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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무원' 카르자이, 골치 썩는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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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무원' 카르자이, 골치 썩는 오바마

[이웅현 '비극의 아프가니스탄'] 워싱턴-카불, '불안한 기생' 10년

데뷔

2001년 9월까지만 해도 43세의 이 장년(壯年)의 사나이가 미래의 아프가니스탄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통성으로 따지자면 1973년 축출된 두라니 왕조의 마지막 국왕 자히르 샤가 당연히 물망에 올랐겠지만, 85세의 노(老)국왕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보였고, 왕정복고도 시대착오라고 생각되었다.

'대소련 항전'의 시기에 살아있는 전설이었고, 서구에 '미스터 포토제닉'으로 잘 알려진 북부동맹의 리더 타지크인 마수드는 이미 알카에다에 의해 살해되었고, 파슈툰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압둘 하크도 탈레반에 의해 체포, 처형되었다. 10월 이전 미국과 영국은 43세의 이 사나이 즉 하미드 카르자이를 '경량급'이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2001년 10월 아프가니스탄에 발을 들여놓은 미국에게는 탈레반의 대항마로 남아있는 아프간지도자가 별로 없었다.

인도에서 유학한 지식인이고 영어와 불어를 포함한 6개의 언어를 구사하며, 두라니 파슈툰계 명문가의 후예 카르자이에게 부족한 것은 지성적 능력이나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투쟁경력'이었다.

사실 카르자이는 페샤와르에 농성하고 있던 반군단체 가운데 아프가니스탄 내 이슬람 명문 무자디디 가문의 시브가툴라 무자디디가 이끄는 '조국해방전선'에 가담했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내전기 초대 무자디디 대통령 하에서 외무차관을 지낸 경험도 있었다. 게다가 1999년 탈레반에 의해 부친이 암살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반탈레반 전선에 합류했으니, 투쟁경력이 전무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 당시의 상황에서 카르자이는 두각을 나타낸 거물은 아니었다.

따라서 2001년 12월 본(Bonn) 회의가 그를 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선출했을 때, 그를 추종하던 남부의 파슈툰족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의 반(反)탈레반 투쟁이 고려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카르자이를 아프가니스탄의 제1인자로 끌어올린 것은, 파슈툰족 내에서의 그의 카리스마나 투쟁경력이 아니라 타지크인과 우즈베크인, 하자라인 등으로 구성된 '북부동맹'의 정치적 계산, 카르자이의 '아메리칸 커넥션' 그리고 미국의 힘이었던 것이다.
▲ 하미드 카르지아이와 조지 W. 부시 Jr.

어떻게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건, 그는 초기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아프가니스탄 건설을 위한 지원을 호소했고, 불과 1개월 동안 45억 달러라는 지원 약속을 받아내었다. 여기에는 만년의 숀 코네리를 연상케 하는 핸섬한 외모에 뛰어난 패션 감각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당시 구치(Gucci)의 탐 포드는 그를 "지구상 최고의 멋쟁이 정치인"이라 불렀다. 사실 외교가의 총아로 부상한 그에게서 전쟁과 내전으로 폐허가 된 약소국 과도정부 지도자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험로

그러나 스마트한 정치인의 국내정치 행로는 결코 스마트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과도정부 수반 시절 카르자이는 탈레반 축출 작전 과정의 대미협력 일등공신인 북부동맹 세력에 포위되어 있었다.

내전 시기 자신을 체포, 투옥하기도 했던 모함메드 파힘과 모함메드 아리프를 비롯한 북부동맹의 정적들을 국방장관과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앉히는 정치적인 양보를 해야 할 정도로 고립되어 있었다. 북부동맹 세력은 물론 사방의 군벌과 지역 유력자들을 모두 포섭하는 정부도 구성해야 했다. 그럼에도 2002년과 2003년 사이에 북부동맹이 주도한 세 차례의 쿠데타 기도에 직면하기도 했다.

2005년 10월 첫 대선 이후 대통령으로서도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했다. 통치권이 카불 지역 이외에는 미치지 못함으로써 '카불대통령'이라는 반대자들의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점차 국방상과 내무상 그리고 각 요직에 북부동맹을 축출하고 파슈툰족 측근을 기용하기는 했지만, 북부동맹의 유력자들과 지방의 군벌들은 의회(하원)를 근거지로 삼아 반카르자이 전선의 예봉을 꺾지 않았다. 친카르자이적이라 할 수 있는 옛 보스 무자디디가 상원 의장으로 있었지만, 카르자이의 정치적 입지 확보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서는 물론, 대통령이 된 이상 파슈툰족의 이해관계도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 주요 부처 장관직을 파슈툰족으로 교체했고, 자신의 출신지인 칸다하르에는 이복동생 아흐메드 왈리 카르자이가 주의회 의장으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방조했다.

이러한 정치적 입지강화 움직임은 결국 지방 군벌들의 발호를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리고 적극적으로 부패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야기했고, 카르자이의 카불정권은 족벌정치와 부패정부의 온상이라는 인상을 강화시켰다. 특히 카르자이의 동생 왈리는 아편 밀매를 통해 거대한 부를 구축한 '마약거물'이자 각종 부정부패에 연루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2005년 파키스탄을 방문한 카르자이가 국경을 넘어 침투하는 탈레반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파키스탄 정권의 무능력을 비난했을 때, 파키스탄 대통령 무샤라프는 카르자이에게 '집안 단속'부터 먼저 하면서 모범을 보이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원금이 각 지방에 도달하기도 전에 줄줄이 새어나간다는 국제사회의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카르자이의 입장에서는 카불정부를 통하지 않는 지원금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항변을 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카르자이 정권의 전국적인 통제력이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20세기 초 압두르 라흐만 이후 마지막 공산정권의 철권 통치자 나지불라 집권 시기까지, 전통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중앙정권은 외세(영국,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의존하면서 다양한 국내 지역과 정파 그리고 종족에 자원을 분배하는 식으로 정통성을 확보, 유지해 왔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는 이러한 아프가니스탄 정치, 사회의 전통적 특성에 관한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각종 지원을 하고 있던 국가나 NGO들 역시 효율적이고 깨끗한 예산집행을 하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2002년 이후 8년 동안 이루어진 260억 달러를 상회하는 미국의 지원 역시 대체로 아프가니스탄 군의 건설과 개혁에 필요한 비용으로 쓰였고, 순수한 경제개발을 위해 쓰인 것은 총액의 30%를 넘지 않았다.

이나마 다른 국제사회의 지원금과 마찬가지로 카불정부를 통한 재분배 형식을 띠지 않고, 공여국이 통제하는 정부예산외 방식을 통해 집행되었다. 결국 카르자이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집권 이후부터 2009년 여름 지연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카불 정부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또 강력한 중앙정권을 구축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다.

냉대

2009년 여름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 선거와 미국의 정책 및 작전변화는 아프가니스탄의 미래에 관한 한 중대한 분수령이자 카르자이에게는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 되었다.

7월 신임 ISAF(국제안보지원군) 및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스탠리 매크리스털이 대비정규전의 작전변화를 도모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3만 명의 미군 증파를 본국에 요청한 가운데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카르자이는 강력한 경쟁자인 북부동맹 출신 압둘라 압둘라 전 외상을 상대로 '상처뿐인 승리'를 거두었다.

▲ 조지프 바이든
압둘라가 결선투표를 보이콧하면서 최종 승자가 되기는 했지만, 카르자이가 거둔 승리란 것은 패배만도 못한 처참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선거 부정'을 지적하며 카르자이를 압박했고, 미국은 부통령 바이든과 그렇지 않아도 터프한 것으로 유명한 국무뷰 특사 홀부르크의 입을 빌어 카르자이를 냉대했다.

선거부정 혐의도 혐의려니와, 고질적인 부정부패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정부가 아니면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 압력이었다.

국내적으로 고립무원의 상태인 카르자이에게 국제적인 따돌림은 정치생명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11월에는 카불주재 미국대사 아이켄베리조차 카르자이가 과연 적절한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는지 의문시하는 보고서를 미 국무부에 타전하고 있었다.

게다가 12월에 접어들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3만 명의 증파를 승인하면서 2011년 7월부터 철군을 개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정치적 보장도 없는 일방적 선언이었다.

2010년 3월에 '상자 속의 정부'를 하나씩 구성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정상화를 도모하겠다는 매크리스털의 구상이 헬만드주 마르자의 탈레반 축출작전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지만, 카르자이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안전감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슈타라크 작전이 전개되는 동안 파키스탄은 카르자이가 그동안 대 탈레반 협상창구로 활용했던 '탈레반 2인자'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이전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안정을 위해서 카르자이가 경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책이 있었다면 그것은 카불과 지방의 전, 현직 군벌들은 물론 탈레반, 헤크마티야르 그룹 등 반군단체들과 협상을 하는 일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국제사회도 인지하고 있었다. 결국 바라다르의 체포는 카르자이의 대 탈레반 협상방침에 끼얹어진 '찬물'인 셈이었다. (최근에는 카르자이의 대 헤크마티야르 그룹 협상도 결렬되었다.)

뿐만 아니라 2010년 3월 말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을 (외교상 결례라 아니할 수 없는) '깜짝 방문'했을 때에도, 카르자이는 오바마로부터 부패 척결, 마약거래 근절, 정실인사의 금지 등등에 관한 '설교'를 들어야 했다. 2009년 이후의 미국대통령은, 화상을 통해서라도 카르자이와 빈번한 스킨십을 주고받던 부시가 아니었던 것이다.

불안

"탈레반에 가세할 수도 있다"는 카르자이의 불만의 근저에는 이와 같은 상황을 감수해야 하는 그의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카르자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잉태하도록 한 것은 미국의 초조감이었다. 2008년 이후, 20년이 걸릴지 30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 재건에 대한 미국 내 회의론이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고, 증파결정 이후에는 카불 현지의 미국대사와 주둔군 사령관도 아프가니스탄 문제 해결의 장, 단기적 접근에 관한 의견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 칼 아이켄베리와 스탠리 매크리스털
1년 남짓한 시간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의 군사적 안정을 확보해야 하는 매크리스털의 입장과,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이었지만 지금은 대사로 직함이 바뀌어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미래를 비관하기 시작한 아이켄베리의 입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ISAF와 미군도 작전의 미래에 관해서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양귀비재배 근절과 이로부터 자금을 충당하는 탈레반의 소탕'을 핵심으로 하는 헬만드 작전은 가을에 칸다하르로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칸다하르의 또 다른 '카르자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정리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상자 속의 정부'에 채워 넣을 인물의 빈곤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고, 이미 완수되었다고 하는 헬만드의 작전이 과연 성공한 것인지에 관한 최종적인 판단도 내려지지 않고 있다. 하물며 이러한 의견의 분열이 어찌 카불의 미국인들 사이에만 있을 것인가? (적어도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한 한) 서로 다른 보고와 제안을 접수하는 워싱턴의 의견 분열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책결정의 과정 속에 정보의 혼선과 다양한 대안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대책을 수립할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상실되었다. 철군 시점을 명확히 한 상태에서 현지의 군사작전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의 지원을 위한 병력증파도 결정되어 있다. 군사적 해결책과 정치적 해결책, 그 어느 하나를 택하기 위해서 원점에서 재고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두 가지를 동시에 병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군이 철수한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의 장래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장래에 대한 장기적인 우려가 카르자이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면, 철군 시점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군사적인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단기적인 우려가 워싱턴의 불안감을 부채질 하고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불안감이 교차하면서 상승작
▲ 리처드 홀부르크
용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2010년 5월 셋째 주 카르자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카불에서부터 그를 에스코트한 것은 카르자이를 신뢰할 수 없다던 아이켄베리였다. 그리고 앤드류 공군기지에 도착한 그를 영접한 것은 카르자이를 냉대하던 홀부르크였다.

또 한 사람, 카르자이를 섭섭하게 했던 바이든은 부통령관저의 만찬에 카르자이를 개인적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오바마는 정상회담을 통해서 미국-아프가니스탄의 지속적인 협력을 강조했다. 외교형식에 있어서 극진한 대접과 화려함은 때로는 성과와 내용의 빈곤함을 커버하기도 한다.

미국-아프가니스탄 관계는 순식간에 장밋빛으로 바뀐 듯이 보이지만, 국내의 정치적 입지가 넓지 않은 카르자이의 고민과 대 아프가니스탄 정책에서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 내야 하는 오바마의 고민이 불식될 수는 없을 것이다.

▲ 지난 13일 워싱턴에서 만난 카르자이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로이터=뉴시스

10년 전, 카르자이가 아프가니스탄의 전국적 지도자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미국 역시 다른 대안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카르자이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러한 기본적인 구도가 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출구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10년 전의 낙관과 희망이 이제는 비관과 불안으로 물들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카르자이는 물론 미국정부와 국제사회가 풀어야 할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딜레마'라는 말 이외에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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