놓은 이 국경선(듀란드 라인)은 21세기의 10년을 지난 지금까지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으로 남아 있다.
▲ 헨리 모티머 듀란드

우연과 필연, 합리와 불합리, 행운과 악운, 개인과 집단 등등의 '지류'들이 모여 형성되는 역사(국가 혹은 민족의 기억)라는 '대하'의 물줄기를 어찌 한두 명의 개인이 바꾸어 놓을 수 있겠는가마는, 아무튼 이 세 듀란드는 19세기 중반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근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듀란드 라인과 아프가니스탄 국경

이미 1885~86년에 걸쳐 러시아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북쪽 국경선을 아무 다리야 강의 북쪽 50마일 선으로 획정했기 때문에, 듀란드 라인을 영국인들의 공러증(恐露症)의 산물로만은 볼 수 없었다.

1888년 인도총독으로 부임한 랜스다운(Lansdowne)은 압두르 라만에게 러시아와 합의한 북쪽 국경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압두르 라만은 물론 아프가니스탄 동남부의 종족들(주로 파슈툰)이 대영 무력항쟁을 멈추지 않자 '소란스런 변방'을 잠재우기 위해 국경 획정을 강요했던 것이다.
▲ 듀란드 라인과 파슈투니스탄

1897년까지 획정된 이 무모한 국경은 종족분포는 물론 거주민의 경제생활을 포함한 중요한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은 즉흥적이고 자의적인 것이었다.

페샤와르 북서쪽에서 쿠나르 계곡으로 흘러 내려와 현재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고산지대를 타고, 결국 칸다하르와 퀘타 사이로 빠져 발루치스탄을 왼쪽에 두면서 동쪽 이란과의 접경지역으로 연결되는 이 국경선은 원래 아프간인들이 자신들의 주거지라고 생각하던 인더스강 부근부터 150킬로미터 내지는 200킬로미터 동쪽으로 축소되고, 남쪽으로는 발루치스탄을 국경선 밖에 둠으로써 바다(아라비아해)로의 출구가 봉쇄된, 내륙국가 아프가니스탄을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사이에 거주하는 파슈툰을 양분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파슈툰족 거주 지역 내에서도 마을과 마을, 집과 경작지를 갈라놓았다. 이처럼 지역의 인구분포와 역사를 무시한 이 선을 영국인들은 '과학적인 국경선'이라고 불렀다.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를 침공하려는 세력이 넘보기 어려운 계곡 저 아래쪽과 산봉우리 저 높은 쪽을 연결한 것이니만큼 전략적으로는 매우 '과학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비대도 주둔하지 않고, 경계의 표석도 없는 (애당초 그럴 수 있는 지형도 아니었고 따라서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 2400킬로미터가 넘는 국경선은 당시 영국인들(1947년 이후에는 파키스탄 정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허구(fiction)' 또는 '상상의 국경선'에 지나지 않았다.
▲ 압두르 라만

획정에 대한 대가로 아프가니스탄의 군주 압두르 라만에게는 경제적 보상과 무기가 주어졌고, 그는 이를 자산으로 다양한 종족의 모자이크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국경선을 용인했다는 점 때문에, 1880년부터 21년 동안 재위하면서 폭압적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는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공고화에 주력했던 이 '철혈군주(Iron Amir)'는 아프간인(파슈툰인)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자'로 각인되었다.

한편 러시아와 접경하는 것을 꺼린 영국은 1895년 파미르 지역 즉 앨저넌이 활약하던 지역의 북쪽에 중국으로 깊숙이 찌르고 들어가는 손가락 모양의 지형(와한 회랑)을 아프가니스탄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 지역까지 통제할 능력이 없다며 거부하는 압두르 라만에게는 다시 경제적 보상이 주어졌고, '철혈군주'는 또 한 번 '물렁한 군주'가 되었다.

국경분쟁과 파슈툰 민족주의

1929년 타지크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왕위를 찬탈했을 때, 두라니 파슈툰 왕실의 나디르 한(나디르 샤)은 듀란드 라인의 동서에 거주하는 두라니 파슈툰족의 경쟁 종족 길자이 파슈툰족에게 파슈툰의 왕권복위를 위한 협조를 촉구했고, 길자이 파슈툰은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들의 지원으로 나디르가 왕위 탈환에 성공한 것을 보면 듀란드 라인은 파슈툰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FATA(노란색)와 NWFP(하늘색)

영국이 인도에서 물러가는 과정 특히 1947년 파키스탄이 건국되면서 문제는 발생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철수하기 전에 통치영역 내의 파슈툰인들을 다시 행정적으로 분할하여 북서국경지방(NWFP, North West Frontier Province)과 발루치스탄으로 나누었고, NWPF의 서쪽 즉,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에는 남·북 와지리스탄을 비롯한 7개의 행정단위로 구성된 종족연방지역(FATA, Federally Admistered Tribal Area)이 형성되었다.

영국이 식민지로부터 철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 NWFP의 유명한 파슈툰 민족주의자 '국경의 간디' 압둘 가파르 한이 '붉은 셔츠부대'를 조직하면서 아프가니스탄 파슈툰과의 통합을 주장했지만, 영국은 1947년 8월의 주민투표에서 파슈툰인들에게 인도냐 파키스탄이냐 하는 두 가지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듀란드 라인의 유효성을 고집했던 것이다.

파키스탄은 분명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이 설정한 국경을 합법적으로 계승했다. 그러나 1949년 아프가니스탄의 로야 지르가(종족 원로회의)는 듀란드 라인의 무효를 선언했고,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때까지 아프간인들은 파키스탄에 대해 줄기차게 듀란드 라인 동쪽의 파슈툰 거주지역의 반환을 요구했다.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두라니 파슈툰 통치자 다우드는 파슈툰인들의 독립국 '파슈투니스탄'을 제창했고, 1979년 공산주의 독재자 하피줄라 아민은 한술 더 떠 파슈툰 사회주의 공화국, 우즈베크 사회주의 공화국, 타지크 사회주의 공화국 등등으로 구성되는 '대아프가니스탄 연방'을 구상했다. (결국 그는 중앙아시아에 동종의 공화국들을 보유하고 있던 소련의 미움을 사고 말았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들은 소련의 점령 이후 잠잠해졌다. 1979년 소련 침공 이후 페샤와르 등 파키스탄 파슈툰 지역에 둥지를 튼 반정부 대소 항전의 전사들이 파키스탄 파슈툰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파키스탄 정부와 파키스탄 파슈툰들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억6000만 명이 넘는 파키스탄 인구 가운데 약 15%를 점하는 파키스탄 파슈툰인들의 NWFP를 중심으로 한 독립움직임도 전혀 다른 이유에서 소강상태에 빠졌다. 파키스탄 내에서 파슈툰의 대표성이 인정을 받았고, 지위가 향상되었던 것이다. 파키스탄 군부의 고급장교들 가운데 30~40%를 파슈툰인들이 차지했고, 중앙정부 관료의 약 10%를 이들이 점했다.

독립 이후 파키스탄에서 발생한 네 차례의 쿠데타로 집권한 장군들 가운데 두 사람 즉, 아유브 한(Ayub Khan)과 야히아 한(Yahya Khan)도 NWFP 출신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에 비해서 파키스탄의 파슈툰은 비교적 행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1989년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후 자미아트-울-울레마-이-이슬라미(JUI) 같은 급진세력이 득세하면서 지역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편 1996년 카불을 장악하고 2001년 축출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한 길자이 파슈툰 중심의 탈레반은 주력의 일부가 파키스탄 파슈툰이었음에도, 자국을 승인하고 후원하는 파키스탄 정부에 파슈툰의 통합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불에서 쫓겨난 이후 이들은 다시 파키스탄의 파슈툰 지역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탈레바니스탄

2006년 이후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탈레반 반군의 테러와 게릴라 활동이 점증하기 시작하자, 이제 미국은 물론 아프가니스탄 정부도 (파슈툰 거주지역의 반환이 아니라 오히려) 이 지역에 대한 파키스탄 정부의 통제 강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파키스탄의 파슈툰 거주지역 가운데 특히 아프가니스탄 국경과 접한 FATA의 남·북 와지리스탄은 서방 언론에 의해서 '탈레바니스탄'이라고 불리면서, 알카에다와 탈레반 반군이 아프가니스탄은 물론 파키스탄에 대한 테러와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는 근거지로 지목되었다.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양국 사이의 국경을 넘나드는 게릴라들에 의해서 파슈투니스탄의 통합이 달성되는 듯한 묘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형적·정치적 이유 때문에 파키스탄의 군사적 통제가 미치지 못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통제력의 누수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이 지역의 안정을 기대하기는 현재로서는 어렵다. 2009년부터 미군의 무인공습기가 이 지역에 대한 폭격을 시도하고 있는 것도, 군의 지지에 의존하는 파키스탄 정부의 지역 통제력에 대한 의구심에서 비롯한다.

탈레반 반군, 아랍 테러리스트, 지하드의 전사들이 혼재하게 된 이 지역의 무정부상태를 해소하고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해법, 정책은 무엇일까?

미국의 안보는 물론 지역의 안정을 희구하는 사람들은 미국-파키스탄의 군사적 협력을 촉구하며, 듀란드 라인 설정 이전부터 불안정했던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미국의 대테러전쟁 승리는 물론 파키스탄의 진정한 국가건설 완성의 첩경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탈레반 세력과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경선의 의미가 없는 이 지역의 군사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은 방문을 열어 놓고(탈레반이 잠입해 들어오는 국경에 대한 통제 없이) 에어컨을 가동하는 것(탈레반 소탕작전을 전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자체 안보능력의 강화와 경제·사회적 재건에 주력하면서, 탈레바니스탄 지역에 대해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로서는 막 시작된 이 정책 또는 전략의 성패 여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정규전은 화력과 전술의 싸움이고, 비정규전이 전략과 의지의 싸움이라면,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이미 오래 전에 의지의 싸움으로 변질된 것이 분명하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라인 설정 후 한 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 모티머 듀란드가 지역의 상황을 보게 된다면 두 번 놀랄 것이라는 점이다. 한 번은 탈식민지 시대로 진입한 현재도 자신이 그어놓은 선이 여전히 공식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리고 또 한 번은 정작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티끌만큼도 그 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