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대한상공회의소 강연에서 "북한의 목표는 적화통일이고 그런 수단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것" 등의 말로 매파 본색을 드러냈던 유 장관은 이날 인터뷰에서도 심상찮은 발언을 쏟아 냈다.
연합뉴스 :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평가하나. 유명환 : 확실한 것은 북한이 농축 우라늄 개발을 상당히 일찍 시작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 1994년 제네바 합의 직후, 최소한 1996년부터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그 수준이 어느 단계인지, 농축우라늄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고 얼마나 무기화했는지 등은 알 수 없다. 안다고 해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사안이고, (관련국 사이에) 정보는 공유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거기에 대한 정보를 밝힐 단계는 아니다. |
정보를 밝힐 수 없다고 하면서 '96년 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시작'이란 정보를 슬쩍 흘렸다. 정부 고위 당국자가 북한의 농축 우라늄 개발 시점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건 처음이다.
부시 행정부 시절이던 지난 2002년 미국의 네오콘들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로 인해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북한은 시종일관 부인하다가, 2009년 6월 외무성 성명을 통해 우라늄 농축 작업을 시작한다고 선언하고 9월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고 밝혔다.
북한은 2008년 6월 핵 신고서를 제출할 때 우라늄 문제에 관한 내용은 별도로 미국에만 비밀리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다시 6자회담이 열리면 북한이 2008년 미국에 전한 사항과 작년에 밝힌 내용을 바탕으로 우라늄 문제가 논의될 것이다.
문제는 우라늄 농축에 관한 논란은 6자회담의 원심력을 키우는 이슈라는 점이다. 6자회담은 비핵화, 관계정상화, 평화체제, 경제·에너지 지원 등이 균형적이고 포괄적으로 논의되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우라늄 농축 문제도 그런 과정 속에서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우라늄 농축 문제만 크게 부각되어 6자회담이 북한을 몰아세우고 추궁하는 무대가 될 경우 북한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갈 공산이 크다.
유명환 장관의 이날 발언은 우라늄 농축 이슈만 도드라지게 하는 효과를 내기에 충분하다. 더군다나 지난달 28일 <워싱턴포스트>는 파키스탄의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북한은 이미 2002년 우라늄을 농축하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칸 박사는 우라늄 농축과 관련해 북한과 비밀 거래를 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보도 이틀 후 정부 고위 당국자는 "우라늄 농축 부분에 대한 워싱턴의 관심과 경계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 장관의 말은 칸 박사의 진술이 공개됨에 따라 다시 불붙기 시작한 우라늄 문제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이런 분위기라면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오는 것조차 꺼려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평화체제, 관계정상화, 경제 지원 등을 제시하며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 내려는 미국의 구상은 어그러진다. 부시 시대 네오콘들이 바로 그렇게 했다. 겉으론 북한의 비핵화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협상을 왜곡시켜 판을 깼다. 그 사이 북한의 핵 능력은 커졌다.
연합뉴스 : 북한은 평화체제 논의를 중시하고 있는데. 유명환 : 북한이 평화체제부터 논의하자는 것은 비핵화 과정이 진전된 후 별도의 포럼에서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하자는 9.19 공동성명의 취지에도 맞지 않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이는 북한이 비핵화를 안 하겠다거나 지연시키겠다는 전술로 볼 수밖에 없다. 보즈워스 특별대표도 지난 12월 방북시 북측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에 대해 이러한 한미의 공통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
평화체제부터 논의하자는 것은 비핵화를 안 하겠다거나 지연시키려는 전술이라는 논리를 폈다. 평화체제와 비핵화는 별개의 것이며, 비핵화를 먼저 진전시키고 평화체제는 나중에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유 장관의 머릿속에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평화체제 구축을 통해 북한의 군사·안보적 우려를 해소시켜 주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 의원(민주당)은 지난 달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협정체제 논의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표현했다. 그는 또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북미관계 정상화 없이 북핵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허상'"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평화체제를 나중에 논의하자는 것이 오히려 "비핵화를 안 하겠다거나 지연시키려는 전술"이 된다.
한국 정부의 입장이 그러하다면 이 역시 오바마 미 행정부의 구상과 어긋난다. 오바마 행정부는 출범 이후 일관되게 평화체제(협정)와 비핵화를 '포괄적으로' 협상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지난 11월 "북한이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재다짐한다면(recommit)" 관계정상화와 평화협정 등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 2월과 7월에도 같은 말을 했고,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그랬다. 따라서 보즈워스 대표가 북한에 가서 유 장관과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연합뉴스 :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언제쯤 다시 열릴 것으로 보나. 유명환 : 북한이 당면한 어려운 경제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협상국면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본다. (중략) 북한으로서는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평양 방문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 전달로 6자회담에 돌아올 수 있는 체면을 다 확보했다고 본다. 그렇게 볼 때 이제 중국이나 북한이 거기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호응할 때라고 생각한다. |
이명박 정부 안팎의 인사들은 북한이 협상에 나올 때면 언제나 '배가 고파서' 혹은 '제재가 아파서'라고 주장한다. 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 자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6일 <동아일보> 칼럼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간절히' 원한다"며 "북한의 장거리 로켓 시험발사와 제2차 핵실험에 취해진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이 북한을 궁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보상과 제재 탈출이라는 목적에만 시각을 고정시켜 북한의 행위를 설명하는 건 문제라는 지적이다. 향후 협상판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더라도 한국의 태도를 경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협상이 시작되면 북한은 '벼랑 끝 전술'을 또 쓸 것이다. 교착과 진전이 반복될 것이다. 그게 협상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편향된 시각을 그대로 가져간다면 만약 북한이 협상을 어렵게 할 경우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다. '쓴 맛을 더 보게 하자.' 줄다리기를 해서라도 비핵화를 진전시키려는 미국이 마냥 반길 리는 없을 것이다.
▲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연합뉴스 |
중국이 더 적극적으로 호응해야 한다는 말에도 북핵 협상에서 한국의 책임을 슬그머니 빼 버리는 의미가 숨어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는 북핵 해결을 위해 '그랜드 바겐'이란 제안을 했다면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유 장관은 인터뷰에서 "기본 구상과 개략적 시퀀싱(순서정하기)에 대한 우리 나름대로의 복안이 마련되어 있다"는 말로 그랜드 바겐이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음을 실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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