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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길은 신의터재를 지나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19> 괘방령~신의터재/6.17~19

산행 열엿새 째. 목요일.

이른 새벽 내리던 부슬비가 산행을 시작할 무렵 그쳤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을날 이른 아침 같았다. 바람은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하늘도 시리도록 맑았다.

'오늘은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겠구나.'

윗왕실재에서부터 신의터재까지 15km의 산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험한 구간이 없는 편안한 길이다. 상쾌하고 가벼운 산행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백학산(白鶴山, 615m)을 향했다. 돌계단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백학산을 지나 개머리재, 지기재를 거쳐 신의터재로 가는 길이었다.

발걸음 가벼웠다. 마음도 가벼웠다. 숲을 느끼며 걸었다. 이른 아침의 싱그러운 숲의 기운이 몸으로 들어왔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숲을 걷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 가득한 아침이었다.
▲숲 ©이호상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걷는다는 것은 몸으로 모든 존재를 만나고 느끼는 것이다. 길가에 구르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돌멩이 하나에서부터 풀잎 하나, 야생화 한 송이에 이르기 까지 모든 존재들을 몸으로 느끼고 만나는 것이다. 스치는 바람과 흐르는 구름도 몸으로 느끼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걸으면 죽었던 몸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깊어진다. 숲의 작은 움직임과 꽃의 떨림까지도 느낄 수 있게 된다. 몸이 살아나는 것이다.

걷는 일은 몸만 살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도 살린다. 마음을 열고 걸으면 모든 존재들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마음을 열고 걸으면 존재하는 모든 것 그 이상의 것들을 느끼고 만나게 된다. 보이는 것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느끼고 받아들이게 된다. 소통하게 된다. 걸으면 몸은 긴장에서 벗어나게 되고 마음은 갇혀있던 생각의 틀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 마음으로 걸으며 자신을 느끼고 존재하는 것들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많은 시대의 스승들과 철학자들이 산책을 즐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걷는다'는 것을 거의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제 마음과 몸으로 살아가는 삶을 잃어가고 있다. 모든 것을 기계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자신이 아닌 것에 의존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아닌 것들에게 삶의 주도권을 내어준 채 살아가고 있다. 자동차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핸드폰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이 없으면 소통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문명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들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이다. 그런 문명의 산물들이 작동을 멈추면 사람들의 삶도 멈추게 될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추어 서게 될 것이다.

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삶이 온전할 수는 없다. 자신의 삶에 순결하게 정직할 수는 없다. 문명과 기계의 논리가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문명과 기계를 숭상하는 가치관들이 이미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싫어도 거부할 수 없는 왜곡된 삶의 환경에 이미 놓여 있기 때문이다. 때로 '이것은 아니다'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만 그 소리에 따르지 못한다. 외면하게 된다.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제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삶이 제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걷는 일은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마음을 살리는 일이다. 몸을 회복하고 마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리에 갇힌 동물들처럼 문명의 상징인 콘크리트 빌딩에 갇힌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현대라고 불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슬픈 현실이다. 자화상이다.
▲하늘소, 숲은 생명으로 가득하다 ©이호상

백학산(白鶴山)에 올랐다. 산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 백학이 내려와 앉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제는 이름으로만 남겨져 찾아볼 수 없는 백학이 그리웠다. 그리움 남겨 두고 백학산을 내려오는 길에 새소리 들려왔다. 맑기가 그지없었다.

'저렇게 청량한 소리를 낼 수 있다니...사람들도 저렇게 청량한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길은 편안했다. 길마다 솔잎이 수북이 쌓여 여러 날 산행에 지친 발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어린 날 걷던 태강릉의 숲길이 기억났다. 그 길에도 솔잎 수북하여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었다.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길은 낮아져 도로와 이어져 있었다. 멀리 저수지 같은 것이 보였다.

"김대장님, 저게 저수지에요? 이런 산중에 저수지가 있어요?"

"아니요, 저수지 없는데요...!"

나는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저수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비닐 하우스였다. 햇살이 비닐하우스 지붕에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그 모습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 같았다. 햇살 부서져 반짝이며 일렁이는 호수 같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정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김 대장의 말이었다.

"그래요.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지요. 보이는 것이라고 모두 사실은 아니에요. 잘못 볼 수도 있으니까요. 잘못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실 일수는 있어도 진실이 아닌 경우가 많지요. 사실과 진실은 다른 것이니까요."
▲ ©이호상

길은 다시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좁은 길이었다. 덤불 가득했다. 지나기에도 힘든 길이었다. 숲을 벗어났다. 개머리재(290m)였다. 이 지역의 모양이 개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담배밭과 포도밭, 사과밭 등이 눈에 보였다. 백두대간은 허리를 낮추고 낮추어 밭과 밭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백두대간이 낮은 재를 지난다는 사실이 때로 낯설었다. 때로 장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옛사람들이 하늘길이라고 생각했던 백두대간이 하늘에서 멀리 떨어진 낮은 마을로 내려와 있다는 것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산행이 거듭되며 그런 생각은 변했다. 이처럼 낮은 마을로 내려온 백두대간이야말로 진정한 하늘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높고 낮음은 백두대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백두대간은 하나의 산줄기이며 그 산줄기 자체가 하나의 산이다. 높고 낮음, 오름과 내림, 들어감과 나감이 모두 하나였다. 높은 산이나 낮은 산, 오르막이나 내리막, 산으로 들어가는 일과 나오는 일 등이 모두 한가지였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 하나의 산, 하나의 산줄기를 이루는 것이다.

'옛사람들이 백두대간을 하나의 산줄기로 인식한 것은 조화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화를 이루어야 숲이 되고, 산이 되고, 자연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꿀풀 ©이호상

숲의 질서, 산의 질서, 자연의 질서는 조화다. 조화가 깨진다는 것은 곧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내 삶은 조화로웠을까?'

생각을 따라 걷는 사이 향기 그득한 밤나무 숲을 지나 지기재(260m)로 내려서고 있었다. 오전 10시 40분이었다. 동네 뒷산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 하여 한 때 적기(賊起)재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이름을 따 지기재라고 고쳐 부르고 있었다. 잠시 쉬며 간식을 먹었다. 커피도 마셨다. 행복했다. 어제 그토록 많은 비가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햇볕은 강렬하고 따가웠다. 그러나 산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땀과 몸을 식혀주었다.
신의터재를 향해 김남균 대장과 김명옥 작가와 내가 먼저 출발했다. 김대장은 오랜만에 앞서 걸으며 스틱을 세워 위 아래로 흔들어 거미줄을 걷어내며 걷고 있었다.

"그만 하세요. 손목 아파요."

"괜찮아요. 운동하는 거예요."

"앞서가니 거미줄 제거하는 것이 큰일이네요. 앞으로 선두 조를 거미줄 제거조라고 불러야겠어요."
▲함께 사진 찍다 ©이호상

내 말에 모두들 웃었다. 웃으며 걷다보니 신의터재(280m)였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고 불렸던 이 고개는 임진왜란 때 최초의 의병장이었던 김준신이 의병을 모아 큰 공을 세우고 임진년 4월 25일 순절한 후부터 신의터재로 불렸다. 일제 강점기 때는 민족정기를 말살한다고 '어산재'로 개명되었으나 광복 50주년을 맞아 옛 이름을 되찾은 사연 많은 고개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여섯 시간도 채 안 걸렸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다섯 시간 오십분 걸렸어요. 매우 빨라졌어요."

어제와 오늘 산행을 이끌었던 등산연합회 우주환 대장이 나를 격려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조금 더 갈까요?"

내 말에 놀랐는지 촬영팀 안도현군은 어느새 차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모두들 웃었다.
몸도 마음도 가벼운 산행이었다. 걷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든 산행이었다. 나는 신의터재라고 쓴 커다란 표지석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다.
맑은 오후였다.
바라 본 하늘은 빨려 들어갈 듯 맑았다.
햇살이 나뭇잎을 비추었다. 나뭇잎이 싱그럽게 빛났다. 잠시 동안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풀잎들 바람에 흔들렸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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