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미군의 마르자 대공세, 21세기판 '라쇼몽'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미군의 마르자 대공세, 21세기판 '라쇼몽'

[이웅현 '비극의 아프가니스탄'] 헬만드와 칸다하르, 예나 지금이나 '다이 하드'

'전지전능'의 신화

KGB라면 정확한 정보를 지니고 있을 것이고, 또 그에 입각한 상황판단과 문제해결의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한 마디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줄 알고 있었다.

▲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1979년 3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안에 만들어진 '아프가니스탄 위원회(아프간 트로이카)'의 주요 멤버는 정치국원 세 사람 즉 KGB 의장 안드로포프, 외상 그로미코, 국방상 우스티노프였다.

처음에는 구성원 각자가 지니고 있는 카불 현지로부터의 보고라인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상황판단을 하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지만, 카불의 정국이 혼돈을 거듭한 8개월 동안 (결정)권력의 추는 자연스럽게(?) KGB로 기울어져 갔다.

누가 KGB의 판단과 능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결국 1979년 12월 12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군 파병의 최종결정에 관한 정치국 결의서는 안드로포프에 의해 가장 먼저 서명된 뒤에 다른 정치국원들에게 (서명을 받기 위해) 넘겨졌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록, ЦХСД<러시아현대문서관>, Фонд 89, Пер. 14, Док. 31)

1979년 당시 카불 주재 미국 대리대사였던 브루스 암스터쯔는 5월 9일 국무부로 "최근 수주일 동안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개입정도는 현저하게 증가했지만, 세계여론이 떠들어대고 있는 만큼은 아니다. 소련군 전투부대가 아프가니스탄의 국내갈등에 개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우리가 판단하건대 아마도 소련은 베트남형(型)의 덫에 걸려드는 것은 피하려고 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카불 주재 미 대사관의 타전문서, KABUL 3626)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말콤 툰도 같은 의견이었다.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빠져 본 자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베트남에서의 자신들의 치욕적인 경험에 관해 모스크바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련의 개입정도가 점증하던 8월에 접어들어 암스터쯔는 "소련의 개입 성격은 베트남에서 미국 정부가 경험한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단계를 밟아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KABUL 5967)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카불에서 아민이 타라키를 제거함으로써 모스크바로부터 파문(破門)을 당한 9월 이후에도 미 국무부는 "소련의 미디어가 카불의 신 정권을 지지했다"(미 국무부의 타전문서, STATE 273949)며 소련이 (카불의 상황을 완벽하게 판단하고)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소련은 '신중하게' 행동하기는 했지만, 상황을 완벽하게 판단하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이렇다 할 '거대전략'이 없었던 소련은 오히려 카불의 정국변화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979년 12월 27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식이 전 세계에 전해지자, 소련의 '전지전능'의 신화가 이번에는 지난 1년 동안 소련 내에서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논의되어 본 적이 없는 거시적 '세계전략'이라는 외피를 쓰고 나타났다.

1980년 1월 4일,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은 이란과 파키스탄 양국에 위협이 되며, 세계의 석유공급지를 장악하기 위한 시도"라고 비난했고, 이틀 뒤에는 중국 정부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인도양으로 진출하여 해로와 유전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유럽을 포위하고,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스라엘 역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페르시아 만의 석유 장악을 위한 첫 단계로 보았다. (이웅현 편, <중앙아시아의 문명과 반문명>)

러시아인들만 "소련(KGB)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전지전능 신화의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전 세계가 소련에게는 주도면밀한 계획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면 이러저러한 연유에서겠지"라는, '미러 이미지(mirror image)' 효과인지도 몰랐다. 국제사회에서 경쟁자는 상대방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물론 이 '거울 이미지'를 통해서 '전지전능의 신화'를 파괴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1980년 1월 1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문가 리언 풀라다는 백악관에 서신을 보내,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이 적절한 무기 지원을 받는다면 소련을 수 년 동안 붙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잡아 둘 수 있을 것이며…아프가니스탄 반군은 승리할 수는 없겠지만 패퇴시키기 또한 어려울 것"이라면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독립 국가를 점령한 데 대해서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의 베트남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Letter from Leon B. Poullada to Lloyd Cutler)

그러나 사실 풀라다는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1979년 7월 백악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는 카터의 반군지원명령서를 이끌어 냄으로써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의 수렁 속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풀라다와 브레진스키는 전지전능한 국가가 '낚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파괴된 신화

자신감에 차 있던 소련이 풀라다나 브레진스키의 생각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군대 투입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1980년 1월 17일과 25일 아프가니스탄위원회는 정치국에 "아프가니스탄의 상황과 안정화를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형성되었고, 중동에서의 상황발전에 있어서 우리를 위협하는 몇 가지 경향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보고했고, 31일에는 안드로포프가 직접 카불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2월 7일 이 KGB 의장은 정치국회의에서 "우선 무엇보다도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점을 언명해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모든 정보로 보아 분명하다"고 확언했다.(이웅현, <소련의 아프간전쟁>)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사회주의 제국은 씹어 삼키기 어려울 만큼의 사과를 베어 물었던 것이다. 아민을 제거하고 옹립한 카르말에게는 국민통합의 능력이 없었다. 아민과 마찬가지로 카르말은 자파 세력의 결집에만 신경을 썼고, 의심스런 자는 모두 정권에서 배제했다.

아프가니스탄 정규군의 이탈도 현저하게 증가해 갔다. 아프가니스탄 정규군이 무력해지자, 애초 주요 도시와 도로의 치안확보를 위해 파견된 소련의 '한정적 분견대'는 투입 당시의 목적과 달리 아프가니스탄 군이 주도해야 할 반군소탕작전에 적극 가담하면서 전술적 성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프간인들은 소련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는 인식을 더 강하게 갖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를 이식하려고 하면서 저항은 더욱 치열해졌다. 어쩔 수 없이 카불정권과 점령군에 부역하고 있던 자들의 부패와 사보타지를 막을 수도 없었다. 역사적으로 폭력적이고 빈곤한 현실에 익숙해 있는 아프간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자원을 소련은 갖고 있지 못했다. 카불 정권에게 '통합'을 강조해온 소련으로서도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반대세력의 무력 진압 이외에는 없었다.

1980년대 전반기 소련은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어 서기장에 취임한 안드로포프는 개전 2년이 되기 전에 벌써, 자신이 그렇게도 강력하게 추진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동남부(헬만드, 칸다하르) 지역의 무자헤딘에 대한 파키스탄의 지원을 차단하는 일이 철군의 첩경이라 생각한 KGB 보스 출신 서기장은 파키스탄 대통령 지아 울 하크와 교섭을 시도하려다 1984년 2월 사망하고 말았다. 죽어가는 나라에 죽어가는 지도자가 줄을 이었다. 뒤 이어 등장한 체르넨코 역시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채 1985년 초 사망했다.

▲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정체(停滯)'의 시대를 끝낼 것으로 촉망받으며 1985년 3월 취임한 젊은 서기장은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의 전쟁'이 '고르바초프의 전쟁'으로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르바초프는 44세의 젊은 장군 아나톨리 자이쩨프를 비밀리에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가? 귀국한 장군의 답은 간단했다. 무장 반군에 대한 지원 통로인 파키스탄 및 이란과 접한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폐쇄하지 않는 한 승리는 무망하다는 것이었다.(Victor Sebestyen, Revolution1989)

이미 5년 반 동안 7500명의 병사들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부 특히 (2010년 3월 현재 미군과 아프간군이 탈레반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는) 헬만드와 칸다하르의 무자헤딘은 다이하드(die-hard)였다.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소련의 "치명적 상처(bleeding wound)"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86년 11월 정치국회의를 소집하여 철군 방침을 선언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는 이미 6년을 싸워왔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20년이고 30년이고 싸워야 할 것이다. 상황의 전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도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우리의 군대가 전쟁에서 열세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야 할 것이다…우리 군대가 무능력하다는 점을 노출시키면서 밑도 끝도 없는 전쟁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을 종결짓도록 하자."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주도자 가운데 하나였던 그로미코도 변명 섞인 후회의 변을 늘어놓았다.

"파키스탄 및 이란과의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폐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경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산악으로 이어지는 수백 개의 통로가 존재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고려하면 이러한 국경 폐쇄가 분명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오늘 전쟁 종결을 위한 전략적 과제들을 분명하게 선언할 필요가 있다."(1986년 11월 13일 정치국회의록, ЦХСД, Фонд 89, Пер. 14, Док
▲ 안드레이 안드레이비치 그로미코
. 41, 또 한 사람의 주전론자 우스티노프는 1984년 사망했기 때문에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이러한 결의를 하고도 완전 철군(1989년 2월 15일)까지 2년 이상이 더 소요되었고, 그 사이에도 소련 병사들의 희생은 늘어만 갔다. 그래도 고르바초프였기에 가능한 철군이었다.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면서 출혈만 늘어가는 수렁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서는 젊은 지도자의 '발상의 전환'과 '결단'이 있어야 했다.

민주적 리더십이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어찌 고르바초프에게 국내 보수파의 반발이 없었을 것이며, 완전 승리 후의 "명예로운 철군"에 욕심을 내지 않았겠는가?

라쇼몽(羅生門)

소련군 무패의 신화가 철저하게 파괴되는 6년 동안 세계의 관찰자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고전적 영화 '라쇼몽(羅生門)'에 비유하곤 했다. 무대의 한 가운데 '폭력'이 자리 잡고 있고, 그 '폭력'이 범죄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등장인물들의 견해와 목격담이 다 달랐다. 선입견과 편견에 따라 전쟁의 성격이 각기 달리 해석되었고, 전황 역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및 소련군의 견해와 반군의 해설이 달랐다.

▲ 2월 13일부터 시작된 '마르자 대공세'에서 전투중인 미 해병대 병사들

아프가니스탄의 전황에 관한 연합군의 대부분의 정보가 공개되고 탈레반을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반군의 PR능력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21세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 수행 중 사망한 미군 병사가 1000명을 넘어선 2010년 3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군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의 연합작전 '모슈타라크(우리 함께)'에 대해서 <AP> 통신은 나름대로 '균형 잡힌(?)' 보도를 하고 있다.

소련이 그토록 곤욕을 치렀던 헬만드 주의 마르자에서 "(미) 해병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탈레반 통치의 마지막 주요거점을 소탕했으며…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다음 타깃은 인근 칸다하르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면서도, 미 해병대 대변인이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한 말을 쓰는가 하면,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탈레반 주요세력은 무기를 땅에 묻고 민간 주민들 속으로 숨어들어갔을 것이다…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장교의 언급도 보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르자 주민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도둑질을 일삼았던" 아프가니스탄 경찰의 진정성과 능력에 대해서 신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연합군이 철수하고 나면 상황은 원상 복귀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헬만드를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남동부 지역에서의 연합군의 작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분명 연합군은 아프가니스탄 재건을 위해 새로운 개념과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소련과 달리 미국은 죽어가는 제국도 아니다. 증파 결정으로 중도 회군은 없다는 결의도 표명했다.

그럼에도 마르자의 모슈타라크는 '기시감(déjà vu)'을 갖게 한다. 소련이 실패한 전략과 전술, 즉 아프가니스탄 정규군의 건설, 경찰병력의 육성, 국경폐쇄에 관한 파키스탄과의 협조 등등. 우리는 '신화'와 '심리전'으로 치장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 또 다른 '라쇼몽'을 보고 있는 셈이다.

전쟁이 종결되기 전까지는, 아니 종결 후 적어도 한 세대가 지나기 전까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해석을 위해 우리는 편견과 신화 그리고 선입견에 의존해야 할 지 모른다. 종결 후에는 물론 승자의 유권해석이 모두를 압도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전개되고 있는 비극을 해석하려는 자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는 '역사적 경험'일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