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시민사회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현대 시민사회는 얼마만큼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인가? 현대 시민사회는 야만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을 초래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학교에서 현대 시민사회는 역사적으로 가장 진보된 사회로, 노예나 농노와 같은 신분적 차별과 억압이 철폐되어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민주 사회로, 힘겨운 노동과 경제적인 빈곤으로부터 벗어나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배워왔다. 과연 현대 시민사회는 과거보다 더 나은 사회인가?
만일 이 물음에 답을 찾고 싶다면, <계몽의 변증법>(막스 호르크하이머·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김유동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우리는 현대 시민사회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던 환상으로부터 깨어나게 될 것이다.
▲ <계몽의 변증법>(막스 호르크하이머·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김유동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그러나 너무나 충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가장 비참했던 세기는 다름 아니라 20세기였다. 20세기 전반기에 인류는 역사상 전대미문의 두 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이 전쟁에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술과 경제적 생산력의 경이적인 발전 속에서 도리어 현대의 대중들은 경제 대공황 속에서 극심한 굶주림을 견뎌내야 했다.
나치즘이 등장하여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강제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거기에 더해 한국도 포함하여 제3세계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은 현실을 비관하는 염세주의적이고 비관주의적인 풍조를 연출시켰다.
한국에서 이런 염세주의를 상징하는 가요가 한국 근대 가요의 효시라 할 윤심덕의 '사의 찬미'라 할 수 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이란 첫 가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곡은 인생이 살 만한 의미가 없는 것으로 그래서 사는 것보다 죽음이 더 나은 것으로 노래하고 있다.
<글루미 선데이>란 영화에서도 나치 치하 헝가리에서의 삶의 피폐함이 영상화되고 있다. 견딜 수 없는 나치 치하에서 '글루미 선데이'란 노래에 취한 사람들이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20세기 전반기의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 연결되어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나은 사회라고 믿어왔던 현대 시민사회에서 어떻게 이렇게 비극적이고 야만적인 상황이 초래될 수 있었는가? <계몽의 변증법>은 이 현대적 야만 상태가 어떻게 초래되었는지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깊은 철학적 고민이 담겨있는 책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계몽의 변증법>은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추구한다. 현대 시민사회는 애초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20세기 전반기에 들어와 도리어 역사에 유례없는 야만적 상황들을 초래하였다. 그 원인을 아도르노는 계몽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해버린 데에서 찾는다. 다시 설명하자면 현대 시민사회가 부의 증대, 경제 성장을 지상목표로 추구하는 길만을 질주해 온 데서 찾는다.
사이렌 신화와 도구적 합리성의 양가성
아도르노는 경제적 도구적 합리성에만 매몰되어온 현대 시민사회의 성격을 그리스 신화 <오디세이>의 열두 번째 사이렌의 이야기를 통해 서사화하고 있다.
사이렌은 물살 빠른 협곡 위에서 사람을 도취하게 만드는 황홀한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이 협곡을 지나는 어느 누구도 이 사이렌의 노래를 들어서는 안 된다. 사이렌의 노래에 취하여 노 젓기를 멈추게 되면 물살 빠른 협곡에서 배가 난파하여 모두가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서 밀랍으로 귀를 막은 채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어 이 협곡을 빠져나간다.
여기에서 노를 젓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현대의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동을 해야 한다. 사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충만한 행복을 향유할 여유를 포기해야 한다. 자기 보존을 위해 인간으로서의 충만한 행복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 사이렌의 신화를 통해 아도르노는 현대 시민사회의 근원적 한계를 보여주려고 한다.
현대 시민사회에서 진정한 인간적 삶의 실현은 봉쇄되어 있다. 현대 시민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경제적 생산의 증대를 위해 노를 젓고 또 저어야 할 뿐이다. 현대 시민사회는 진정한 인간적 삶이 피폐화되는 야만적 상태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 시민사회에서 야만적 상태가 초래될 수밖에 없는 내적 원리를 아도르노는 도구적 합리성에서 찾는다. 경제적 부의 증대를 위해 현대 시민사회에서 강화되어 가는 도구적 합리성은 그에 대한 대가로 사회와 인간적 삶의 피폐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양가성을 갖고 있다.
도구적 합리성의 강화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환경 파괴를 초래하고, 인간을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생산 노예로 전락시키고, 사회를 관료주의적 전체주의 체제로 변질시켜 간다. 이러한 도구적 합리성의 강화가 바로 20세기 전반기 현대적 야만 상태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동일성 원리 비판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현대 시민사회에 대한 철학적 비판은 "동일성 원리(das Identitätsprinzip)"의 비판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동일성 원리의 비판은 아도르노의 철학 사상에서 핵심일 뿐만 아니라, 탈현대주의의 "차이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철학적 사회 비판의 핵심 주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동일성 원리는 주체가 객체, 즉 자연과 사회 내에서 주체 자신과 다른 것들을 자기 자신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원리이다. 아도르노는 이 동일성 원리를 주체가 객체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는 지배 원리로 해석하고 있다. 아도르노의 주장에 의하면 주체가 객체를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주체의 특정한 형식을 객체에 부과하여, 객체로 하여금 이 주관적 형식에 따르도록 강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때 객체는 주체가 부과하는 형식으로 환원되면서 객체 자체의 고유한 성격이 희생된다. 이렇기 때문에 아도르노에 의하면 동일성 원리는 객체로부터 객체 자체의 고유성을 억압하면서 객체를 주체의 형식에 복종시키는 지배의 원리이다. 동일성 원리는 사물의 즉자성을 파괴하고 그것을 인간을 위한 사물로 만드는 것이다.
"계몽이 사물들과 갖는 관계는 독재자들이 인간들과 갖는 관계와 같다. 독재자는 인간들을 조종할 수 있는 만큼 인간들을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가 사물들을 조종할 수 있는 만큼 사물들을 안다. 이를 통해 그 자체로서의 사물은 인간을 위한 사물이 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서구 문명의 역사적 발전 과정은 동일성 원리의 전반적인 확산 과정이다. 이는 진보와 해방을 추구해온 역사적 발전 과정이 또한 지배가 보편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이기도 하였음을 의미한다. 계몽은 인간을 주인으로 세우고 자연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실제의 역사적 진보는 자연에 대한 지배가 심화되는 과정이었다.
수학과 자연과학의 자연에 대한 연구, 즉 "사물의 본성과 인간 오성의 행복한 결혼은 가부장적인 것이다." 근대과학은 자연 그 자체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지를 추구하는 인간이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이라는 척도를 자연에 부과하여 강제적으로 자연으로 하여금 이 척도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현대 시민사회는 동일성 원리가 작동되는 전형적인 사회적 모델이다. 현대 시민사회는 상품 교환사회이다. 교환될 상품들은 서로 질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상품들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서로 동일한 것으로 환원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상품들의 생산에 소요된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추상적인 교환가치이다. 추상적인 교환가치가 상품들을 서로 동일한 것으로 교환 가능하게 한다. 상품 교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따라서 동일성 원리이다. 동일성 원리에서 사물의 차이와 다양성이 배제되듯이, 상품 교환에서도 마찬가지로 상품들 간의 질적 차이는 무시된다.
상품 교환사회로서 시민사회는 모든 것이 교환을 위한 양적 가치로 환원되며, 그것들의 특수한 질들은 무시되는 사회이다. 심지어 인간마저도 개별적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상품적 가치로서만 취급되면서, 동일화, 즉 획일화가 강요된다.
<계몽의 변증법>과 지구화 시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 중의 하나"라는 하버마스의 평처럼 <계몽의 변증법>은 오싹한 마음이 들 정도로 현대 시민사회에 대해 어두운 철학적 진단을 내리고 있다. 이 어두운 진단을 피하고 싶겠지만 모든 철학 사상이 자기 시대의 정신적 표현이듯이, <계몽의 변증법>은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20세기 전반기 야만적 상태를 철학적으로 개념화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계몽의 변증법>의 철학적 진단이 20세기 전반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계몽의 변증법>은 20세기 전반기의 야만적 상태가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현대의 도구적 합리화 과정에 내재해 있는 본질적인 경향의 발현이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따라서 현대의 이 경향이 연속적으로 지속되는 한, 언제든 그 야만적 상태는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계몽의 변증법>의 분석으로부터 물음은 당연히 오늘날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지구화 시대의 한복판에 있는 오늘날의 현대 시민사회에 또 다시 새로운 야만이 초래되고 있지는 않는가? 바로 이 물음 때문에 오늘날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 현대 시민사회는 복지 자본주의 시대로 옮겨가면서 20세기 전반기의 야만적 상황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도구적 합리성의 맹목성에 어느 정도 고삐가 조여진 것 같았던 이 복지 자본주의 시대는 짧은 단막극으로 막을 내려버렸다.
1980년대 지구적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또 다시 현대 시민사회는 새로운 야만적 상태로 치닫고 있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절대적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고, 서구 사회 내부에서도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고 있고, 경제적 위기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계속 증폭되어가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더 큰 기상 이변을 초래하면서 생태 위기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만 가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겪은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다시 현대적 야만의 그림자가 더 짙어져 가고 있다. 과연 이 문명적 파국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은 불가능한 것인가? 21세기의 철학적 사유는 <계몽의 변증법>의 철학적 경종에 다시 귀를 기울이고, 20세기 전반기의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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