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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가 간과한 '아프간戰 특수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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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가 간과한 '아프간戰 특수성'은?

[이웅현 '비극의 아프가니스탄']<2> 모자이크 국가의 운명

2001년 9월과 10월, 살아 있었더라면 조국의 운명을 바꾸어놓았을지도 모를 아프가니스탄의 두 '국민 영웅'이 목숨을 잃었다. 한 사람은 알카에다에 의해서 암살당한 마수드였고, 다른 한 사람은 탈레반에 의해서 체포, 처형된 압둘 하크였다.

9월 11일 뉴욕테러와 10월 13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이라는 세계사적 대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두 사나이의 죽음은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에피소드로 전락해 버렸지만, 이후 전개된 아프가니스탄 '국가'의 운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야말로 뼈아픈 손실이라 할 수 있었다.

비운(悲運)의 영웅들

3200만 명 정도로 추측되는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약 4분의 1을 점하는 타지크인들의 군사지도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대소련 항전을 통해서 용맹한 '판지쉬리의 사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원래는 같은 타지크인 랍바니의 자미아트-이-이슬라미(이슬람결사)의 군사 지도자였지만, 독립적인 대소항전 작전을 통해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고, 탈레반 치하에서는 아프간인의 10분의 1정도를 구성하는 우즈베크인 세력(라시드 도스툼)과 역시 비슷한 인구의 하자라인 세력(이스마일 한)을 규합했던 '북부동맹'의 사실상의 지도자였다.

▲ 아흐마드 샤 마수드, 타지크
비록 탈레반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둔 정파들의 잠정적 연합이었지만, 마수드의 세력은 아프간 전체인구의 절반 가까운 주민을 대표하는 세력이었다.

그러한 그가 9.11 테러 이틀 전 판지쉬리의 계곡에서 알카에다가 보낸 자객(자살폭탄공격조)에 의해서 48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북부동맹과 미군에 의해서 탈레반이 축출된 후인 2001년 말 하미드 카르자이가 이끄는 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는 그를 '아프간 국민의 영웅'으로 추서했다.

또 한 명의 비운의 사나이는 아프간인들의 약 2분의 1을 구성하는 파슈툰족 출신이었다. 압둘 하크는 본디 대소항전의 시절에 파슈툰족의 대표세력이었던 헤크마티아르의 히즈브-이-이슬라미(이슬람당)에서 갈라져 나온 유니스 할레스의 제2 '이슬람당'의 군사 지도자였다.

그는 카불을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발상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하는 광범위한 동남부 지역에서 효율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하면서 실력자로 부상했다. 탈레반 지도자 뮬라 오마르가 대소 항전에서 한쪽 눈을 잃은 것처럼, 압둘 하크는 소련군이 뿌려 놓은 지뢰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 압둘 하크, 파슈툰
미군의 공습이 시작된 후인 10월 말 압둘 하크는 역시 파슈툰족이 주축인 온건파 탈레반을 규합하기 위해 파키스탄의 북서부도시 페샤와르를 떠나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입했다가 매복하고 있던 탈레반에 의해 수행원 17명과 함께 사살되거나 혹은 체포, 처형되었다.

마수드처럼 '국민의 영웅'으로 추서되지는 못했지만, 마수드와 달리 그는 소련군 철수 후의 악명 높은 상쟁살상의 내전에 가담하지 않은 '피스메이커(peace-maker)'였고, 탈레반을 지지했던 많은 파슈툰인들 사이에서 이 궤도를 이탈한 원리주의 과격세력을 대체할 인물로 명망이 높았다. 그러한 그가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모든 아프간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작가 프레드릭 포사이스는 <아프간인(The Afghan)>에서 탈레반의 골칫거리이던 마수드의 암살을, 9.11 테러 거사 이후 미국이 탈레반 정권에 알카에다 핵심세력의 인도를 요구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막기 위해 미리 탈레반에게 준 선물이라고 묘사했다.

저널리스트 아흐메드 라시드는 <혼돈 속으로(Descent into Chaos)>에서 마수드와 압둘 하크를 살해하면서 탈레반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national standing)' 아프간 지도자들을 모두 제거해 나갔다고 기술했다.

아무튼 2001년 12월 독일의 본에서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국가건설의 논의과정(본 프로세스)이 시작되었을 때, 아프가니스탄을 구성하는 최대 종족(파슈툰)과 두 번째 종족(타지크)이 낳은 이 두 비운의 사나이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마지막 왕

비운의 사나이는 또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마지막 왕 자히르 샤였다. 그는 앞의 두 사나이들처럼 40대의 한창 나이에 탈레반 또는 알카에다에 의해서 생을 마감한 것은 아니었지만, 90여년의 짧지 않은 생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간을 망명 정객으로 살아야 했다.

▲ 모하메드 자히르 샤, 두라니 파슈툰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100만 명 이상의 아프간인이 사망하고, 600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된 '30년 비극'의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에서는 모든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참혹한 시련을 겪었고, 모두가 원하지도 않은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이에 비하면 1933년 19세의 나이에 등극하여 40년 동안 통치하다가, 1973년 휴가 겸 신병치료차 이탈리아에 체재하던 중 사촌형제 다우드의 쿠데타로 실각한 이 마지막 왕의 운명은 비운이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혼란기 이전의 '왕국'을 통치했다는 정통성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전개로 어수선하던 재위 40년 동안 여러 종족을 아우르면서 통치했다는 국민통합의 상징성이 있었다.

이러한 상징성에 더해서 자히르 샤는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적인 종족 파슈툰이었기 때문에 항상 아프가니스탄의 질서회복을 위한 대안으로 거론되었다.

1987년에는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철군 이후의 대안으로 고려한 적이 있었고, 철군 이후 무자헤딘 간의 내전 시기에도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을 위한 왕정복고가 고려되었다. 그러나 무력으로 국토를 농단했던 나지불라 정권과 내전 시기의 무자헤딘 각파, 그리고 탈레반에게는 왕실 정변으로 축출된 '국왕'의 정치적 상징성은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인도의 무갈, 페르시아의 사파비드, 우즈베크의 샤이반디스에 의해서 삼분되어 있던 아프가니스탄 지역이 하나의 왕국으로 탄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인 1709년이었고, 그 주역은 길자이 파슈툰인 미르 와이스였다.

길자이 파슈툰의 짧은 통치기간을 거쳐 1747년 같은 파슈툰 내에서도 길자이 파슈툰과 경쟁관계에 있던 압달리 파슈툰의 아흐마드 한이 길자이 파슈툰을 누르고 압달리 파슈툰을 주축으로 한 아프가니스탄 왕조를 열었다.

아흐마드 한은 종족의 원로회의(지르가)를 통해 스스로를 아흐마드 샤라 부르고, 두르-이-두란(진주 중의 진주)이라 칭했다. 이로부터 압달리 파슈툰은 두라니 파슈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자히르 샤는 두라니 아프가니스탄 왕조의 열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왕이었다.

통치 250여 년 동안 두라니 파슈툰 왕조는 중앙집권적이라기보다는 길자이 파슈툰을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거주하는 각 종족에 대해 전리품과 외국의 원조물자를 배분하여 회유하고, 종족의 독립성과 자치를 인정하는 정책을 취해 왔다. (같은 파슈툰족 내에도 두라니, 길자이, 구르구쉬트, 카를란리, 사르반디 등 5개의 하위 종족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파가 있다.)

이것이 분열되지 않은 평화적 질서유지와 왕국 유지의 비결이기도 했다.

1920년대에 소련이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을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하면서 우즈베크, 타지크, 투르크멘인들이 대거 아프가니스탄으로 유입되어 들어와 기존의 파슈툰과 하자라인들을 주축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종족들이 할거하던 복잡다단한 구성이 더욱 복잡해졌지만, 그래도 자히르 샤의 통치시기까지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분열되지 않고 느슨한 종족연방(tribal confederation)의 형태로 하나의 정체를 유지했다.

그래서인지 2002년 탈레반이 축출된 후 조국의 비상 로야 지르가는 구성원 4분의 3의 찬성으로 자히르 샤의 과도정부 수반 취임을 청원했다. '겸손하고 온화한' 두라니 파슈툰 왕은 같은 두라니 파슈툰 하미드 카르자이에게 돌아 간 자리를 고집하지 않았지만, 자히르 샤의 국민통합의 상징성은 다시 확인되었다.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헌법은 그를 '국부'로 추앙했고, 2007년 7월 모하메드 자히르 샤는 92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마지막 왕은 마수드나 압둘 하크에 비하면 비교적 해피엔딩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비운'의 정객이었음에 틀림없다.

파슈툰 우위(?)와 '국민' 통합

자히르 샤는 아프가니스탄의 '국왕'으로서는 마지막 인물이었지만, 아프가니
▲ 하미드 카르자이, 두라니 파슈툰
스탄의 최고 통치자로서 마지막 파슈툰은 아니었다.

1973년 그를 쫓아내고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대통령이 된 모하메드 다우드, 1978년 4월의 쿠데타를 통해 다우드를 살해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누르 모하메드 타라키, 그리고 1996년 카불을 장악한 탈레반 지도자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까지 모두가 파슈툰이었다.

굳이 세분하자면, 250여 년 동안 카불을 장악해 온 두라니 파슈툰과 경쟁적인 길자이 파슈툰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즉 두라니 파슈툰의 카불 지배의 역사 속에서도 1747년 아흐마드 샤의 두라니 왕조 창시 이전의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국왕 미르 와이스, 1970년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타라키, 그리고 1990년대 탈레반의 오마르 등과 같은 길자이 파슈툰이 있었다. 아무튼 지난 30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적 종족은 파슈툰이었다.

▲ 뮬라 무함마드 오마르, 길자이 파슈툰
그러나 두라니 파슈툰 왕조 종식 이후 불과 30년 동안 상황이 다소 바뀌었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대한 외부세력의 침공이 있을 때에만 카불을 지배하는 두라니 파슈툰을 중심으로 단합했던 길자이 파슈툰과 그 이외의 다른 종족들이 카불을 두고 경합하기 시작했다.

두라니 파슈툰 왕조가 소멸한 이후, 다우드의 5년 통치시기를 지나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1978년)와 소련의 침공(1979년) 등이 있었고, 이 공산주의 집권세력과 침공세력에 대항하는 무자헤딘 각파가 자신의 출신 종족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군사적인 세력(라쉬카르)을 형성했던 것이다.

▲ 아프가니스탄의 종족분포도. 갈색이 파슈툰, 녹색이 타지크를 나타낸다.

결국 침공과 내전으로 인해 종족 간의 경계선이 더욱 선명해졌다.

타지크(북동부의 바다흐샨과 서부의 헤라트), 우즈베크(아무다리아강 이남 아프가니스탄 북부), 하자라(아프가니스탄 중부 하자라자트) 등 그렇잖아도 독립적이었던 종족들의 군사 지도자들이 대소항전 과정에 두각을 나타냈고, 소련군 철수 후에는 카불을 놓고 파괴적인 무력 충돌을 벌이기까지 했다.

길자이 파슈툰 중심의 탈레반 집권 시기에는 두라니 파슈툰, 우즈베크, 하자라, 타지크인들이 이에 도전했고, '북부동맹'이라 불리는 군사적 연합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순전히 아프가니스탄을 구성하는 종족분포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칸다하르에서 시작한 길자이 파슈툰의 탈레반이 중앙무대에서 사라진 카불에서는 두라니 파슈툰은 물론 탈레반에 반대하는 길자이 파슈툰, 타지크, 우즈베크, 하자라 등등의 종족 세력이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두라니 파슈툰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에게는 이들을 모두 포용하는 '국민통합'의 어렵고도 막중한 책무가 부여되어 있는 셈이다.

오바마가 간과한 중대한 차이점

2009년 12월 2일, 오바마 미 대통령은 병력 3만 명의 증파를 결정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베트남'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베트남전과 달리 지금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43개 동맹국들과 함께 하며,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저항세력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미국인이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악의적인 공격을 받았으며 지금도 아프가니스탄 국경 주변에서 음모를 꾸미는 극단주의자들의 목표가 되고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또 다른 중대한 차이점을 간과했다. 베트남과 달리 아프가니스탄은 '민족적 일체감'이나 '민족주의' 의식이 희박한, 다양한 종족들의 모자이크 국가라는 사실이다.

베트남에서 미국이 군사적 해결을 위해 일원적인 적을 상대해야 했다면,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해결을 위해 복잡한 종족 네트워크를 상대해야 한다.(Thomas Johnson and M. Chris Mason, "Afghanistan and the Vietnam Template," Military Review, Nov/Dec 2009) 군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탈레반 반군들만이 아프가니스탄 '국가' 건설의 장애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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