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산줄기는 괘방령에서 허리를 낮추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산줄기는 괘방령에서 허리를 낮추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16> 소사고개~괘방령/6.10~12

산행 열사흘 째. 목요일.

산행 준비를 마치고 마당으로 내려서니 아침 햇살이 온화했다. 동행들을 기다리며 마당을 둘러보았다. 가정집으로 지으려다가 백두대간을 타는 산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산장으로 지었다는 괘방령 산장의 마당은 온통 산으로 가득했다. 지나온 부항령의 표지석도 있었고 오늘 가야 할 운수봉과 여시골산의 표지석도 보였다. 괘방령산장에 오면 모든 산을 두루 섭렵할 수 있다는 농담이 그럴 듯하게 들렸다.

모두들 차에 올랐다. 우두령으로 향했다. 우두령은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이어주는 고갯마루이고 낙동강과 금강수계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질매재'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질매'라는 이름은 이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소 등에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 때 안장처럼 얹는 '길마'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질매'는 '길마'의 이 고장 사투리이다.

우두령으로 가는 길에 노루 한 마리를 보았다. 차 소리에 화들짝 놀란 노루가 도로를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지만 도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산기슭에도 반대편에도 굵은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차 안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가득 찼다.

"저런~ 저런!"

"천천히 가, 천천히... 노루가 지나갈 때까지 차를 세워."

노루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철조망이 끝나 있는 곳을 찾아내 숲으로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도로에서 치어 죽은 동물들의 사체를 볼 때마다 섬쩍지근한 느낌이 오래도록 남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의 상징인 도로에서 죽는 동물들의 숫자가 일 년에 얼마나 될까.

문명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끔찍했다. 도로에서 죽은 파충류나 조류, 동물들의 사체를 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생명들의 주검을 담보로 건설되는 문명이 도덕적이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리석은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생명을 존중하는 가치를 지니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정봉에서 바람재로 ©이호상

우두령에서 숲으로 들어갔다. '등산객 출입로'라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는 숲길에는 지나간 이들이 붙여 놓은 형형색색의 리본들이 어지럽게 달려 있었다. 숲으로 들어갔다. 지난 해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가을을 밟는 것만 같았다.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능선에 오르자 하늘이 보였다. 맑았다. 푸른 하늘에 구름 한 점 햇살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맑은 날씨 탓에 멀리 보였다. 첩첩한 산들이 끝 모르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움의 끝이 그 곳 어디쯤에 있을 것만 같았다. 길에 노란 미나리아재비 꽃이 피어 있었다. 첫 봉우리인 삼성산(986m)을 지나는 길에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따 먹으며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날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찔레꽃은 아득한 그리움이자 설렘이었다. 슬픔이고 아픔이었다. 사랑이고 희망이었다. 따스한 어머니 품이었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웠던 생의 한 순간이었다. 길은 편안했다. 여정봉(1,030m)에 올랐다. 나무 밑둥치에 기대어 있는 작은 표지판에 '여정봉'이라고 써 있었다. 바람재(810m)로 향했다. 산과 산은 이어져 있었고 골과 골은 맞닿아 있었다. 나무들은 숲을 이루어 바람 불 때마다 술렁이며 출렁이고 있었다. 숲 전체가 출렁일 때면 산이 떠나가는 듯 했다. 산허리로 구불구불 난 길이 보였다. 바람재 가 보였다. 숲에서 나와 산허리를 따라 난 길에 서면 바람재가 보였다. 바람재로 향했다. 길 가 산기슭에는 낮게 쌓은 돌담이 가지런했고 반대편에는 풀숲이 우거져 있었다. 풀숲과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바람재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석은 풀숲 우거진 곳에 세워져 있었다. 아니 어쩌면 후일 풀숲이 우거졌는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많아서 바람재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표지석에 새겨진 글씨는 바람을 닮아 멋스러웠다.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표지석 뒤로 보이는 하늘이 눈 시리도록 푸르렀다. 푸르기만 한 하늘 아래 첩첩한 산들도 푸르렀다. 눈부신 날이었다. 바람 많아 바람재라고 이름 붙여진 고갯마루였지만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다. 나무 그늘에 앉아 쉬었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곧 바람이 불어올 듯 시원해졌다. 그러나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바람재 ©이호상

형제봉(1,020m)을 향했다. 형제봉에 오르면 황악산 정상인 비로봉(1,111m)이 눈앞이었다. 형제봉으로 오르는 길에 지리산에서도 만났던 적이 있는 김천 청년을 만났다. 대기업에 근무하다 사표를 내고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청년이었다. 그는 야영을 위해 텐트까지 지고 다녔다. 보는 것만으로도 지칠 정도로 배낭이 무거워 보였다. 그는 배낭을 내려놓은 채 지나 온 길을 돌아내려가고 있었다.

"어디가요?"

인사를 챙길 사이도 없이 김 대장이 물었다.

"양말을 잃어버려서요. 어딘가에 떨어뜨렸나 봐요."

그는 잰 걸음으로 뛰듯이 내려갔다.

"아니, 양말 한 짝 잃어버렸다고 이 힘든 길을 다시 내려간단 말이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에서는 양말 한 짝, 휴지 한 조각도 소중한 법이다. 일회용 밴드 하나도 소중한 법이다. 산행이란 어쩌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잊고 있는 작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배우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양말 한 짝, 휴지 한 조각, 일회용 밴드 하나, 길거리에 굴러 다녀도 줍는 이 없는 까만 비닐봉지 하나에 이르기까지 산에서는 소중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한다.
▲함께 사진 찍다 ©이호상

황악산(黃岳山. 1,111m)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그러나 거칠지는 않았다.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이라는 이름도 지니고 있는 산답게 부드러웠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한 5만분의 1 지도에는 '황학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택리지' 같은 문헌에 '황악산'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볼 때 '황학산'은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황악산에서 기 호흡을 공부하고 있다는 박 선생을 다시 만났다. 지난 밤 우두령으로 내려설 때 만난 사람이다. 잠 잘 곳을 찾는다고 하여 우리와 함께 동행 했었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박 선생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말을 했다. 어느 산중에서 기와 호흡을 공부하는 '00산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고, 이제는 유명해져 외국에서까지 공부하러 온다고도 했고, 학생들이 많아져 시간을 낼 수 없는데 다른 선생들에게 양해를 구해 한 달의 휴가를 얻어 산행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자신이 수련하는 수련 방법이 다른 사람들이 가르치는 수련 방법과 어떻게 다른지도 설명했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줄 몰랐다. 우리 일행들은 긴 산행으로 지쳐 있었건만 그는 모두지 침묵할 줄 몰랐다.

뒤에서 들려오던 이야기를 듣던 김명옥 작가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는 작은 소리로 화답했다.

'저 친구는 입으로 기 수련을 했나봐! 조용히 할 줄을 모르네.'

김 작가는 다시 웃었다.
박 선생은 깊은 호흡으로 태산처럼 진중하게 있는 법을 알지 못하는 듯 했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지 못한 듯 했다. 숨이란 내 쉬기 전에 먼저 들여 마셔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래도 휴가를 내어 산을 다니고 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마음을 비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재빨리 가르쳐주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침묵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산으로부터 침묵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멀리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직지사가 보였다.
▲황악산에서 바라본 김천 ©이호상

직지사를 멀리 놓아둔 채 우리는 황악산을 내려갔다. 온수봉(680m)을 지나고 여시골산(620m)를 지났다. 나는 지난 3일간의 산행으로 이미 체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괘방령으로 들어서는 완만하기 그지없는 길을 걸어가면서도 힘들었다. 부어오른 왼 발에는 압박붕대가 감겨 있었고 등산화는 헐겁게 매어 있었다.

나는 절룩이며 괘방령(掛榜嶺. 357m)으로 들어섰다. 괘방령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에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官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시험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며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였다.

산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여전히 개망초 꽃 아름답게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괘방령 산장이 보였다. 산장에 들어섰다. 일행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씻고 나서 식사를 했다. 산장 주인은 직접 기른 상추를 내 놓았고 숲 촬영을 위해 남아 있던 황서식 감독은 자장면을 만들어 내 놓았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한 점심상이었다.
▲괘방령 산장 ©이호상

짐을 정리해서 마당으로 나오니 키 낮은 괘방령이 눈앞에 있었다.
하늘 길인 백두대간이 허리를 낮추어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내려온 곳이다. 사람 사는 살림살이가 걱정이 되어 제각기 풍성하게 살아가라고 금강과 낙동강을 품어 흐르게 한 곳이다.
나는 해발 357m 밖에 되지 않는 괘방령을 바라보았다. 밋밋하기 그지없는 고개였다. 완만한 부드러움 때문이었을까. 편안해 보였다. 어머니의 품 같았다. 간간이 차들이 지나고 있었다. 백두대간이 허리를 낮추어 내려선 고개에서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 좋은 산장 주인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서울로 향했다. 저녁 8시 서울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렸다. 소낙비였다. 빗방울이 기분 좋게 몸에 젖어들었다. 빗줄기 속으로 들어갔다.
불빛을 받은 빗줄기들이 빛나고 있었다.
빗줄기는 굵어지고 있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