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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력을 맥박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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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력을 맥박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요?!

[최내현의 '정력'] '정력'의 언어적 의미 고찰

지난 회 바로 가기☞ ' 한국 남성들은 왜 '김정일 정력제'에 열광했던가?

10년 쯤 전이다. 한때 고속도로 휴게소에 '정력 측정기'가 대거 등장한 적이 있다.

오락실 기계처럼 생긴, 500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관상이나 사주를 봐 준다는 기계를 독자 여러분들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계에 설치된 카메라를 응시하거나 생년월일을 입력하면 그 결과가 종이에 출력되어 나오는 기계 말이다.

정력 측정기도 비슷하게 생겼었다. 기계에 설치된 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맥박의 세기를 측정하여 그 사람의 정력 지수를 숫자로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기계에 따르면 - 실망스럽게도 - 필자의 정력은 그저 그랬다.)

재미 삼아 하는 것이니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을 테고, 필자가 주목했던 것은 그 오락 기계의 생김새였다. 휴게소 한 구석에 사람 키보다 더 큰 기계에 알록달록한 불빛이 반짝이며 음악이 나왔고, 그 위엔 큼지막하게 '정력 측정기'라는 글자가 떡하니 걸려 있었다. 그리고 잠재적 외국인 고객을 의식했는지 그 아래에 영어 번역도 있었다.

정력을 과연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까? 흔히 쓰는 'stamina'는 지속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니 딱 들어맞는 번역은 아니고, 'virility'라는 단어는 남자로서 씩씩하거나 생식력이 좋은 걸 의미하니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력남'은 근육질이거나 수컷 향기를 내뿜는, 요즘 소위 말하는 '짐승남'과는 개념이 다르다.

▲ 요즘은 심지어 '아이튠즈'에서 얼굴 인식 정력 측정기 앱도 다운받을 수 있다. (출처 http://www.apple.com/itunes/)

오락 기계가 선택한 단어는 'Sex Power'였다. 정력 측정기라는 한글 바로 아래에, 그보다 더 큰 크기로 'Sex Power'라는 영문이 현란하게 빛났다. 요즘엔 영어권에서도 섹스 파워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지만, 페미니즘 계열의 문헌에서 섹스 파워는 '성 권력'을 의미한다. 그러니 어찌 보면 정확한 번역이기도 했다. 남자들이 정력에 목매는 이유는 여자에 대한 과시욕, 소유욕, 정복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력'이라는 단어가 성적인 것만을 의미했다면 남녀노소가 다 이용하는 공공장소에 그런 기계가 공공연하게 나오진 못했을 것이다. 외국에서 온 사람이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가서 이만한 'Sex Power'라는 글자를 본다면 십중팔구 "한국인들은 의외로 성적으로 개방적이군"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앞 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력은 상당히 두루뭉술한 단어라서 공공장소에서 본다고 큰 저항감이 들지는 않는다. 만약 그 기계의 명칭이 정력측정기가 아니라 '발기력 측정기' 혹은 '당신의 사정 파워는?' 따위였다면 보는 순간 상당히 민망했겠지만 정력이란 단어에 대한 거부감은 덜하다.

동양의학의 분위기를 풍기는 '정력'은 곧 건강함의 정도를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 사람에게 정력 측정이란 성적인 능력을 포함한 온 몸의 건강 정도를 측정하는 의미를 가진다. 'Sex Power'는 그런 의미에서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번역이다.

일단은 '정력'이라는 단어의 뜻부터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정력은 상당히 애매모호한 단어임에도 (혹은 바로 그 이유 덕분에) 사회적으로 널리 쓰인다. 정력이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일단은 언어적 측면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정력은 남성에게 적용되는 단어다.

단순한 것부터 시작하자. 보통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여자를 두고 정력이 세니 약하니 말하지는 않는다. 성관계를 즐기고 자주 한다 해도 "밝힌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지 정력이 세다고 표현하지 않고, 반대의 경우도 "몸이 약해서 원하는 만큼 다 못 받아준다"고 하지 정력이 약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내숭, 혹은 잘난 척이라고 욕을 먹을 수는 있겠다.)

성적인 의미가 아닌 경우에도, 남자에게는 "정력적으로 일한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여자에게 그런 표현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정열적으로 일한다"라고 할 수는 있다.

이론적으로야 남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겠으나, 이렇듯 일상생활의 용례를 보면 '정력'은 남성에게 내재된 어떤 힘을 의미한다. 정(精)이라는 글자는 원래 쌀을 찧어서 껍질을 벗기고 깨끗하게 한다는 뜻, 혹은 근본이 되는 어떤 것이다. 정신(精神)은 인간에게 깃든 근원적 힘이며, 술의 근원도 주정(酒精)이다. 군대에서 핵심이 되는 특공대를 정병(精兵)이라 칭하기도 했다.

남자에게 정자(精子)와 정액(精液)이 있으니, 정력(精力)이 남자에게만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옛 말에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하지만, 정작 한자가 유래한 중국에는 정력이란 단어가 없다. 후에 더 자세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섹스가 '정력적'이지는 않다.

▲ '정력'이라는 단어는 공공장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내현
명사 뒤에 적(的)이라는 한자를 붙여서 뒤에 나올 말을 수식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에는 형용사형이라고 해서 형용사에 속하지만 우리 문법으로는 '관형사'라고 한다. 수적 우세, 전략적 성공, 기초적 상식, 우월적 지위, 체력적 한계 등이 다 이런 예이다. 심지어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마음적'이라는 묘한 말도 쓰인다.

'정력'은 성적인 의미가 아닐 경우에만 관형사형으로 쓰인다. "저 사람 참 정력적이다"라고 하면 에너지가 왕성해서 어떤 일을 지치지도 않고 참 열심히 한다는 그런 뜻이다.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이상희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을 가리켜 "정력적 아마추어"라고 한 적이 있다. 즉 일에 대한 정열은 강한데 아직 미숙하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우리가 '정력적'이라고 할 때에 성적인 의미를 떠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거나, 설사 그렇게 쓴다 하더라도 어색하게 느낀다. 정력적 발기? 정력적 밤? 정력적 충만? 정력적 애무? 다 이상하다.

즉 남성의 성적 능력인 정력은 다른 명사를 꾸미는 용도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력은 수단이 아니라 결과물, 혹은 목적지이다. 이는 다음 사항과도 직결된다.

* 정력은 '길러지지' 않는다.

"이 정도 산에도 못 올라가면 어떡해?"
"저질 체력이라 미안해. 다음에 체력을 길러서 다시 올게."


체력은 기를 수 있다. 조깅을 하거나 헬스장에서 근육을 키우거나 하면 체력이 길러진다. 스피치 교육을 받으면 언술을 기를 수 있고, 면도를 하지 않으면 수염을 기를 수 있으며, 물을 열심히 주면 꽃을 기를 수 있고,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공부를 하루 한 시간씩 더 해서 실력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사정해 버리면 어떡해?"
"미안해. 다음에 정력을 길러올 테니까 다시 한 번 하자."


이런 말은 없다. 물론 하체 근육 운동을 열심히 해서 발기력이 향상될 수는 있고, 좋은 공기 마시고 몸에 좋은 것을 먹고 살을 빼서 성욕이 커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다른 활동에 따라 결과적으로 정력이 증진된 것이지, 정력을 직접적으로 기를 수는 없다.

뼈도 근육도 없는 나의 음경이 나의 훈련이나 의지에 따라 제어되지 않는 것처럼, 정력 또한 마찬가지다. 다리가 짧다고 운동을 통해 다리 길이를 늘일 수 없는 것처럼, 정력 또한 어느 정도의 가감은 가능해도 원천적으로 바꾸는 것은 어렵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내 다리는 나의 소유물이지만 다리 길이는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정(靜)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력은 나의 소유물이라기보다는 주어진 것이다. 스트레칭과 요가와 물구나무서기와 자세 교정을 통해 조금은 (일시적으로) 키가 커질 수 있지만 원천적으로 바꾸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정력도 비슷하다.

말라깽이 약골이 엄청난 트레이닝으로 근육남이 될 수 있지만, 즉 근육과 몸매는 나의 소유물이지만, 정력은 내 맘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없다. 나의 일부이긴 해도 엄밀한 의미에서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그놈에게 뱀도 먹이고 개구리도 먹이고 하는 것이다.

▲ 애꿎은 뱀과 개구리가 '정력'에 희생된다. ⓒ환경부

* 정력은 질이 아니라 양이다.

"저 아저씨는 정력이 진짜 강해."
"요즘 정력이 약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야."


정력과 붙어 나오는 술어는 대개는 강하거나 약하다는 것이다.

"저 친구는 정력의 질이 아주 나빠" 이런 건 없다. 즉 좋은 정력, 나쁜 정력이 있다기보다는 강하고 약한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정력은 양의 개념이고, 그 정력을 난잡하게 쓰는지 건전하게 쓰는지는 개개인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이번 회는 일단 여기서 줄일까 한다. '정력'이란 어차피 의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용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인 만큼, 일상생활에서 쓰는 언어를 기반으로 보자면 1) 남자에게 적용되는 단어로 2) 양의 많고 적음으로 이야기되고 3) 자기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고 4) 선천적으로 혹은 다른 활동에 따라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5) 나와 독립된 어떤 힘, 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정력이란 어떤 힘을 가리키는 것인지, 다음 회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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