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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 "부시가 나를 구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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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 "부시가 나를 구원했다"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7> 반전 영화감독이 겪은 미국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중 하나가 마이클 무어다. 미국의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인 무어는 <볼링 포 콜럼바인>, <화씨 9/11>, <식코> 등으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영화인이다. 특히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9.11 테러 관련 의혹을 다룬 <화씨 9/11>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2004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치부를 예리하게 들춰내는 마이클 무어의 작품에 대한 지지와 비난은 극단으로 갈린다.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클린튼 이스트우드 감독마저도 무어 앞에서 "그가 카메라를 들고 내 집으로 찾아온다면 총으로 쏴 버릴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마이클 무어에 대한 비난은 부시 미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이후 극에 달했다. 무어는 2003년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아카데미상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에 선정된 자리에서 당시 이라크 전쟁에 나선 부시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비난해 찬물을 끼얹었다. 테러의 충격 속에 대다수가 전쟁을 지지했던 미국인들은 곧 그에게 광기에 가까운 비난을 쏟아냈다. 반대로 그를 '미국의 양심'으로 추앙하는 여론도 강력했다.

<가디언>은 오는 13일 발간되는 무어의 새 책 <히어 컴스 트러블(Here Comes Trouble)>의 일부 내용을 입수해 7일 공개했다. 무어는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미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남자가 됐고,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공격했는지, 그리고 그 비난에 못이겨 은둔하게 된 사정과 어떻게 다시 일어서게 됐는지를 밝혔다. 공교롭게도 마이클 무어가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는 부시 전 대통령이었다. <가디언>이 공개한 책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편집자>
(☞원문 보기)'

●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 시리즈

<1> 스티글리츠 "대테러전쟁, 일상화된 테러 위협과 빚만 남겼다
<2> 로버트 피스크 "알카에다가 미국을 반대하는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
<3> 촘스키 "파키스탄 핵무기가 위험해져"
<4> 라이오넬 바버 "테러와의 전쟁이 '중국의 시대' 열었다"
<5> 조지프 나이 "미국, 벌에 쏘였는데 장검 빼들어"
<6> 타리크 알리 "미국은 저질국가가 됐다"
▲ 팬들과 만나고 있는 마이클 무어 감독(완쪽) ⓒ뉴시스

난 미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남자였다.

"전 마이클 무어를 죽이는 걸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죽일지, 아니면 누군가를 고용해야 하는지…아니죠, 제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겁니다. 그리고 전 그의 목을 졸라 죽일 것입니다.

전 이제 선악을 구분하는 감각도 잃어버렸습니다. 전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래, 난 마이클 무어를 죽일 거야.' 그리고 이어서 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글을 봤죠. 그리고 전 깨닫습니다. '오, 넌 마이클 무어를 죽이지 못할 거야. 아니면 적어도 넌 그의 목을 졸라 죽이지 못할 거야'. 아시겠지만, 음, 잘 모르겠네요."(2005년 5월 17일 극우 방송인 글렌 벡이 라디오 쇼에서 한 말)

내(마이클 무어)가 빨리 죽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은 어디에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바람은 2004년 7월의 어느 화창한 아침 <CNN>의 아나운서 빌 헤머의 마음속에도 있었다. 그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내 면전에 마이크를 들이대고 "사람들은 마이클 무어가 죽길 바란다는 말을 한다"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헤머는 사람들이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듯이 말했다. 그는 해가 동쪽에서 뜨고 옥수수가 옥수숫대에서 열리는 것처럼 시청자들이 이미 그 말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 영화가 많은 이들을 미칠 듯이 화나게 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난 아직도 살아있는가? 1년이 넘도록 위협과 협박, 괴롭힘을 당했고 심지어 백주 대낮에 폭행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던 첫해였다. 당시 정부와 함께 일하던 최고의 안보 전문가는 내게 "당신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부시 대통령 말고는 없다"라고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나? 내가 자초한 것인가? 물론 그렇다. 그리고 난 그 시작을 기억한다.

2003년 3월 23일 밤이었다. 그로부터 4일 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불법이었고, 부도덕했으며 멍청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국민의 70%가 전쟁을 지지했다. 이 전쟁이 벌어진지 4일 후 내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이 아카데미상 후보로 올랐다. 난 시상식에 참석했지만 레드 카펫을 걷는 동안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전쟁을 비판하는] 무엇인가를 말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전시에는 모두가 전쟁을 뒤에서 지원하고 합심해야 하니까.

영화배우 다이앤 레인이 무대로 올라가 최우수 다큐멘터리 후보작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봉투가 개봉됐고 그는 고소함을 감추지 못하며 내가 상을 타게 됐다고 발표했다. 객석을 채운 배우와 감독, 작가들은 벌떡 일어나 내게 오랫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 나는 경쟁작을 만든 다른 후보들에게도 무대로 올라올 것을 요청했고, 그들은 응했다. 박수가 잦아들고 난 수상 소감을 말했다.

"저와 경쟁했던 이들을 무대로 초청했습니다. 저의들은 논픽션[실화]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은 저와 연대해 이곳에 섰습니다. 우리는 논픽션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린 지금 소설같은 시대에 삽니다. 거짓된 선거가 가짜 대통령을 선출한 시대에 삽니다. 우리는 가짜 이유를 대며 우리를 전쟁에 내보내는 남자[대통령]가 있는 시대에 삽니다. 이 소설이 무엇에 대한 소설이든 우리는 이 전쟁을 반대합니다. 부시, 부끄러운 줄 아시오. 부끄러운 줄 알라고! 당신의 시대는 끝났어! 감사합니다."



소감을 절반 정도 밝힐 즈음 모두가 큰 혼란에 빠졌다. 무대 뒤와 일반 객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마틴 스콜세지 감독이나 여배우 메릴 스트립 등 소수만이 날 격려했지만 야유에 묻혔다) 시상식 제작자는 날 끌어내기 위해 오케스트라에게 음악을 연주하라고 지시했다. 마이크가 바닥으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스크린에 붉은 색 글자가 내 앞에서 번쩍였다. "수상 소감 발표 시간 종료"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그것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난 급히 무대 밖으로 내보내졌다.

몇 명만 아는 사실이 있다. 아카데미상 수상자가 [소감을 마치고] 무대 뒤로 내려오면 커튼 바로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매력적인 젊은이들로부터 두 가지 말을 듣게 된다. 한 젊은 여성은 "샴페인 드릴까요?"라고 물으며 샴페인 한 잔을 건넨다. 옆에 있는 남성은 이어서 "구취제 드릴까요?"라고 물으며 구취제를 건낸다. 모든 수상자들이 처음에 이 두 마디를 듣지만 난 운 좋게도 다른 말을 들었다. 화가 난 무대 담당자가 바짝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있는 힘껏 "얼간이!"라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쏟아지는 비난들

그날 밤 난 잠을 이루지 못해 텔레비전을 켰다. 1시간 동안 지역방송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장면을 보여줬다. 채널 사이를 오가고 있을 때 한 전문가가 나의 분별력에 의문을 던지며 내 수상 소감을 비판하다가 "그가 제정신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런 멍청한 행동을 하고나서 마이클 무어는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누가 그와 다른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겠는가?" "경력을 스스로 끝장냈다." 이런 비난이 1시간 동안 이어진 후 난 텔레비전을 끄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미국 전역에서 비슷한 종류의 비난이 더 쏟아지고 있었다. 난 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난 컴퓨터와 조명을 끈 뒤 어둠 속에 앉아 계속해서 내가 한 일을 생각했다. 잘했어 마이클. 속 시원해.

내가 미시건주 북부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지역 미화(美化) 위원회가 트럭 세 대 분량의 거름을 집 앞 도로에 허리까지 잠길 정도로 쏟아 부어놔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집은 "꺼져! 쿠바로 가버려! 빨갱이! 배신자!" 등의 낙서로 장식됐다. 수상 소감에 항의하는 편지와 전화가 쏟아졌다. 가장 최악의 순간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올 때였다. 지역 보안관은 우리에게 사설 경호원을 고용하라고 제안했다. 위협과 살해 협박은 끊이지 않았고, 난 그해 말 전직 미 해군 특수부대원 9명을 고용해 24시간 지키게 했다.

<화씨 9/11>로 반격하다

'오스카[아카데미상] 폭동' 으로 기피 인물로 낙인찍힌 뒤 난 미국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남자가 됐다. 나는 나 같은 위치에 있는 누구라도 했을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미합중국 대통령은 전범임을 밝히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왜 쉬운 길을 가지 않았냐고? 어쨌든 이미 끝난 일이다. 내게 다음 영화의 제작비를 대겠다고 약속했던 제작사는 오스카 사건 이후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알려왔다. 다행히 다른 제작사에서 제안이 왔다. 하지만 그 제작사는 내게 관객들이 화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 제작사의 소유주는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다. 난 그에게 난 이미 관객들을 열 받게 했다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최고의 영화를 함께 만들지 않겠냐고 했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 <화씨 9/11>을 찍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스텝들에게 우리가 영화계에서 한 마지막 작업을 하는 것처럼 일하라고 했다. 감동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11개월 동안 미쳐가고 있는 미국과 미국 정부에 대한 고발 영화를 만들었다.

2004년 영화가 개봉됐을 때 전쟁은 시작된지 1년을 조금 넘었고, 미국인 대다수는 여전히 전쟁을 지지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고 우리는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지난 50년 동안 칸에서 다큐멘터리가 이 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화씨 9/11>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으로 백악관은 겁을 먹었다. 부시의 재선 캠페인을 맡은 이들은 이 영화가 선거에서 패배할 '티핑 포인트[아이디어나 경향이 한꺼번에 번지는 극적인 순간]'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이 영화가 유권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여론조사를 벌였다. 떨어져 있는 도시 세 곳에서 영화가 상영됐고, [부시의 선거 참모] 칼 로브가 접한 뉴스는 좋지 않았다. 이 영화는 민주당 지지자 뿐 아니라 공화당을 지지하던 여성 유권자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영화 제작사측은 이미 자체 조사를 통해 공화당 지지자 3분의 1이 이 영화를 본 후 다른 이들에게 영화를 추천했다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백악관의 여론조사에는 더 위험한 징후가 보였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여성 유권자의 10%가 영화를 본 후 [민주당 대선후보] 존 케리에게 투표하거나 그냥 투표하지 않고 집에 있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몇 표 차이가 당락을 가르는 선거에서 이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 북부지역에서 개봉 첫 주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백악관에겐 안 된 일이지만 미국 모든 주에서 개봉 첫 주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영화를 보러 갔고 이라크에 파병된 군인들이 보는 불법 복제 영화 순위에서도 1위였다. <스타워즈 6>의 개봉 첫 주 흥행기록도 깨트렸다.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난 타깃이 됐다. 소설같은, 미친, 꾸며낸 작품이라는 공격이 뒤따랐지만 나는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 비난이 중요하게 비춰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 칼럼과 인터넷 등 모든 곳에서 마이클 무어는 미국을 싫어하고, 거짓말쟁이이며 음모론자라는 비난이 제기됐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을 막으려는 반대 캠페인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건 먹혀들었다. 물론 민주당의 존 케리가 형편없는 후보였다는 점도 있다. 부시는 [2004년 대선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오하이오주에서 이김으로써 재선에 성공했다.

공화당 쪽 전문가들이 내게 쏟아낸 비난은 상처를 남겼다. 그런 비난은 이미 이성을 잃은 이들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증오하는 말을 휘갈긴 쪽지를 보내다가 이제 전면적인 물리적 공격을 가했고 상황은 더 나빠졌다.


보디가드와 함께 생활

[경호원으로 고용한] 전직 특수부대원들은 우리와 함께 살았다. 내가 거리를 걸으면 그들은 내 주위를 빙 둘러싸야만 했다. 밤이 되면 그들은 야간 투시경 같은 특수 장비를 착용했다.

나를 보호하는 경호회사는 내게 위협을 가할만한 이들을 조사했다. 난 파일을 보여 달라고 했다. 담당관은 내게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가하려던 위협의 강도에 대해 읽어내려 갔다. 그가 수십 명을 열거한 후 멈춘 뒤 내게 물었다. "정말 계속 할까요? 429개가 더 있습니다."

공공장소에 나갔을 때 사고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처음엔 사람들이 레스토랑에서 내게 다른 자리로 옮겨달라고 요청하거나 택시 기사가 도로 한가운데서 차를 멈추고 내게 소리를 지르는 정도였다. [하지만] 언어폭력은 곧 물리적[폭력]으로 바뀌었고 경호원들은 고도의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이에 대해선 보안상의 이유로 자세히 말할 수 없다. 경호기관의 충고도 있지만, 그들의 흥미를 끌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격의 예를 들면] 내쉬빌에서 칼을 소지한 한 남성이 무대에 올라가 내게 다가왔다. 경호원들이 그를 붙잡고 무대 앞 시멘트 바닥에 내던졌다. 그를 내쫓은 후 누군가 바닥의 피를 치웠다.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에서는 잘 차려입은 한 남성이 거리에서 날 보더니 미쳐버렸다. 그는 들고 있던 뜨거운 커피를 내 얼굴에 뿌리려 했다. 경호원들이 이 남자를 제지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때리려 했다. 그의 안면은 커피로 화상을 입었고 우린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다.

<화씨 9/11>이 상영되고 있는 뉴욕의 한 극장 밖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걸어가던 한 남자가 날 보더니 흥분해서 주머니에서 날카롭게 깎인 연필을 꺼냈다. 날 찌르려고 달려들었을 때 경호원 한 명이 나와 그 사이를 손으로 막았고 연필은 경호원의 손을 관통했다.

그리고 리 제임스 헤들리가 있다. 그는 오하이오에 있는 자기 집에 홀로 앉아서 거대한 계획을 짰다. 그의 일기를 보면 세계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망가지고 있었다. 그가 적은 말들은 [극우 방송인] 러시 림보의 라디오 쇼에서 다루는 주제 같았다. 그리고 헤들리는 명단을 만들었다. '보내버려야 할' 사람들이 적힌 짧은 명단이었다. 명단의 맨 꼭대기에는 그의 최우선 타깃이 올라가 있었다. 마이클 무어. 내 이름 뒤에 그는 '표적'이라고 적었다.(나중에 그가 설명하길 '죽음의 표적'이라고 했다)

2004년 봄 내내 헤들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를 모았다. 수천 개의 탄약과 다양한 폭탄 재료들. 그는 무기 제작법이 쓰여 있는 책을 샀다. 그의 노트에는 로켓 발사기와 폭탄의 도해가 그려져 있었고 그는 계속해서 "싸워, 싸워, 싸워, 죽여, 죽여, 죽여!"라고 적었다.

그러나 2004년 어느 날 밤 그는 실수로 가지고 있던 AK-47 소총 중 하나를 집 안에서 발사했고 총소리를 들은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도착해 집 안에서 무기와 탄약, 폭탄 재료를 찾아냈다. 그가 적어놓은 명단도.

며칠 뒤 난 경비업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경찰이 당신의 집을 날려버리려고 계획했던 남자를 구금하고 있습니다. 이제 안전합니다."

숨을 죽였다. 내가 들었던 것을 이해하려고 해봤다. 내게 이건 최후의 결정타였다. 난 무너져 내렸다. 내 아내는 이미 우리가 함께 했던 삶을 잃어버린데 절망하고 있었다. 나는 자문했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했나? 영화를 만든 것? 누군가가 내 집을 날려버리고 싶게 만든 영화?

몇 달이 흐르고 부시가 재선에 성공한 후에도 나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은 더 격렬해졌다. 글렌 벡이 라디오에서 날 죽이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방송 규제당국에 의해 벌금을 물거나 뉴욕 경찰에 체포되지도 않았다. 그는 결국 나를 죽이겠다는 전화를 했고, 당시 언론은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외출했을 때 누군가 집에 무단 침입해 침실 창문 바깥에 무엇인가를 놓고 갔다. 내 아내를 소름끼치게 했다. 그는 심지어 이런 일을 저지른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로 찍기도 했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 다큐를 '마이클 무어 쏘기'라고 불렀다.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화면에 이 단어가 뜨고 총소리가 들린다. 미디어가 이를 보도했고, 그는 <폭스뉴스>를 비롯한 많은 프로그램에 초대받았다. 그는 그가 어떻게 내 집에 불법으로 침입했는지를 설명하는 비디오와 지도를 제공했다.

이 사건이 내 사생활에 가져다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내 작품이 실제로 가치가 있는지 자문해봤다. 내가 또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아카데미 수상 소감을 철회하고, 무대를 내려가 내 에이전트와 턱시도를 입은 이들에게 감사를 보낸 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떠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까? 그게 내 가족이 안전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내가 상시적인 위험 속에서 살지 않는 길이라면 말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답을 알고 있다.

"부시가 나를 구했다"

이후 2년 반 동안 난 집을 자주 비우지 않았다. 2005년 1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난 텔레비전에 출현하지 않았다. 대학 초청강연도 중단했다. 도시에서 멀어졌다. 이전에 50개가 넘는 대학에서 강연했지만 그 2년 동안 단 1곳에서만 했다. 집 근처에만 머물렀고 내가 살고 있는 미시건주의 몇몇 지역 사업에서 일했다.

이런 나를 구한 것은 부시 대통령이었다. 부시가 한 말에 난 기운을 차렸다. 이전에도 그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 그 말을 들었을 땐 부시가 나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우리가 테러리스트에게 굴복한다면, 테러리스트가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맞았다. 그의 테러리스트가 이기고 있었다. 나를 상대로! 내가 집 안에 앉아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난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고 일에 복귀했다. 이후 3년간 3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돕는데 몸을 던졌다. 그리고 미시건주의 두 공화당 의원을 실업자로 만들었다. 인기 좋은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내게 야유를 보냈던 아카데미 위원회의 이사회 멤버로 뽑혔다.

나는 굴복하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사실은 굉장히 굴복하고 싶었다. 대신에 건강해졌다. 당신이 내게 펀치를 먹인다면, 난 당신에게 세 가지 일이 벌어질 것을 보장한다. 첫 번째, 당신은 손이 부러질 것이다. 둘째, 난 당신 위로 넘어져 당신을 깔아뭉갤 것이다. 셋째, 내 경호원들이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집에서 직접 만든 고추 성분 스프레이를 당신의 눈에 직접 뿌릴 것이다. 평화주의자로서, 미리 하는 나의 사과를 받아드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결코, 나나 다른 이들에게 다시는 폭력을 쓰지 말라.

얼마 뒤 난 [제이 레노가 진행하는 미국 <NBC> 방송] <투나잇 쇼>에 출연했다. 내가 무대를 밖에 있을 때 붐 마이크를 잡고 있던 한 사내가 다가왔다. "아마 절 기억 못할 거예요"라고 그가 주뼛주뼛 말을 걸었다. "전 결코 당신을 다시 보거나 말을 걸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러고 있는 것도 믿기지 않네요"

이러고 있는 게 뭔데? 난 생각해봤다. 나는 이 남자의 '곧 부러질 손'을 떠올리며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그는 "제가 당신에게 사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 당신의 오스카상을 망친 사람입니다. 전 당신이 무대를 내려오자마자 당신의 귀에 대고 '얼간이'라고 외쳤어요. 전 당신이 부시 대통령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맞았어요. 그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건을 마음속에 담고 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난 한껏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사과를 받아드릴게요. 그러나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대통령을 믿었어요! 당신은 대통령을 지지해야만 했어요! 우리가 어떤 대통령이든 재직 중에 최소한의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다면, 젠장, 우린 운이 다한 거죠."

그가 안도하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는 말했다. "이해? 이건 이해해 관한 게 아니에요. 난 이 웃긴 이야기를 몇 년간 들려줬어요. 오스카 수상자가 됐을 때 듣는 첫 두 마디에 대해서요. 그리고 난 어떻게 제3의 말을 들었는지도요. 이봐요, 이 이야기를 내게서 빼앗아 가지 말아요. 사람들이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가 웃었고, 나도 웃었다.

"네." 그가 말했다. "그만큼 재밌는 이야기는 별로 없네요."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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