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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없는 이별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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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없는 이별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

[親Book] 김형경의 <좋은 이별>

역시 현장에서 들으면 새삼스러워지는 법이다. 이번 휴가 때 정선에 있는 한 휴양림에 갔다 피톤치드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숲이 우거진 곳을 거닐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피톤치드 덕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럼에도 서울 생활 청산하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생활하고 싶어 6개월간 숲 공부를 했다는 이력을 밝힌 숲 해설가의 설명은 귀에 쏙 들어왔다. 열심히 공부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백과사전을 참고로 했다는 것을 알았다.

피톤치드는 식물을 공격하는 해로운 것들, 그러니까 병원균, 해충, 곰팡이를 쫓아내려고 식물이 내뿜는 물질이다. 그야말로 백과사전식 해설이다. 그런데 숲 해설가는 여기에 구체적 실례를 덧붙여 이해를 도왔다. 잔디를 깎고 나면 풀 냄새가 확 나잖아요. 그게 바로 피톤치드에요. 자기를 해치는 균이 들어 올까봐 어떤 물질을 내뿜는 것인데, 그게 사람한테 좋은 것이지요, 라는 식이었다. 자기 치유의 몸부림이었는데, 그것이 다른 뭇 생명에도 도움이 되는 것. 피톤치드에 스며있는 이 묘한 분위기가 마음에 남았다.

▲ <좋은 이별>(김형경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김형경의 <좋은 이별>(푸른숲 펴냄)을 읽다 아, 하며 무릎을 쳤다. 김형경이 꼭 그러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푸른숲 펴냄)이나 <사람풍경>(예담 펴냄)은 자신의 정신적 내상을 치유하기 위한 지독한 몸부림을 담았다. 그 상처가 어찌나 컸던지 그이는 의식의 지층을 파내려가 무의식이라는 마그마 덩어리를 만났다.

어떤 이는 그것이 너무도 지독하여 숨기고 싶은 더러운 욕망의 덩어리라 말한다. 다른 이는 그것이 유년 시절 받았던 깊은 마음의 상처라 본다. 김형경은 후자 쪽이다. 기억의 저편에 아스라이 사라져버렸다고 여겼던 것들이 다 자란 우리의 정신을 휘어잡고 있다. 그러니, 내 안에는 제 상처를 혀로 핥고 있는 유년의 내가 있는 것이니, 이를 직시하지 않고는 지금, 이곳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다. 작가의 운명이 본디 그러할진대, 자신의 상처를 까발렸고 그래서 치유해나갔으며 이를 글로 써 놓았다. 그 덕에 읽는 이들은 자기의 상처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서서히 상처를 보듬어 간다.

이번에는 이별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심리적 문제들은 사랑을 잃은 이후 맞이하는 상실의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발생"한다고 본다. 이 책을 함께 읽어보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젊은 축에 드는 이들은 대체로 이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별과 배신을 구분하지 못했고, 이별 때문에 지독하게 고통을 겪은 적도 없는 듯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일종의 방어 기제일 가능성이 크다. 이별을 주제로, 그리고 그것이 마음이나 몸의 병으로 나타났던 적이 있다고 흔쾌히 말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젊은 시절에 "생을 그르치게 하는 문제와 맞닥뜨릴 때 그 문제의 핵심에는 늘 제대로 해결하지도 떠나보내지도 못한 과거의 상처가 존재한다"는 정신분석학의 대전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지만 삶의 지층이 두터운 이들은 달랐다. 이 책이 방아쇠를 당긴 이도 있었다. 주변 사람이 더 걱정하고 염려했던 이별을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하거나 잊어버렸는데, 갑자기 생각났고 그것이 큰 상처였음을 인정했다. 무의식의 힘은 정말, 세다. 그 말을 마치고 나서 그이는 울었다. 더 울도록 했어야 할까.

공개적인 자리라 나는 화제를 돌려 그이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분산시키려고 했다. 잘 한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믿는 것은 있다. 아마도 그이가 어디선가 더 깊고 긴 울음을 울었으리라는 것. 그래서 애도의 시간을 보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상실이나 결핍이 모든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라면 애도는 그 문제에 대한 본질적 해결책"이라는 구절에서 큰 위로를 얻었으리라고.

전작보다 이 책은 읽어나가기가 쉬웠다. 김형경의 개인사가 그리 도드라지지 않아서다. 그만큼 고통의 전이 현상이 적었다는 말이다. 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사별이 준 심리적 충격과 이를 수용하기까지 걸렸던 갈등과 방황이 나왔을 뿐이다. 주로 문학 작품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한결 숨을 고르며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아무래도 전작에서 느꼈던 흡인력은 다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유의 평가가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문제는 이 책을 읽으며 발견한 나의 민얼굴이었다.

살아오면서 어찌 이별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내 무의식은 이별에 대해 입을 앙다물고 있다. 상처가 되거나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 이별은 없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이다. 시쳇말로 하면 '생 까고' 있는 셈이다. 나는 스스로 이런 상황이 문제라고 여겼다. 얼마나 두려우면 없는 듯 위장하고 있을까. 내가 충분히 애도했다면 이러지는 않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그렇다면, 앓아야만 비로소 인정할 것인가? 그럴 모양이다. 사람이란 참으로 미련한 동물인지라, 아파야 아는 경우가 많다.

밑줄 친 부분을 곱씹어 보다 문뜩, 가장 좋은 이별을 한 이는 장자가 아닌가 싶었다. <장자> '지락'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혜자가 문상을 갔다. 가서 본 장면이 가관이다. 장자가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너무하지 않느냐고 통박하자 장자가 특유의 철학론을 떠벌인 다음,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 있소. 그런데 내가 소리를 질러 따라 울고불고 한다면 나는 하늘의 운명을 모르는 거라 생각되어 곡을 그쳤단 말이오"라고 일갈한다.

이 대목을 보면 장자는 처음에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여 애도한 것이 분명하다. 인용한 부분보다 앞에 있는 구절을 볼라치면 "아내가 죽은 애초에는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소"라 말했으니, 충분히 설득력 있는 말일 터. 그런데 애도의 기간을 보내다 (일반인보다 그 시간이 짧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 깊은 철학적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이 과정은 이별과 애도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한 단계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김형경의 아래 같은 말을 다시 보게 한다.

"애도 작업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상 없이도 살아갈 수 있고, 혼자 힘으로도 잘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신감과 자율성이 강화된다. 그리하여 애도 작업이 끝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한결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생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며 새로운 자기, 새로운 비전, 새로운 생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과연 장자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애도하기는커녕 이별의 아픔을 숨기기에 급급한 상황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역시, 진정한 삶은 무의식이라는 우물 깊은 곳에 비친 자기 얼굴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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