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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과 '코스모스', 두 남자의 조금 다른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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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과 '코스모스', 두 남자의 조금 다른 귀향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음악으로 건네는 이야기의 귀환

"꿈이 뭐니?" 대신 "꿈이 뭐였나?"라는 물음을 듣기 시작하는 때가 있다. TV스타들이 어느 시점 이후 자기보다 어려진 다음, 한창 활동하는 모습을 봤던 스포츠 스타 출신 감독과 협회 임원들이 많아지는 시기가 있다. 기억의 비중이 너무 커져 짊어지고 다니기 힘들어져 덜어내는 방법을 알게 되고, 어른이 되어 문제를 인식할 줄 알게 되지만 동시에 현실을 수용하고 포기할 줄도 알게 된다. 바로 그럴 무렵인 30대 중반 언저리의 두 남자가 있다.

밴드 '미선이'로 데뷔한 조윤석이 루시드 폴(Lucid Fall)로 솔로앨범을 낼 무렵, 코스모스(Cosmos)도 데뷔앨범과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주목도엔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숨겨진 보석들이었다. 루시드 폴은 학업과 꾸준한 작품 발표를 병행하며 점점 더 많은 사랑을 얻어갔고, 코스모스의 김상혁은 회사원 생활로 활동을 중단한 채 소수의 컬트적인 지지로 기억되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시간에 따라 나이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호명하는 소리가 점점 커진 건 비슷하다. 그리고 스위스의 과학자에서 한국의 음악인으로 돌아온 루시드 폴과 무려 8년 만에 부활한 코스모스가 지난 12월에 나란히 새 앨범을 발표한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포근함, 루시드 폴

▲루시드 폴의 [Les Miserables] ⓒCJ뮤직
미선이의 [Drifting](1998)은 인상적인 선율과 서정적인 무드, 그리고 진지한 고민까지 담은 노랫말이 조화를 이루었다. 몸과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 젊음의 고백과 아름다운 멜로디가 손깍지 한 노래들은 당시 젊은 감성을 대변하며 시대의 향기까지 간직한 '송시'였다. 또한 기교적인 연주와 전문적인 작법이 아닌, 감성과 감각이 좋은 음악의 조건임을 증명했다. 루시드 폴의 [Lucid Fall](2001) 역시 그랬다. 그러다가 [오, 사랑](2005)부터 오랜 팬들 중 일부가 어딘지 거리감을 느끼며 멀어져 간 자리에 더 많은 팬들이 둘러앉았다.

그리고 네 번째 앨범 [Les Miserables]은 폭발적인 음반판매와 미디어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른다. 음반시장에 어떤 기록을 세울 기세이고, 이제 유희열·김동률·이적 등과 나란히 앉아도 될 것처럼 보인다. 음악 역시 그럴만하여 특유의 흔들림 없는 노래들은 프로듀서와의 작업으로 더욱 섬세하고 유려한 만듦새를 지녔다. 별다른 요동 없이 미끈하게 흘러 넘어가는 곡들은 여전히 은은하고, 여전히 예쁘며, 여전히 약간 쓸쓸하다.

음악 스타일에선 어딘가에 계속 머물러 있는 루시드 폴이 돋보인 건 정적을 깨지 않고 읊조리는 시(詩) 수준의 품위를 지닌 노랫말이다. <벼꽃>이란 제목과 <고등어>의 노래처럼 작은 것과 생명에 대한 마음 기울임은 고맙다. 남다른 이야기를 풀어내려는 애씀은 <평범한 사람>으로 이어진다. 이 사회의 맨 얼굴과 국가의 정체와 공권력의 기능을 드러낸 용산참사 때 뜨거운 불에 태운 몸을 달이 열두 번 차고 기우는 동안 차가운 냉동고에 뉘여야 했던 이들을 기린 노래이다. 사뿐한 리듬에 고개를 까닥이며 흥겹게 듣는 이들도 많겠지만 말이다.

대중예술은 시대와 사회를 비춰왔다. 음악은 물론이고 문학, 미술 등 거의 전 분야의 상식이다. 그런데도 무수한 증거로부터 눈과 귀를 막고 도리질하며 가끔 음악과 사회는 원래 별개라고, 별개여야 한다고까지 한다. 대중음악만이 그렇다면, 왜 유독 대중음악만 그런지 설명해야 하지만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너무 당연한 걸 너무 알지 못하는 무지와 자기합리화의 기형적 결합이 빚은 오해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권과 세계화의 그늘도 잠시 노래한 [국경의 밤](2007) 이후의 인터뷰(김윤하)에서 루시드 폴은 "음악인으로서 갖고 있는 이상한 사명감"이란 말을 했다. 강산에도 "아티스트의 소명의식"이란 비슷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루시드 폴은 그것을 부담 없고 예쁜 노래의 소재로 삼는다. 대중성을 담보한 사다리이자 어떤 담장이다. 서로 다른 노랫말과 편곡으로 변주하며 광주항쟁의 아픔을 쓰다듬는 <레미제라블 pt1, 2>는 앞서 이장혁이 발표한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를 떠올리게 한다. 루시드 폴과 가장 대비될 싱어송라이터인 이장혁의 음악은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절망의 끝자락에 서서 구원을 갈망하며 신앙고백을 했던 것처럼 고통으로 채워진 채 고립된 내면과 내면이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음을 증언했다. 그런데 어쿠스틱으로 편성을 단순화하고 자전적 이야기도 줄인 이장혁의 [Vol.2]에 담긴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와 루시드 폴의 <레미제라블>은 사건보다 내면을, 사회보다 사람을 노래한다는 점에선 같다.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루시드 폴은 계속 '사람이었네'라 노래하고 있다.

미선이 때에 <치질>에서 경멸한다던 어떤 신문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의아하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여름, 음악인들의 작은 목소리라도 모아보자는 간곡한 메일을 소속사에 보냈으나 어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을 때, 섭섭하긴 했으나 이해할 순 있었다. 얼마 전,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음악회 출연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소속사의 입장을, 안타깝긴 했어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고학력과 인간적 매력, 그리고 부드러운 음악으로 쏠리는 특정 기호층이 유입되고 있다 해도 상관없다. 결국 음악의 바다로 모이니까.

어쩌면 오늘을 담담히 기록할 뿐인 '관조'가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비슷한 또래의 이런저런 상상을 노래로 옮기는 것도 일종의 기록이었다. <고등어>를 들으며 몇 해 전에 고등어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고등어의 원한이 인간을 죽게 만든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파란을 일으켰던 개인적 경험을 떠올렸고, <문수의 비밀>과 같은 내용인 '짱가 선생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어딘가에 쓰기도 했다. 이렇게 루시드 폴은 마음결을 거스르지 않고 미끄러지는 음악에 동세대의 서정을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옮겨 적는다.

외딴 섬에서의 감동, 코스모스

▲코스모스의 [Hanei Sky] ⓒ석기시대
그런데 코스모스는 다른 시대의 감성이라 여겨졌던 것을 어딘가 멀리 동떨어진 곳으로 퍼 나른다. 세 번째 앨범인 [Hanei Sky]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반면, 퇴행과 정체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가감작용에 의해 전체적으로는 어중간하다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고 글을 접으면 될 일이나, 기묘하게도 매력적인 앨범이다. 돌아온 코스모스는 완전히 달라졌고, 동시에 변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이 괴상한 문장들을 해명하려 노력할 참이다.

먼저 역사의 연장이란 의미가 있다. 데뷔작 [Standard](2000)는 한국 모던 록 1.5세대가 반응한 동과 서, 고와 금, 미숙함과 신선함의 충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One And Only](2001)가 나오면서 역사의 일부로 승격되었다. 꽤 지난 2005년 여름, 대형공연의 출연계약 때문에 여의도의 어느 편의점 파라솔에서 만난 김상혁은 정장을 입은 전형적인 회사원의 모습이었다. 마침내 [Hanei Sky]에 그 날이, 그리고 긴 공백이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코스모스만의 독특함은 충돌에서 비롯된다. 으레 음악인의 방향성과 청자의 수용 사이에는 간극이 있기 마련, 코스모스의 경우에는 그것이 유난히 커 보였다. 김상혁은 과거엔 서구의 모던 록, 혹은 모던 록의 뿌리에 해당하는 음악을 재해석하고 있었으나 듣는 이의 입장에선 오래된 대중음악 혹은 묘한 그룹사운드 분위기를 풍겼다. 이러한 코스모스의 분위기는 기타가 아름다운 'Hanei Sky'를 뒤로 하고 앨범 전반에서 한층 강해졌다. 서구의 록과 현재의 흐름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워져 아예 '오리엔탈 보이'(2집 수록곡 제목) 선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자신에게 솔직한 음악을 들려준다. 달라진 것이다.

정우민을 대신하여 간간이 음성을 들려주며 조명숙이 부른 <까리아띠드>는 복고풍 가요의 숭고미에 비견될 만하다. 하나같이 '착한 목소리'였던 1990년 전후의 젊은 남성 가수들처럼 시대마다 유행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한 1970~1980년대의 고혹적인 여성 가수들과 매치될 법한 조명숙의 목소리에 노골적인 에코 효과까지 더해진다. 나름의 깊은 사연을 담았을 노랫말들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을 전화기 속으로 도로 집어넣으려는 듯한 체념과 상실의 정서를 그린다. 그러면서 <너무 늦어버렸나>처럼 뻔한 이야기와 감성을 멋지게 표현하는 것이 무언지 제대로 보여준다.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화제 된 다른 음악들, 이를테면 이 동네에서 어떤 합의점에 위치해 있는 '서울전자음악단'의 [Life Is Strange]만큼의 지지나, 일관된 흐름 속에서 발랄함과 진지함이 함께 호흡하는 '문샤이너스'의 [모험광백서]만큼의 다양함이나, 긴 동면에서 깨어난 '한음파'의 [독감]만큼의 록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다채로운 접근은 없다. 대신 코스모스는 1970년대의 유산과 1990년대의 실험 모두를 잊지 않았던 '노이즈가든'의 윤병주, 그리고 그의 또 다른 밴드 '로다운30'의 연주를 목발 삼아 저마다의 다양한 양분으로 하나의 나무를 가꾸어냈다.

사실상 세션들과 함께 한 김상혁의 솔로앨범에 가까운 [Hanei Sky]의 이 시대착오적인 보편성은 거의 모든 세대를 아우를 감성을 지녔다. 특히 '동물원' 시절 김창기의 재림이라고 호들갑 떨고픈 <낙엽>은 인상적이다. '어떤 날' 버전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 이후, 요일을 제목으로 한 가장 우울하고 아름다운 곡일 <화요일>이 막을 내릴 때까지 육성으로 부르는 아련함이 이어진다. 그간의 쉬어감 때문에 입지를 만들진 못했지만 쉬어감이 입지보다 가치가 있었다. 늘 그렇듯, 이렇게 과거와 미래가 현재 안에 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코스모스를 자기 식대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표현력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엇갈림의 묘미라 생각한다. 세상이 아이러니투성이인 건 논리적 사고, 의미화, 그리고 표현과 전달의 빈틈이 세상을 채우고 있어서다. 의사보다 똑똑한 환자들이 사는 세상에서 8년이라는 긴 단절과 오로지 두 군데에서만 판매 될 정도로 좁은 샛길을 걷는 [Hanei Sky]의 정박지는 외딴 섬과 같다. 하지만 거기엔 육지와 다른 풍경과 지붕 낮은 집들이 있다. 밤새 파도소리가 들리는 방이 배의 일부가 된 듯한 순간이 있다. 그런 감동이 있다.

육체의 시대에 만난, 이야기 하는 음악들

육체의 시대이다. 한 저명(低名)한 평론가의 괜한 말이니 심각할 건 없지만 소설 속의 노련한 탐정과 역사 속의 지적인 학자가 액션스타로 거듭나고, 아이돌 가수의 몸 자체가 콘텐츠가 되는 건 사실이다. 육체의 본능을 억누르고 사는 현대인은 책에서 영화로, 라디오에서 TV로 무대를 이동시킨 기술을 통하여 욕구를 발산하고 해소한다. 요즘 인기그룹들의 노랫말에 가득한 자기도취를 신세대의 자신감으로 본 기사가 있었지만, 정서적인 도피이거나 각자의 상품가치를 키우라는 자기계발서 붐이 이는 시장사회의 규범에 대한 순응이라 해야 더 그럴 듯해 보인다. '몸의 발견'이란 근사한 담론이 시장을 통과한 풍경이다.

덕분에 노래하며 잠들곤 했던 기억이 흐릿해진 시절, 노래하며 잠들곤 하는 습관이 없어지고 있는 시절에 루시드 폴과 코스모스는 조금씩 다른 자리에서 다른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건네며 노래한다. 그것은 햇볕 강한 길을 오래 걸은 보상으로 손목의 끈과 시계 아래에 생긴 흰 줄무늬와 같다. 그렇다면 어떤 무늬가 자기 손목에 어울릴까 공평하게 시험해보는 것도 좋겠다. 라디오를 켜면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봐야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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