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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여덟의 DJ, 젖 먹던 힘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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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흔 여덟의 DJ, 젖 먹던 힘을 다했다

[정세현의 정세토크]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 네 장면

#1. 1971년 4월, 서울 장충단 공원

그걸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김대중이란 인물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장충단 연설 때부터였습니다.

4월이었으니까 대학원에 막 들어갔을 땐데, 국제정치학을 공부한답시고 대학원에 갔지만 막연히 교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도, 세부적으로 뭘 공부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 때까지도 마음 한 편에서는 정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하...아버님이 워낙 반대를 많이 하셔서 대학도 정치학과를 못가고 외교학과에 가는 식으로 타협했지만, 기회 있으면 정치권에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 연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소위 학생운동권에 속해 있는 친구들하고 같이 장충단에 갔습니다. 그때는, 존칭 생략하고, '야, 김대중이 대단한 웅변가라는데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들어나 보자'고 하면서 갔어요. 잘 들리고 잘 보이는 자리를 잡아야 하니까 연설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찌감치 가서 나무에 올라가서 걸터앉아서 기다렸죠.

박정희 후보의 연설이 끝나고 김대중 후보가 두 번째로 등장했는데, 연설 방식도 방식이지만 나한테는 그 내용이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때는 야당이라고 하면 솔직히 별 대안 없이 여당을 비판하는 식으로 연설하고 그랬어요. 또 그때 우리나라의 화두는 단연 경제 건설이었어요. 그러니까 박정희 후보도 경제 얘기만 쭉 했습니다. 당선되면 더 잘 살게 해주겠다고.

그런데 김대중 후보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국제정세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국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남북 대결을 계속해야 하겠는가. 이젠 남북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우선 기자 교류, 스포츠 교류 같이 비정치 분야에서 교류·협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미·일·중·소 주변 4국은 남북한을 교차 승인해야 한다. 그렇게 평화 공존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외교를 해야 하고, 남북은 평화 교류를 해서 평화 통일로 가야 한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보고...솔직히 당시 정치인들은 그저 신문에 나오는 얘기나 반복하는 정도였는데, 김대중 후보는 국제정세를 학자들보다 훨씬 세밀하면서도 폭 넓게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 분단국인 한국에서 국제정치학이란 건 바로 통일 문제를 위해 필요한 거구나, 외교관도 그런 식견이 있어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국의 국제정치학도가 중심 화두로 삼아야 할 것은 역시 통일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그런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물론 나의 은사님이자 70년대 말 통일원 장관을 하신 이용희 교수께서 우리 학부 시절에 '한국에서 국제정치학을 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문제, 통일 문제를 연구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죠. 그런데 그 때는 어려서 그 말이 뭔지 몰랐는데, 현실 정치인이 대중연설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보고, 그 교수님의 말씀이 김대중 후보의 연설과 연결된다는 생각을 장충단에서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난 그 후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통일 문제를 독학했습니다. 왜냐면, 그때까지만 해도 통일이라는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석·박사 논문을 쓰다는 게 가능하지 않았어요. 특히 내가 다닌 학교에는 당시만 해도 시사성이 너무 강한 문제를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걸 금기시하는 학풍이 있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만 공부했는데, 그게 인연이 됐는지, 아니면 운명이 그랬는지 모르지만 바로 그 대학 은사님이 박정희 정부의 마지막 통일부 장관이 됐고, 그러면서 그때 내가 통일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는 분이 장관됐다고 해서 속된 말로 빽으로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마침 연구직 공무원 20~30명을 대거 공채하는 계획이 있어서 거기에 응시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77년 가을부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통일원에 들어가서도 교수가 되려고 박사과정을 계속 밟았고, 논문도 대학으로 갈 수 있는 걸 써야 하기 때문에 '중공'의 대외관계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그때는 공산권 연구를 해야 시장성이 있었기 때문에...그런데 결국은 대학으로 못 가고 계속 통일원에 있게 됐습니다.

▲ 1992년 3월 김대중 당시 민주당 총재가 부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정당연설회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프레시안 손문상

#2. 2000년 6월, 모의 남북 정상회담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6월 6일에 청와대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대화를 하는 상황을 상정해서 모의 회담을 하는데 상대역을 하라는 거예요. 잠시 정부에서 물러나서 명지대와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북회담을 앞두고는 언제든 그런 모의 회담을 합니다. 체육회담이면 체육회 사람들이 가고, 적십자회담엔 적십자 사람들이 가고, 경제 회담에는 경제 부처 관리들이 가는데, 그 사람들은 남북회담에 대한 현장감각도 없고 북한의 협상 전술도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회담을 많이 해 본 통일부 사람들이 북한 대표역을 하면서 실제 회담처럼 리허설을 합니다.

대통령이 6월 6일 오전에 현충일 행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오후 2시부터 모의 회담을 한다고 해서 나도 청와대 2층 회의실로 갔는데, 김정일 위원장 역할은 김달술 씨라고 70년대에 남북대화 사무국장을 하신 분이 맡고, 나는 당시 북한의 대남비서였던 김용순 역할을 했습니다.

원고 같은 건 없었습니다. 실제 상황으로 하는 거니까. 김달술 씨는 김정일 역할이니까 큰 테두리에서만 얘기하고, 상대를 공격하거나 어렵게 하는 역할은 대남비서 역할인 내가 해야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남북대화의 선례에 따라 초청 측인 김정일 위원장이 우선 자기네 입장을 얘기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거기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식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중간중간에 끼어들어서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겁니다. 남북의 입장이 차이가 나는 부분에 대해 반박하고...미군 철수 문제, 연방제 통일, 국제사회에서 남북이 협력하자고 해놓고 잘 안 되는 부분 등등을 대면서 공격하고 치고 들어가는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무력통일도 안 되고 흡수통일도 안 되고 교류협력을 하자"는 논조로 쭉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아니 그렇게 하려면 미군은 내보내야 할 거 아닙니까?"하면서 찌르고 들어갔죠. 실감나게 하려고 가끔씩 김달술 씨한테 "국방위원장 동지"라고 부르거나 "위원장 동지, 제가 한 마디 하갔습니다" 이렇게 허락을 받고 공격을 하는 겁니다.

또 그러다가 내가 대뜸 "장군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면 김달술 씨가 "그럼 김 비서가 해보시오" 이런 식으로 주고받으니까 김 대통령이 깜짝 놀라는 눈치더라고요. 눈치가 그러니까 또 나는 "그럼 결국 연방제 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면서 따지고 들어가고...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말을 받아서 답을 하는데...자료 하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머릿속에서 나오는 말을 줄줄줄 하는 겁니다. "그건 말이요..." 하면서. 원래 어투가 그런데, "주한미군 철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미군이 있어도 남북 교류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김용순 비서도 92년 1월 20일 미국에 가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대면서 대응하더라 이겁니다.

연방제에 대해서도 '80년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란 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91년에 당신들이 느슨한 연방제를 얘기하면서부터는 사실상 우리가 말하는 남북연합하고 비슷하게 됐어요. 그래서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답변이 탁탁 나오는 겁니다. 그게 결국 6.15 공동선언에 들어간 대목이죠.

그렇게 모의 회담에서 4시간 동안 원고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북한이 늘 제기하는 근본문제라는 게 있어요. 주한미군, 연방제, 국가보안법 철폐 같은 거. 그걸 김용순이, 내가 제기를 하면 거기에 대해 아주 간단하면서도 상대방이 이론을 제기할 수 없게 답변을 하는 겁니다. 어떤 때는 한 문제에 대해서 20~30분씩 설명을 계속 하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근본문제라는 건 북한하고 회담할 때면 언제나 나오는 겁니다. 북힌은 잘 나가다가도 뜻대로 안 되면 근본문제라는 걸 내세워서 속도조절을 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거나 우리를 압박하려고 하니까. 그런 걸 예상해서 참모들이 사전에 충분히 대통령한테 오리엔테이션 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원고 없이 그렇게 하는 건 쉽지 않은 겁니다.

그때 DJ가 76세였는데 그런 기억력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그냥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참모가 써 준 자료를 짧은 시간에 숙지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기본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통일 문제 같은 건 참모들이 써 준 걸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자다가 일어나서도 연방제건 미군철수건 뭐건 30~40분 일장 연설을 할 수 있는 기본 지식과 논리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분단국의 대통령으로서 정상회담을 하려면...평양의 상대방도 기본적으로 그 정도는 되니까.

돌아가신지 벌써 보름 가까이 되어 가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주 정세 보고를 하고...사실 나는 그때 듣는 '김대중의 정세토크'에다가 내 얘기를 섞어서 프레시안에서 '정세현의 정세토크'를 했는데...이제 돌아가셨으니까 이 정세토크의 내용이 좀 빈약해지지 않겠나 하는 걱정도 듭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손문상

#3. 2002년 2월, 대통령 전용열차 안

2002년 한미 정상회담 때의 인상적인 얘기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나는 2002년 1월 29일자로 통일부 장관에 임명됐는데, 바로 그 다음날 미국에서 쇼킹한 발언이 나옵니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지칭한 겁니다. 한 마디로, 가만 안 두겠다는 말이었죠.

그 소식을 들으면서...아무리 남북관계를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건 당위론적인 얘기지 현실적으로는 미북관계가 안 풀리면 남북관계는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미북관계의 종속변수로 삼는 건 꼭 일부러 그러는 건 아녜요. 미국이란 힘이 원심력으로 작용하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미국이 북한에 압박정책을 쓰면 남북관계가 잘 안 된다는 걸 북한도 압니다. 한미관계의 견고성 때문에라도 그래요. 남북관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악의 축' 발언이 나오니까, 앞으로 통일부 장관으로서 남북관계를 어떻게 끌고 나갈지 솔직히 막막했습니다. 역풍도 정말 대단히 큰 역풍이 장관 임명 다음 날 분 겁니다.

그리고 2월 20일 오전에 청와대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회담 후에 부시 대통령은 경의선 도라산역보다 북쪽에 있는 도라산 전망대에 가서 북한 지역을 한 번 바라보고, 도라산역으로 다시 와서 연설을 하기로 돼있었습니다.

우리는 서울역에서 대통령 전용열차를 타고 거기로 갔죠. 부시 대통령은 미국 대사관 차로 따로 가서 전망대 들러서 도라산역으로 왔어요. 그리고 부시가 거기 전시된 침목에다가 한 마디를 쓰고 사인을 쫙 하더라고요.

"May this railroad reunite the separated families of Korea" 내가 옆에서 봤어요. '이 철길이 남북의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 주소서'라는 뜻이잖아요. 그걸 보고 '아, 부시가 남북관계를 완전히 깨버리려고 하는 건 아니구나' 하는 희망을 1차적으로 가졌습니다.

그리고 도라산역에서 연설을 들었습니다. 최성홍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하고 쭉 앉아서 듣고 있는데 부시가 "We have no intention to invade North Korea"(우리는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라고 하더라고요.

부시는 attack이 아니라 invade라는 단어를 쓰더만. 부시의 어휘력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면, invade는 쳐들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에 굉장히 노골적인 표현입니다. attack은 약간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invade를 쓰는 걸 보고, 참, 부시 잉글리시가 따로 있다더니...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쨌든 그 소리를 듣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 이제 됐다. 악의 축이라면 invade나 attack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의도는 없다고 하니까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시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레이건 전 대통령도 악의 제국이라고 하는 소련과 대화했다'고 하던데 나도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 또 인도적 대북 지원은 계속 하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나오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나는 쾌재를 불렀어요. 최성홍 장관 손을 꽉 잡으면서 '됐어. 이제 됐어' 그랬다니까요.

불과 20일 전까지만 해도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했던 사람이 왜 저렇게 마음을 바꿨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면서도 어쨌든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열차에 탔습니다. 그렇게 돌아오는데 비서실 사람이 와서 대통령이 임동원 외교안보 특보, 통일부 장관,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같은 사람들을 오라고 한다더라고요. 그래서 대통령 칸으로 건너갔습니다.

우리가 가니까 대통령이 그러더라고요.

"여기 앉으시오. 통일부 장관도 거기 앉으시오. 정 장관, 내가 청와대에서 오늘 오전에 부시하고 확대정상회담도 안 하고 100분간 단독으로만 얘기하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설득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시가 도라산에서 저런 말을 하게 만들었소. 그러니까 이제 남북관계는 정 장관이 책임지고 푸시오."

본인은 숙제를 다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당신들이 할 일을 하라는 말씀이었죠.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부시를 설득했다는 말...그거 사실일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부시가 며칠 사이에 그렇게 생각을 바꿀 수가 없어요.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한 거였고, 그리고 그 설득이란 건 정성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자신의 입장이 진짜로 절박하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정성을 다하고, 그러면서도 논리적으로 체계가 갖춰진 말을 해야 상대가 설득되는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렇게 끝까지 책임감과 열의, 정성을 가지고 대통령을 했어요.

▲ 2002년 2월 20일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4. 2009년 8월, 신촌 세브란스 병원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또 다시 생각하게 된 건 바로 장남 김홍일 전 의원 때문입니다. 대통령 서거 후의 얘깁니다. 과거에는 김홍일 전 의원하고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어요. 2003년 목포에서 KTX 관련 행사가 있어서 당시 고건 총리를 모시고 내려갔다가 목포가 지역구인 김 의원을 만나 악수했던 것. 그런 공식 석상 외에는 따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 후에 몸이 불편하고 파킨슨씨병으로 고생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까 어느 정도인지 알 리가 없죠. 그래서 이번에 빈소에서 처음 본 건데...난 처음에 누군지 몰랐어요. 대통령 형제분 중에 막내 동생이 몸이 안 좋은가?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죠. 그 정도로 나이가 들어 보였어요. 실제로는 나보다 세 살 아랜가 그럴 겁니다.

그런데도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이 들어 보이고 거동이 불편한 김 전 의원을 빈소, 영결식장, 안장식장, 삼우제에서 쭉 가까이 보면서...아...자기 자식을 저렇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군부 시절에 고문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요.

자기 다리는 박정희 정부 시절에 그렇게 됐는데, 자기를 그렇게 만든 사람도 용서하고, 자기 자식을 그렇게 만든 사람까지 용서한다는 거...그거 쉽지 않아요.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못 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기가 당한 건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식이 당한 건 못 참는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되고 동네 싸움 된다는 속담도 생겼을 것 같아요.

김홍일 전 의원을 보면서 정말 이 김대중이란 사람은 그냥 단순한 정치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얘기만 들으면 실감이 안 날지 몰라요. 김 전 의원을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식을 그렇게 만든 정권의 대표자를 자기가 대통령을 할 때 사면했어요.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만, 기독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인가요? 우리 정치권에서, 우리의 지도자들 중에서 그런 정도로 화해와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분이 몇이나 될까요.

용서라는 건 의식수준이 굉장히 높아야 할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상호주의 차원에서, 상대가 이렇게 했으니까 나도 이렇게 한다, 원수를 갚는 것, 복수, 이런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데...그걸 뛰어 넘어서 내가 먼저 용서한다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 끝으로 현안 관련 질문 한 가지.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에 북한의 특사 조의방문단이 내려 왔었는데, 청와대 예방이 늦어진 건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조문단이 김대중평화센터 채널을 통해 왔다고 해서 정부 일각에서는 사설조문단이니 통민봉관(通民封官)이니 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이미 특사 조의방문단이라는 표현에서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 표시가 있었던 겁니다. 특사라는 게 김정일 위원장이 보냈으니까 특사고, 국장이니까 상주인 대통령이 당연히 만나야 하는 거니까 특사죠. 조문만 하는 게 아니라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얘기하겠다는 암시가 있었던 거였어요.

당국간 채널이 끊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연락이 되는 김대중평화센터라는 민간단체를 징검다리로 해서 만나는 게 뭐가 나쁩니까? 남북교류협력법상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교류협력법에는 북한 주민과 접촉하거나 교신하려면 10일 전에 승인을 받으라고 나오지만, 불가피한 경우는 일이 있고 나서 1주일 이내에 사후적으로 신고하면 된다고 되어 있어요.

우리는 그동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도리상 부고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죠. 김대중평화센터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하고 학술회의도 같이 했었고, 2006년엔 DJ 방북 문제 때문에 내가 김대중평화센터를 대표해서 아태 리종혁 부위원장하고 회담도 두 번이나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인편에 매번 DJ의 안부를 물어왔었기 때문에, 팩스 한 장 보내서 돌아가신 사실을 알리려고 한 겁니다. 물론 뉴스 듣고 알게 되겠지만. 그래서 보냈더니 답이 24시간 안에 왔고, 그걸 정부에 바로 알렸습니다. 답이 안 왔더라도 물론 우리가 부고를 보낸 사실을 7일 안에 신고하려고 했어요. 교류협력법을 아는 사람들이니까.

조문단을 만나 보니까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들한테 그런 생각이 있으면 얘기를 분명히 하라고 했죠. 호텔에 통일부 차관이 와 있으니까 직접 하라고. 다음날 22일 아침에 다시 조문단한테 물어 봤더니 말을 했대요.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특사로 왔기 때문에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는 식으로 했대요.

그래서 내가 '아이고, 그렇게 하면 어떡합니까?' 그랬더니 '아니 뭐, 손님으로 와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만나겠다고 하는 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또 굉장히 겸손을 떨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따가 10시에 통일부 장관 만나면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구체적으로 얘기해라.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보니까 사설조문단이니 통민봉관이니 남남갈등 조장전술이니 하는 여론이 나오니까 그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나 하는 느낌도 있었어요. 실제로 어떨 말이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22일 점심때까지는 호텔이 있어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 정부에서 사인을 분명히 안 준다는 거예요.

어떤 신문을 보니까 "이 시간에 그들이 특급 호텔에서 최고급 요리를 먹으면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까지 썼던데, 그 사람들 아무것도 못했어요. 안전 문제 때문에 나갈 수도 없고 접근불가니까 누굴 만날 수도 없고...호텔방에 갇혀 있었어요.

음식은 호텔에서 먹는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호텔에 가둬놓고 3000원 짜리 배달 시켜주라는 겁니까? 스위스그랜드호텔은 5성호텔이지만 아주 최고급 호텔은 아녜요. 어쨌든 의사표시는 했는데 정부가 전혀 사인도 안 주고 있었기 때문에 호텔방에서 이제나 저제나 동백아가씨처럼 기다렸어요.

듣자하니까 김덕룡 대통령 국민통합 특보(민화협 대표 상임의장)가 22일 조찬에 참석해서 정부 공식 라인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채널을 통해서 청와대에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못 들었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 얘기까지 내가 들었어요.

이건 뭔가 상황 보고 체계에 문제가 있지 않나...대통령한테 전달됐다고 추정되는 시간에도 여전히 대통령은 '나는 아직 못 들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는 겁니다. 대통령과 관련된 사항은 즉각 보고가 들어가야 합니다. 만나고 안 만나고는 별개의 문제지만, 북한에서건 어디서건 외교적으로 의미 있는 사람이 왔는데 제대로 보고가 되지 않아서 결단을 늦춘다는 건 문제가 있어요.

몰라요. 당국자들은 이 얘기를 듣고 '곡조도 모르면서 말하네. 우리도 체면을 세워야 하니까 북쪽 사람들을 좀 기다리게 만들려고 그런 거지'라고 할지 모르죠. 현정은 현대 회장은 평양에 가서 5일씩이나 기다려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는데 우리는 바로 만나주어야 하느냐는 얘기도 있었다고 해요.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손문상
그런데 상황이 다릅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 현지지도를 나갔기 때문에 그런 거였고, 조문단을 하루 더 있게 하고 만나면서 패러다임 시프트니 뭐니 하면서 억지 춘향 합리화까지 할 게 있었나...참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패러다임 시프트라는 게 남북관계를 특수 관계가 아니라 일반적인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바꾸는 거라고 하던데...그래 봐야 역시 특수 관계예요. 국제적으로 대체 누가 남북한을 국가 대 국가라고 봐줍니까.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북한대학원 석좌교수)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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