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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드라 같은 반군들, '그들이 사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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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드라 같은 반군들, '그들이 사는 방식'

[이웅현 '비극의 아프가니스탄'] '버티는 자가 살아 남은' 그들의 역사

인물이 너무 많았다. 침공군의 입장에서 보면 일관성 있는 소탕작전의 대상으로 삼기에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반군의 입장에서도 공통의 적을 축출하기 위한 연합작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았다. 아프가니스탄의 지형과 종족분포의 특성상 당연한 현상이었지만, 아무튼 이것이 소련군 점령 시기 소련군과 아프가니스탄 반군 모두의 딜레마였다.

페샤와르 일레븐

시작은 파키스탄에서였다. 1975년 다우드 정권의 좌경화에 반발한 이슬람주의자들 가운데 아프가니스탄과 접경한 파키스탄 지역 특히 페샤와르와 와지리스탄으로 이주한 자들이 있었다. 국경이랄 게 없었으니, 월경이랄 것도 없었다.

지아 울 하크 치하 파키스탄 국경수비군의 나스룰라 바바르 중장은 이 망명자들 가운데 정예 500명을 선발하여 '전사'로 훈련했고, 여기에는 후일 지하드의 지도자로 이름을 떨치게 될 굴부딘 헤크마티야르, 브루하누딘 랍바니, 아흐마드 샤 마수드, 잘랄루딘 하카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Bradsher, Afghan Communism and Soviet Intervention)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투입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 반정부적인 지지기반을 확충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정부 봉기의 성과는 미미했고, 대부분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에 의해서 격퇴되었다.

▲ 굴부딘 헤크마티야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이른바 아프간 반군 시대의 꽃을 활짝 피게 해 준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과 소련이었다. 1978년의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와 1979년 12월 소련군의 침공을 계기로, 반공-반외세주의적 아프간인들은 이웃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여 난민촌을 형성, 정착했다.

이들에게도 지도자는 필요했고, 1981년 경 페샤와르에는 굵직한 그룹만 해도 3개의 온건파 그룹과 7개의 원리주의 그룹이 경쟁적으로 형성되었다. 사예드 아흐마드 가일라니가 이끄는 조국이슬람전선, 모함마드 나미 모함마디의 이슬람혁명운동, 시브가툴라 무자디디의 조국해방전선은 원리주의적 색채가 덜한 온건파 그룹으로 평가되었고, 랍바니의 이슬람결사, 헤크마티야르의 이슬람당, 유니스 할리스의 이슬람당, 라술 사야프의 아프가니스탄 해방을 위한 이슬람연맹, 나스룰라 만수르의 이슬람혁명운동, 라피울라 알-무신의 이슬람혁명운동, 모함마드 미르의 이슬람전선은 이슬람원리주의를 고집하는 강경파 그룹들로 평가되었다.

▲ 브루하누딘 랍바니
1981년 초, 파키스탄 정부는 이들 가운데 가일라니, 나비, 무자디디의 세 그룹과 랍바니, 헤크마티야르, 할리스의 세 그룹 등 모두 6개 그룹만을 지정하여 아프가니스탄 반군단체로 지지했고, 페샤와르의 난민캠프에 학교(마드랏사)를 개설할 수 있도록 했다. 아프가니스탄 국내의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는 무기와 자금은 이들에게만 제공되었다.

그러나 분출하는 아프가니스탄 반군단체를 6개 그룹으로 통합하기에는 광대한 산악국가 아프가니스탄 내의 여러 종족을 대표하는 세력이 너무 많았고, 결국 1983년에는 하자라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다는 게릴라조직 등을 포함, 11개로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Amstutz, The First Five Years of Soviet Occupation). 1세기 경 불상이 처음으로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불교미술이 꽃을 피웠다는 옛 간다라 지방, 즉 페샤와르는 반군들의 도시가 되었다.

국내파

이들과 조직적으로 연대하지 않고 독립적인 대소 항전을 전개하던 아프가니스탄의 국내파 반군들도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는 마수드의 그룹(판쥐시리)이, 아프가니스탄 중・동부에서는 하카니의 그룹(파크티아)과 압둘 하크의 그룹(카불)이, 북서부에서는 자비불라의 그룹(발흐)이, 그리고 서부에서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이스마일 한의 그룹(헤라트)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들 역시 서로 연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가 문자 그대로 '무모(無謀)하게'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갈라놓은 것은 자신들의 사회주의 '제국'만이 아니었다. 복잡다단하지만 나름대로는 질서와 평화를 유지해오던 은둔의 '왕국'도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웅거하던 대소 항전의 전사들은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는 미국,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지원을 받으며 결국 소련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침공 이전에 어느 정도 유지되어 오던 '아프간인'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은 사라져버렸다. '10년 전쟁'이 끝나자 아프가니스탄은 이미 무기와 자금, 인종적, 이념적 경계선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내전

침공군이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지자 내전은 필연이 되었다.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하고 나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나갔던 나지불라의 공산정권은 불과 3년 만에 붕괴되었다.

카불이 권력의 공백상태가 되자 공산정권의 붕괴를 이끌었던 무자디디, 랍바니, 마수드, 헤크마티야르, 이스마일 한 등의 사이에 내홍(內訌)이 피비린내를 풍기며 가시화되었다. 공산정권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의 장군이었던 우즈베크족 압둘 라시드 도스툼(셰베르간)도 또 하나의 '군벌'로 가세했다.

그렇지 않아도 많았던 지도자들이 늘어만 갔다. 1994년까지 2년 이상 동안 카불 장악을 위한 포격이 연일 계속되었고, 아프가니스탄 각 지역은 '군벌'들이 할거했다. 그리고 아프간인들은 전쟁과 내전으로 이어지는 현실에 몸서리쳤다. 전쟁의 끝이 평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파키스탄이 다시 손을 뻗쳤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초기 500명의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양성했던 바바르 장군은 1994년 베나지르 부토 정권에서 내무장관이 되었고, 전사들이 득실대는 아프가니스탄에 또 다른 전사들을 양성, 후원, 투입하기 시작했다(Rashid, Descent into Chaos).

'학생들(탈레반)'이라 불리는 이 신흥 전사들은 내전에 고통 받던 아프간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북상했다. 이 새로운 지도세력이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전 국토의 90% 이상을 장악한 1996년 이후 다른 반군들은 북부 마수드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북부동맹'을 결성, 농성(籠城)에 들어갔다.

파키스탄의 전폭적인 지원은 '학생들'에게로 이전되었다. 탈레반은 정권수립을 선언했지만, 국제사회의 눈에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내전 중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파키스탄 이외의 어느 나라로부터도 국가승인을 받지 못한 '소외된 학생들'은 알카에다와도 손을 잡았다.

이합집산(離合集散)

2001년 10월 탈레반 정권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시작되자, 농성하던 북부동맹이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알카에다와 탈레반에 의해 마수드와 압둘 하크는 살해되었지만, 이들이 이끌던 그룹은 '반(反)탈레반 전선'에 합류했다.

같은 해 12월 독일의 본 협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과도정권이 수립되자, 북부동맹의 '군벌'들은 제도권 정치세력으로 탈바꿈했다. 이스마일 한, 도스툼, 사야프 등은 카르자이 정부와 협력, 이반하면서도 정부든 의회든 어떠한 형태로든 카불에 남았다.

그러나 이른바 '본(Bonn) 합의과정'에 반발한 헤크마티야르의 그룹, 한 때 탈레반과 손을 잡았던 하카니의 그룹, 만수르의 그룹은 탈레반과 함께 다시 산악지역으로 그리고 파키스탄의 와지리스탄 등지로 도주했다.

▲ 압둘라시드 도스툼과 하미드 카르자이
이후 8년 동안 미군과 연합군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프가니스탄 내부의 탈레반 잔여세력(즉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원하는 파키스탄 탈레반(TTP), 헤크마티야르의 이슬람당, 하카니의 그룹(하카니 네트워크), 만수르의 그룹, 이들을 지원하는 알카에다, 그리고 파키스탄 내 탈레반 동조세력 등 복잡한 반군의 네트워크이다(Katzman, Afghanistan: Post-Taliban Governance, Security, and U.S. Policy, CRS Report for Congress, 2009).

대소항전의 무자헤딘 세력에 비해 그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동일한 전술 개념 하의 소탕 대상으로 일괄하기 어려운 숫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더욱이 원래 반(反)탈레반 전선의 하나였던 헤크마티야르의 이슬람당은 탈레반과 연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고, 물라 오마르의 통제를 받으며 활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하카니 네트워크도 군사행동에 있어서는 민간인 살상을 자제하라는 오마르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급조폭발물 또는 자살폭탄테러를 이용한) 독자적인 '히트 앤 런' 작전을 구사하고 있다.

헤크마티야르와 하카니 그룹 특히 하카니 네트워크는 '우즈베키스탄 이슬람운동(IMU)'이나 체첸반군 등 외부의 지하드 전사들과 협력하면서, 마르자가 위치한 헬만드 등 아프가니스탄 동남부 지역의 양귀비 경작에 대한 보호비를 징수하거나, 아편을 파키스탄으로 밀수출하면서 자원을 조달하거나, 알카에다의 지원을 받고 있다(Giustozzi, Decoding the New Taliban).

라스트 맨 스탠딩

2010년 3월 연합군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마르자의 작전을 끝내고 헬만드에 '상자 속의 정부(government in box, 매크리스털의 표현으로 소탕작전 후 현지에 만들어질 지방정부 요원으로 훈련받은 자들을 의미)'를 수립한 후 칸다하르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의 '두더지 때리기'식 작전에서 탈피한 매크리스털 류의 '빈집채우기'(탈레반의 그림자 지사(shadow governor)를 축출한 자리에 카불정권의 지사를 앉히는 것)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미군은 하카니 네트워크의 본거지로 알려진 와지리스탄의 미란샤에 대한 무인공습기 프레데터의 폭격을 계속하고 있다. 이미 2002년부터 실시해오던 공습은 오폭에 의한 민간인 사상자를 양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CIA 요원 7명을 자폭테러로 잃은 후 더욱 강화되었다(AP, March 18, 2010).

최근에는 이 자폭테러를 주도한 그룹(하카니 네트워크)에 대한 보복작전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마르자의 작전이 탈레반을 타깃으로 한 것이라면, 미란샤 공습은 NATO의 병력에 대한 반(半)테러 반(半)게릴라전 공격을 주도해 온 하카니 네트워크를 타깃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Time, March 8, 2010).

▲ 잘랄루딘 하카니
탈레반과 헤크마티야르 그룹, 그리고 하카니 네트워크에 대한 작전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연합군은 국경지역의 반군 봉쇄에 미온적이었던 파키스탄으로부터 탈레반 2인자(압둘 가니 바라다르)의 체포라는 선물도 받았다.

문제는 이 복잡다단한 반군의 네트워크를 상대하는 카불정부와 연합군, 그리고 파키스탄정부의 정책과 작전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라다르의 체포에 대해서 (온건파 탈레반으로 알려진 이 인물과 대화를 시도하던) 카르자이가 "매우 분노했다"는 게(AP, March 17, 2010) 사실이라면 현재의 카불정부와 연합군은 국경지대를 거점으로 삼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출몰하는 머리가 여럿 달린 히드라를 각자의 방식대로 멋대로 상대하는 치명적 자만심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이 지닌 여러 개의 머리에 대해 자르는 방법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라쇼몽>의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 가운데 <요짐보>(用心棒, 1961년)라는 작품이 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호위무사 또는 경호원(보디가드) 쯤 되는 제목의 이 영화는 헐리웃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황야의 무법자>(1964년)로 그리고 브루스 윌리스의 <라스트 맨 스탠딩>(1996년)으로 리메이크되었다.

▲ 영화 <요짐보> 속에서 야도바 마을에 흘러든 떠돌이 요짐보(미후네 토시로)는 대립하는 어느 한 쪽에 속하지 않고 양쪽을 옮겨다니며 '게릴라'적 칼잡이 활동을 펼친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총잡이(<요짐보>에서는 칼잡이)가 이해관계에 따라 소속을 바꾸면서, 대립하는 두 폭력조직을 마침내 궤멸시킨다는 줄거리, 그리고 등장인물 모두가 폭력의 주체라는 기본설정에는 변화가 없지만, 이 세 편의 영화는 점차 무자비한 폭력이 극단적으로 강화되는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다소나마 정의감이 있던 '요짐보'는 헐리웃으로 가서 무자비한 폭력을 거리낌 없이 행사하는 '라스트 맨'으로 바뀌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비극이 확대 재생산되는 가운데 등장한 반군들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 산악지역에서 게릴라 항전을 삶의 수단으로 삼으며 세대를 바꾸어온 세력들이다. 하카니의 그룹과 헤크마티야르의 그룹은 물론 정권담당의 경험이 있다는 탈레반조차도 중심세력의 세대교체를 진행하면서 '요짐보'에서 '황야의 무법자'로 그리고 '라스트 맨'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삶의 영위 방식 자체가 게릴라였고, '버티는 자가 살아남는다(라스트 맨 스탠딩)'는 사고를 하는 이들을, 전혀 다른 세계관과 전술개념을 지닌 연합군 그리고 막 형성되기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쫓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연합군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과거 소련군이 직면해야 했던 히드라의 딜레마에 여전히 빠져 있다. 느슨한 네트워크의 반군 조직들인들 머리가 여럿인 데서 생기는 제약이 왜 없겠는가? 아무튼 인물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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