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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한다, 비판한다, 이것이 연극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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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한다, 비판한다, 이것이 연극의 역할이다"

[김상수 칼럼]<40> '베를린 민중극장' 프랭크 카스토르프 극장장과의 만남

통일 20년,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는 연극예술

올해가 독일통일 20년째다. 독일 분단 50년의 시간은 독일의 지리적 단절과 동·서독 주민들의 의식까지 변화시켰다. 하나의 국가로 통일은 되었지만 심리적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긴 분단의 세월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오늘 독일의 저력이란, 국가나 정부가 그리고 동·서독 주민들 간에 사회적 통합을 최우선의 가치로 받아들이면서 통합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통일 직후 동·서독 주민들이 서로를 얕잡아보고 낮추어 부르던 경멸스런 호칭인 '오시(Ossi)'나 '베시(Wessi)' 라는 말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계층 간, 지역 간, 갈등을 부추기고 이용하면서 사회적 통합을 해치는 것을 '정치'라고 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다 못해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이렇듯 사회적 문제를 감추고 외면하고 대강 '땜질'로 마감하려드는 모습이 아닌, 문제를 드러내고 밝혀서 이성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통일독일 국가의 면모는 오늘에 닥쳐진 유럽경제의 어려움에서도 유독 독일만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덜 겪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통합의 가치란 사회 구성 조건의 가장 기본의 요소임을 새삼 알아차리게 된다.

특히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는 통합의 노력으로 문화 예술 영역을 통해 동·서독 주민들 간에 그동안의 단절로 인한 편견과 오해를 서로 불식시키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노력들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이고 있음을 여기 베를린에서 나는 볼 수 있다. 여기 통일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의 동·서 베를린의 통합에서 독일 통일의 완성의 과정을 적극적으로 고찰할 수 있으며 분단 시대의 행정수도였던 본(Bonn)에 있었던 행정부와 독일 연방의회가 1999년부터 베를린으로 옮겨오면서 이제 베를린은 독일통일 현실의 압축 장이자 독일 국민들의 정서적인 통합까지 마치 줌 렌즈로 압축해서 체험하고 형상화하는 장소가 됐다.

동유럽과 서유럽의 지리적 중심점에서 이제 베를린은 본격적으로 유럽의 예술 문화 정치의 수도로 서서히 자리매김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유럽 최고의 연극 예술도시인 베를린이야말로 통일독일의 문제에 능동적으로 연극 예술이 대응하면서 아울러 유럽 연극 예술계에 새로운 리드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중심에 있는 베를린 시립극단인 '베를린 민중극장(Volks Bonhe)'의 역할에 나는 당연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베를린 민중극장'의 시작은 100년도 더 이전인 1890년 베를린에서 조직된 '자유 민중무대(Freie Volksbühne)' 라는 노동자 중심의 연극 단체가 그 출발이었다. 그 설립 목적은 문화영역에서 유산계급만의 문화적 영향력이 절대 독점적인 현실을 여하히 극복하면서 노동자 계층도 예술 문화적 교양을 쌓아 계층적인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헨릭 입센(Henrik Ibsen:1828-1906)의 '사회의 기둥(Stützen der Gesell- schaft)'이란 작품으로 활동을 시작한 '민중극장'은 동독 체제 시대 때는 예술문화를 체제유지의 선전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동독 정권에 저항하면서 부패한 동독 체제에 의해 여지없이 망가진 사회주의를 민주주의와 사회개혁, 그리고 사회정의로 회복시키려는 방책으로 연극예술을 의식, 사회체제에 비판적인 작가였던 페터 학스(Peter Hacks),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 그리고 크리스토프 하인(Christoph Hein)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을 했지만 동독의 사회체제에서 이들 예술가들의 활동은 당국의 방해와 압박, 감시로 한계를 지닐 수밖엔 없었다. 1989년 11월, 동독체제에 대한 저항과 시위에 내면적인 견인 역할을 '민중극장'은 했지만 독일통일 이후 1992년까지만 해도 동 베를린에 위치한 이 '민중극장'은 처치 곤란한 '죽은 극장'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민중극장'이 다시 제대로의 극장으로 살아난 것은 1992년 동독출신의 연출가 '프랭크 카스토르프(Frank Castorf)'가 통일 이후 극장장(Intendant)으로 부임하면서 불과 3년 만인 1994년에는 독일 전체 극장 중 최고의 극장으로 선정되었고 독일의 대표적인 연극상인 '코르트너 (Kortner)' 연극상을 수상하면서 극장은 단연 활기를 다시 찾았다.


1951년 동베를린 태생의 연극 연출가인 '프랭크 카스토르프'가 이 극장의 극장장이 되기까지에는 이 '민중극장'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베를린 지식사회에 많은 논란이 있었고 동독 출신의 연출가를 새로운 통일 수도 베를린 시립의 극장장으로 임명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내홍(內訌)은 있었다.

'베를린 민중극장'의 극장장 '프랭크 카스토르프'를 만난 2월 12일 오후(현지시각), 베를린에는 갑작스런 폭설이 내렸다. 대담은 '민중극장'의 극장장실에서 이뤄졌으며 통역을 도와준 이수은 씨는 베를린 연극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무대 미술가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이다. (필자)


연극 무대는 인간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인식의 장(場)

김상수 - 만나서 반갑다. 나는 베를린에 13년 만에 다시 왔다. 1995년 파리에서 첫 미술 전시를 끝내고 딱 이틀간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당시 독일의 수도인 본((Bonn)으로 떠났다. 당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너머 옛 동독지역은 거대한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13년 만에 다시 와보니, 고급 쇼핑가가 즐비하고 옛 동독지역은 거대한 빌딩들이 꽉 찼다. 독일통일 20년, 베를린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베를린 옛 동독지역 태생인 당신에게 있어서 '베를린의 현실'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카스토르프 - 베를린은 내 고향이고 장벽이 있었고 장벽을 사이에 두고 뜨겁고 차가웠다. 1989년 역동적인 일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동베를린 지역과 서베를린 지역은 독일의 지식인들이 대거 모인 집결지였다. 동베를린에는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 1929-1996), 서베를린에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1947- ), 이기 팝(Iggy Pop 1947- )등의 전위 예술가들이 있었다. 동베를린의 동독사람들은 몸은 비록 동독지역에 있었지만 정신은 서독의 자유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보까지 차단 당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현재, 베를린의 도시가 변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므로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지금 베를린은 너무 미국화가 빠르게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 큰 문제다. 예전의 뜨겁고 차던 성질이 한 통속으로, 자본주의 위주의 것으로만 변한 것이다. 개구리를 예로 들자. 차가운 물에 개구리를 넣고 물을 끓이면 물이 서서히 끓기 때문에 개구리는 물이 뜨거운 줄 모르고 계속 물 속에 머무르다 그냥 죽는다. 지금의 베를린이 꼭 그런 상황인 것 같다.

▲ 베를린 민중극장 ⓒ김상수

김상수 - 전지구가 구석구석 자본의 그물망에 갇혔다. 인간은 이제 자본의 노예가 아니고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동·서 분단 지역이었던 베를린은 그런 극명함이 일시에 드러난 장소 같다.

카스토르프 - 이를테면 동독사람은 책임을 남에게 지웠다. 서독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운다. 동독사람들은 일을 하는 척하면 됐지만 서독사람들은 진짜로 일을 해야만 한다. 동독은 사회가 핑계거리가 됐다. 그리고 동독은 국가가 아버지처럼 이걸 해라 저걸 해라 간섭을 했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대학을 갈 수 있었고, 운동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운동선수로 계속 자질을 키울 수 있었다. 최소한의 어떤 보호체제는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의 자율성에는 반한다. 그런 동독은 바로 아버지의 사회였다. 모든 것이 체계화 되어있었고 조직화 되어있었다. 서독과 통일이 되면서 동독 지역은 대도시 이외에 거의 모든 소도시의 공동체집단은 다 소멸되어버렸다. 교회가 사라졌고 극장도 사라졌다. 우리는 모두가 로비스트가 되어야만했다. 중산층은 스스로 로비를 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하지만 3분의 1가량 되는 동독의 소시민들은 아무런 혜택이나 보호를 받지 않은 채 내버려졌다. 이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금 베를린은 마치 질퍽한 늪과도 같다. 분노의 에너지가 필요한 곳이 바로 베를린이다.

김상수 - '베를린 민중극장'이 있는 이 장소는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이 가까이에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의 죽음은 한 때의 동지가 집권한 제2의 조국인 독일에서 군인의 개머리판에 이마를 찢기고 확인사살을 당하고 여기 가까이에 있는 베를린의 운하에 내던져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그녀의 죽음을 이렇게 노래했다. '붉은 로자가 사라졌다. 그녀의 몸이 쉬는 곳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다. 부자들은 그녀를 싫어했고 처형했다.' 역사적인 이 자리에 있는 '베를린 민중극장'은 정말 민중을 위해 '복무'하는가? 동독체제 시대 때의 그런 '복무' 말고 말이다.

카스토르프 - 동독의 시대 때도 우리는 연극으로 체제에 굴복하지 않는 법을 말했다. 감시와 협박이 일상사였고 간섭과 강제가 있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연극을 통해 말했다. 한계는 있었다. 그러나 끝내는 절망하지 않았다. 통일 이후 우리 극장은 시민들의 깨어난 정신과 같이 하고자 노력했다. 그 '복무'는 때때로 자극적이고 공격적일 때도 있다.

김상수 - 통일 이후 동·서베를린에 있는 극장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동 베를린 지역에 있는 '민중극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그 운영주체를 누구로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들었다. 이때 베를린 소재 극장의 구조조정에 참여했던 연극인이며 베를린 시 상원의원인 이반 나겔(Ivan Nagel)이 당신을 극장장으로 추천하면서 그 추천서에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에 있는 '민중극장'을 옛 동독의 연극 사회에 핵심인 젊은 동독의 연극인들에게 넘길 것을 제안한다, 이들은 지금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연극을 만들기를 원하고 있다. 삼 년째 되는 해가 되면 이 연극 팀은 유명해져있거나 아니면 망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라고 추천서에 썼다.

▲ 베를린 민중극장의 프랭크 카스토르프 극장장 ⓒ김상수

카스토르프 - 논란까진 아니었다. 다만 그의 제안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이 '민중극장'을 살리기 위해서는 옛 동독의 연극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고 또 한 가지 의미는 옛 동독의 지식인들이 희망했던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정신을 지키려했던 동독 지식인들의 노력을 사회발전의 양식으로 통일독일에서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는 1992년 당시에 서독 지역에 있는 도이치 극단(Deutsches Theater)의 상임연출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꼭 여기 '민중극장'에 극장장이 되어야 하겠다는 욕심 같은 건 없었다. 92년도 당시의 '민중극장' 극장 상황은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그런 형편이었다. 1920년대의 피스카토르(Erwin Piscator), 70년대의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가 일하던 좋은 상황도 '민중극장'에는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극장운영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내가 극장장으로 들어올 때가 바로 그런 때였다. 나는 극장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논란의 와중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동독시절에 국가가 내 작품을 자꾸 금지시키면서 나는 이름을 날렸다. 나는 나 자신이 특별한 것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잦은 정부개입은 소문이 되어 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자연스럽게 유명해졌다. 연극이 정치가 돼버린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내 자신이 하고 있는 연극에 대해 겁을 먹는 걸 싫어한다. 예술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표현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김상수 - 극장장이 되고나서 부담이 컸겠다. 전통 있는 극장이었지만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분위기였을 텐데. 그 이후 극장을 어떻게 이끌었는가.

카스트로프 - 아까도 얘기했지만 동독사람은 책임을 남에게 지운다. 서독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운다. 그래서 서독사람들은 쉽게 정신병에 잘 걸린다. 나는 동독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못한 것에 대해 그렇게 고민하거나 하지 않는다. 좋은 장점 같다.(웃음)

항상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서 연극은 예외적인 상황을 돌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놀라게 하고, 경악하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은 현장예술인 연극이 취할 수 있는 장점이다. 즉시, 바로, 동시에, 웃음을 유발시킨다든지, 이런 것은 연극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회에서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연극 안에서는 내가 해보고 싶은 대로 하면서 제대로 인간들에게 뭔가를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사회의 변화에 지친 시민들이 조용한 연극을 보고자 원할 것이다, 라고 스스로 지레짐작하면서 일러스트적인 연극을 한다면 그것이 이미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연극 무대란 인간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인식의 장(場)이 아닌가. 따라서 나는 연극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과감하고 겁을 내지 않는다.

나는 정당성이 없는 권력이 펼치는 거짓들을 찢어발긴다.

김상수 - 나도 연극을 극작하고 연출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주하지는 못한다. 제작비를 만드는 현실이 어렵다. 그래서 국립극장이라든지 공공의 예술기구들이 해야 하는 역할들이 중요하다. 특정 개인이 계속해서 막대한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10년 전인 1999년에 나는 한국의 문화부로부터 의뢰를 받아 한국의 국립극장을 개혁하는 프로젝트 작업을 했다.(국립중앙극장은 국민의, 국립극장으로,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 http://www.kimsangsoo.com/extra/think_national_theater.html) 그 때 나는 새로운 국립극장장은 '연극은 시대의 정신과 눈이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시대를 반영할 뿐 아니라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연극을 만들 수 있는 제반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개혁적이고 신뢰할만한 사람이 극장장을 맡기를 원했으며 어느 한 사람에게 개혁 프로젝트 폐이퍼를 나는 넘겼고 그가 극장장이 됐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했다. 예술가가 관료보다 더 관료화되는 걸 목격했다. 눈에 뜨이고 잘 보이는 그럴듯한 성과에만 집착했다. 연극을 잘 만드는 것보다는 성과를 부풀려 보도 자료를 만들어 뿌렸다. 그리고 출세의 길을 향해 달렸다. 그는 민중을 얘기했지만 그건 자기 삶의 방편으로 민중이라는 수사가 동원된 것일 뿐이었다.

▲ 프랭크 카스토르프 극장장 ⓒ김상수

카스토르프 - 이해가 된다. 가장 경계해야할 대목이다. 사실 연극이란, 그리고 극장의 경영이란 내적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업적이 아니다. 또 중요한 사실은 연극이란 외적으로는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행위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하고 그것에서 끝난다.

김상수 - 당신은 독일의 대표적인 연출가로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극장경영과 작품 선정을 총책임지는 예술 감독이기도 하고 극장장이기도 하다. 극장의 경영과 예술가로 연출가로 자신의 역할이 상호 충돌되거나 배반적인 때는 없었는가? 그로 인한 갈등 말이다.

카스토르프 - 경영을 책임지는 극장장이지만 나는 내가 연극으로 시도하고자 했던 것들을 극장 경영의 가장 중심에 두었다. 독일의 연극사를 보자면 1920년대 유명한 극장들이 하나같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극장경영의 어려움을 이유로 작품을 적당히 관객과 타협하는 수준에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로 나는 독재자다. 그리고 나는 극장장과 경영을 어느 정도의 선에서 분리시켰다. 스탈린이 소련체제의 하나의 상징이 되었던 것처럼 나 자신도 이 극장에서는 하나의 상징이다. 나는 극장의 운영자 회의 때 절대 참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극장운영을 맡은 사람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어떤 방향으로 극장을 끌고 가려고 하는지를 그들은 익히 잘 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내가 만들려고 하는 연극을 많은 관객들이 접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나는 운영권을 완전히 넘겨줘버렸다. 더 이상 나는 경영을 맡은 이들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처지로 내 스스로 만들어버렸다.

김상수 - 1992년에 극장장이 되고나서 맨 처음에 역점을 둔 사실들은 무엇인가?

카스토르프 - 1992년도에 극장장이 되고 나서 나는 아마존의 공기를 받아들이겠다, 유럽의 문화뿐만이 아니라 완전한 타국의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즉, 국제화를 시도했다. 브라질 극단까지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는 동독 체험에 의존해서 연극을 만든다는 점을 수긍하고 인정했다. 비난도 공격도 받아들였다. 여기 '민중극장'은 쫓겨난 자들과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을 위한 따뜻한 장소여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그리고 여기 베를린이야말로 반쪽 독일이 인공적으로 접합되어있는 모습을 가장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이, 옛 동독 시절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화되어있다고 느낀다. 이런 시대에 연극은 고상한 오락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에 끌려들어가는 현상으로 전락하는 걸 나는 방지하고 싶었다. 차라리 나는 분리주의자적인 '동쪽의 극장'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연극예술을 통해 우리가 자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왔던 방식의 역사에서 무엇이 거짓이었고 무엇이 진정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려 했다.

김상수 - 1994년 독일의 연극 전문지인 '오늘의 연극(Theater Heute)'지가 수여하는 '코르트너(Kortner) 연극상'을 수상하면서 '민중극장'은 좌표를 찾았다는 얘기들을 한다. 극장을 맡고 짧은 기간에 어떻게 그런 성공으로 이끌 수가 있었는가?

카스토르프 - 인간과 인간사회의 진실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이 물음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았다. 통일 이전이나 통일 이후나 나는 낡고 고루한 전통주의는 거부했다. 반인간의 관습도 거부했고 정당성이 없는 권력이 펼치는 거짓들을 고발하고 비판했다. 특히 통일 이후에 독일이 자본의, 돈만의 속성에, 찌들어가는 현실에 있는 인간의 질곡을 그리고자 했다. 나는 무대 위에서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찢어발기면서 인간과 인간사회의 진실성이 보다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보여주려 했다.

인간의 연대를 믿는 예술로 연극예술

김상수 - 당신의 작품은 자주 격렬한 찬반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고 들었다. 심지어 '고전의 학대(Mißhandlung der Klassiker)' 라는 말까지 듣는 것으로 알고 있다.

카스토르프 - 여기 이 극장은 '민중극장'이다. 민중극장은 독일이나 베를린에 다른 극장들과 구별되는 문화사적 입장을 지니고 있다. 간단한 명제다. 민중들에게 보다 가까이, 보다 열려있는 극장으로서 '예술을 민중에게(Die Kunst dem Volke)'라는, 이름 그대로 '민중'의 극장이다. 재미있고 흥겹게 때로는 아주 거칠고 사납게 시니컬한 무대를 나는 만든다. 내 심장은 인간과 연대하는 연극을 만드는 것에 박동한다. 어떻게 하면 당장의 현실의 문제를 즉각적으로 무대에 반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나의 관심이다. 그런 입장에서 나는 당신의 말처럼 '연극은 시대의 정신과 눈이다.' 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의미나 입장에서는 예술의 정치, 정치의 예술화를 주저하지 않는다. 민중의 분노가 터져 나오고 삶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다는 건, 배우 편에서 또는 관객 편에서 이미 결과나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라면 어떤 작업이든 의미는 반감된다. 연극은 생생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썩고 병들어가는 사회에 맞서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역사극이나 소설 등의 텍스트를 동원할 때 나는 독일의 현실을 조망하고 비판하기 위하여 텍스트는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다시 조립된다. 나는 독일이나 베를린의 극장들이 죽은 작가의 텍스트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을 거부했다.

오랫동안 나는 소설을 바탕으로 연극을 만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The Idiot)'를 예로 들면, 리허설을 5주간 했고 6시간짜리 연극을 만들어냈다. 책을 먼저 읽고 재미있는 텍스트를 잘라낸다. 그리고는 배우들에게 그 텍스트를 나는 던진다. 마치 축구경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백치'라는 축구 경기의 틀을 만들고 공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배우들에게 던져서 반응을 하게 한다. 그 반응에 따라 나도 반응을 한다. 그렇게 주고받다 보면 속도(Geschwindigkeit)가 생기는 것이다. 이 연극은 서울에서 한번 초청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제반 사항이 좋지 않아서 취소했다. 무대비용이 너무나 비쌌다.

김상수 - 디지털화된 현대 사회에서 연극을 만든다는 건 가내 수공업적인 작업방식이다. 연극은 현대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카스토르프 - 인류 이래로 연극은 있어왔다. 그리고 계속 존재할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극단이 있고 프로덕션이 있고 '직업적인 연극 만들기'에 빠져들고 만다는 점이다.

김상수 -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2001년부터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 연극의 국제적인 교류라는 이름으로 민속적인 것들이나 후원이나 뒷받침이 확정된 것들을 주고받는 식을 국제교류라는 이름으로 하고들 있다. 나는 이것에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과 인간이 만나고 소통하는 방식이 기본인 연극 작업이 레디 메이드화 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의 연극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소통하는 방식으로 내가 가는 나라에서 그 나라의 언어와 배우와 스탶들로 직접 부딪치는 방식으로 연극 작업을 하고 있다.

작년 12월 8일에 베를린 테겔공항에 내렸을 때 400만의 인구가 사는 이 도시에 나를 아는 연극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2001년 일본의 오사카 칸사이 공항에 처음 내릴 때의 심정과 같았다. 전화를 걸 데도 없었고 아무도 연극이란 이름으로 나를 마중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에서 어떤 소개장이나 배경도 없이 베를린에 왔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뭔가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때때로 이 방법은 너무나 위험하고 무모하다. 그러나 나는 매일매일 네트웍을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만나지는 사람들에게 '나는 연극을 당신 나라의 언어로 당신 나라의 배우들과 스탭들을 통해서 같이 진행하겠다, 라고 말하면, 하나같이 극단은 어디인가, 프로덕션은 어디인가를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해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불가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해보자는 사람도 만났다.

나는 인간을 만나는 것이다. 내가 베를린에서 만난 극장인 중에서는 당신이 첫 번째 사람이다. 나는 지금 당신과 연극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베를린의 연극에 대해서, 특히 당신의 연극에 대해서 나는 묻고 당신은 답하고 있다. 이는 나에게 소중한 경험이고 시작이다.

카스토르프 - 당신의 작업 방식이 아주 진실하게 들린다. 연극은 만나는 것이다, 인간을.

김상수 - 긴 시간 대담을 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

대담의 후기로 나는, 2003년에 쓴 '연극은 정신과 눈이다'라는 글에 첨삭하여 현재의 소회(素懷)를 말한다. .

연극은 시대의 정신과 눈이다. 작금의 한국 연극계 현실을 이제 연극인들은 냉정하게 살필 수 있어야만 한다. 한국 연극계 현실은 분열과 반목이다. 반목과 분열에는 그 연 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에는 한국현대사 질곡의 역사와 한국 연극역사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지극히 어려운 정체성(正體性)의 문제만큼이나 해방 이후 현대정치사의 왜곡처럼 해방이후 문화예술계의 왜곡 또한 상처가 크고 깊다.


긴 시간 한국연극은 소외의 역사였고 지금도 그렇다. 무엇으로부터 소외인가?
이는 연극 자체로부터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로부터도 연극은 계속 소외되어 왔다.
이는 곧 한국 현대 예술사의 전반적인 문제지만 특히 연극의 소외는 한국 연극의 일그 러진 전통과 무자각의 현재가 그대로 반증해주고 있다.
이제 한국 연극사에서 식민지 연극사를 판별해 내야한다. 식민지연극사의 영향아래 위 치하는 우리 연극현실이 신(新)식민지화로 얼마나 왜곡되었고 그로 인해 오늘에까지 연 극계가 분열과 정체성의 혼돈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 결정적인 폐단이 무엇인가를 이제 부터 세세하게 질문해야 할 때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한국연극계의 분열과 갈등, 반지성(反知性)의 원인에는 우리나라 연극에서 신극사의 출발은 식민지 상황이었고, 식민주의는 침력적 지배문화의 침탈과 피식민지 경험으로 인한 내적인 붕괴는 이후의 분열과 갈등 심지어 부패까지 유발하게 됐던 거다.


한 때 우리는, 어쩌면 이 시간까지도, 식민지 종주국의 연극 이미지를 받아들였고, 그것 을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으로 내면화하였다. 이는 우리 내면의 괴멸과 붕괴에 다름 아 니다.

이 내면의 괴멸이 우리 현대연극사의 출발이었고 그 괴멸을 도리어 이용하여 식민주의 의 싸구려 껍데기가 연극행위로 긴 시간 질주해 왔다. 신식민주의로 식민지 종주국 흉 내 내기가 현대연극의 출발이었음을 냉정하게 목도할 때가 이젠 됐다는 말이다.


반민족 친일연극인의 그 제자들이 해방 이후 냉전 군사독재의 하수인으로 뻔뻔하게 예술 행위의 일방적 향유자였고 그들 스스로 정체성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이들의 삶이나 연 극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었고 당연히 창작의 정신보다는 조잡한 번역연극에 기대어 연 극을 삶의 방편으로 삼았으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편 다행스럽게도 연극 역사의 소외와 지금의 한국 연극이 대중들에게 소외당하는 현시점에서 연극은 활기를 찾고 생 기를 찾아야만 한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파탄 난 정신과 곪고 썩은 자기 몸뚱어리의 정체를 묻는 것에서부터 한국의 연극이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강조한다. 정직하게 자기를 대면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만큼은 연극현실에서 계속 강조되어야 마 땅하다. 그러나 이런 자각이 너무나 당연하고 진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아 직도 많은 눈들이 제대로 못 보고, 안 보고, 감겨져 장님이 되어있다. 이는 연극을 왜? 무엇 때문에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부족하거나 없었고, 없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오늘 날 한국에 극장에는 연극 관객이 없다. 그래서 연극을 제작하기도 점점 어려워진 다. 이는 연극하는 이들이 결국은 연극을 시대의 정신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나날의 삶 속으로 파고드는 힘이 허약했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는 1983년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했던 <191931>이라는 내 연극 팜플렛에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연극은 시대의 정신과 눈이다.' 라고. 연극은 인간의 존중과 인간의 위엄과 인간의 예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극 작가나 연출가란 나름대로 세상에 부지런하 고 자신에 엄격하며 정직한 언어로 자기 자신에 치열할 수밖에는 없다. 그래서 아무나 연극을 할 수도 없다. 숙명적으로 가난과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극을 한 다는 사실은 삶의 안일한 도피처일수도 없고 무기력하게 연극 만들기의 되풀이가 일상 사 일수도 없다. 기실 연극을 만드는 예술가란 돈벌이와 명예에 대해서 여하히 자제할 수 있는가가 관건인지도 모른다. 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저 가내 수공업적이고 도저히 산업이 될 수도 없는, 숙명적인 이 가난의 연극으로부터 포로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창조의 주체할 수 없는 충동 때문에 여타의 사람으로부터 오해와 미움까지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말이다.

이제 난 여하히 다시 움직이고자 한다. 어떻게? 무엇을? 바로 연극이다. 그래서 나는 연극 만들기의 우리 사회의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으며 연극의 가 치이해와 가치실현과 가치실천에 대해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은 시대의 정신과 눈이기 때문에, 또한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는 언제까지 이곳 베를린에 머물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연극을 먼저 작업하고자 한다. 세계를 향한 물음들, 질문들을, 여기서 이들의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 하여 말하고자 한다.




(베를린에서 2009년 2월 23일)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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