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도가니>, 근대적 인권과 탈근대적 문화권 사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도가니>, 근대적 인권과 탈근대적 문화권 사이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황동혁 감독의 <도가니>

I. 근대적 구조의 이성적 제도

세상이 온통 "도가니" 열풍이다. 국회는 "도가니 방지법"을 세운다고 법석이고, 광주시 교육청은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복지학교를 폐교한다고 난리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나 황동혁의 영화 <도가니>가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대적 구조의 이성적 제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 <도가니>에는 끊임없이 근대적 소수자들을 억압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마침내 죽음의 고통으로 몰고 가는 근대적 제도의 악이 표현되어 있다. 그 근대적 구조의 악들은 교사나 교장, 혹은 경찰이나 판사의 개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서구의 식민지 근대 국민국가로 만드는 근대 기독교 종교의 교회와 근대 계몽주의 교육을 목표로 하는 학교와 근대의 서구적 인권을 토대로 한 법원이다.
ⓒ영화 <도가니>

19세기 근대 미국의 "도가니"를 표현하고 있는 아서 밀러(Arthur Miller) 의 <도가니(Crusible)>가 21세기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로 재현되듯이, 근대적 종교와 근대적 교육과 근대적 법률이 지속하는 한 전남 무진시 자애학원의 "도가니"는 다른 지역 다른 학교에서 끊임없이 지속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경악을 하며 "실화"라고 언급되는 전남 무진의 자애학원에서 일어난 사건은 단지 무진시의 자애학원이라는 특수한 기관에서 일어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 모든 학교에서 일어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근대적 일상인 것이다.

말을 하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들과 똑같이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 생명의 문화를 가진 개체들이다. 그러나 근대적 기독교와 근대적 교육과 근대적 법률은 그들이 각각 생명의 문화를 가진 개체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서 밀러의 <도가니>를 <시련>이라고 번역하고 있듯이, 근대 기독교는 그들이 신의 섭리를 실현하기 위하여 일상적 "시련(crusible)"을 감수해야만 하는 신의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한다. 영어를 못하고 한국어를 하거나 강남에서 살지 못하고 강북에서 사는 것은 영어를 하기 위하거나 강남에서 살기 위한 시련이 아니라 한국어의 문화이고 강북의 문화이듯이, 말을 하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것은 말을 하거나 듣기 위한 시련이 아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는 삶의 문화이다. 그들은 또한 근대 문명의 방식으로 말을 하거나 듣지 못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이 아니라 특수교육을 받아야만 한다고 근대 계몽주의 교육은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교장의 노예이면서 종노릇을 하는 폭력교사 박보현(김민상 분)이 민수(백승환 분)를 개 패듯이 패면서 "선생님 말을 왜 안 듣니?"라고 하는 말처럼 "선생님 말을 잘 듣는" 것은 근대 식민지 사회와 국가의 노예나 종노릇을 하도록 만드는 교육이다. 소위 근대의 식민지적 이성을 가진 인간, 즉 서구·백인·남성을 모델로 하는 대한민국의 근대적 법률이 보장하는 인권도 마찬가지이다.

II. 소수자 되기를 달성하는 탈근대적 생명의 힘

서구적 근대의 인권(human rights)을 탄생시킨 주권(sovereignty)은 16세기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탄생되었다. 기독교를 통한 식민지 지배를 위하여 "주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주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식민지 지배권(sovereign power)이다. 16세기 중남미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왕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왕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식민지인들은 주권의 보호를 받지만, 왕의 지배권이 미치지 못하는 산악지방의 원주민들은 마치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학생들처럼 주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짐승처럼 취급되었다. 근대 국민국가는 왕의 주권을 국가의 주권으로 변형시킨 것일 뿐이다. 19세기 초 조선의 주민 수가 천만 명이었는데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후의 오늘날 7천만 명이 되었는데 반하여 19세기 초 미국의 인디안 원주민들의 수가 2천만 명이었는데 오늘날 4백만 혹은 5백만 명이라니, 근대적 주권과 인권을 토대로 한 미국 백인의 근대적 폭력과 야만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식민지 통치를 위한 주권은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서구 유럽 국가로 역수입되어 근대 국민국가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위한 "인권"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근대적 인권이 만들어진 19세기 내내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에서 여성과 노동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인권을 통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영화 <도가니>

서구적 근대의 인권을 토대로 한 야만과 폭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9.11 사건" 이후 부시 전 대통령이 "미국의 편은 선이고 미국의 반대편은 악"이라는 근대적 인권의 신념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여 그들의 삶의 문화를 말살하고 있다. 영화 <도가니>와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아니다.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특수학교를 포함하여 대한민국을 "도가니"로 만드는 것은 서구·백인·남성들만의 주권과 인권을 근대적 선이라고 믿고, 서구·백인·남성들에게 저항하거나 그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혹은 북조선을 비롯한 아프리카나 중남미 혹은 이슬람 지역을 악이라고 설교하는 기독교 교회와 그들에게 폭력과 야만을 강요했던 근대의 역사를 계몽이라고 가르치는 교육, 그리고 편협한 근대적 인권의 신념으로 가득 찬 변호사와 검사 그리고 판사를 만들어내는 대한민국 법률이다. 영화 <도가니>에서 근대적 이성과 인권에서 벗어나 있는 청소년들과 함께 특수학교의 폭력과 야만을 폭로하는 미술 교사 강인호(공유 분)와 인권운동가 서유진(정유미 분)만이 그러한 종교와 교육 그리고 법률에서 벗어나 있는 탈근대인들이 아닌가? 그들이 탈근대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근대적 인권과 제도에서 벗어나 있는 연두(김현수 분)나 유리(정인서 분) 그리고 민수와 같은 탈근대인들과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강인호와 같은 번민에 시달리는가? 식민지적 종교에 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권력적이고 파괴적인 교육제도에 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자유를 억압하고 정의롭지 못하며 평등하지 않는 법률제도에 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서구적 근대의 식민지 국가에서 목사나 신부 혹은 검사나 판사는 물론이고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목사와 신도 혹은 판사와 피고인의 관계처럼 상호존중의 일대 일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노에 혹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일 뿐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종교나 교육 그리고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폭력에 대하여 저항하는 길이다. 강인호가 어머니가 준 "란 화분"을 교장에게 주려고 교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리고 민수를 짐승처럼 끌고 가는 정말로 짐승과 같은 박보현에게 "란 화분"으로 냅다 치는 순간, 강인호는 근대적 이성에서 벗어나 마치 미친 사람의 광기처럼 분노한다. 강인호를 분노하게 만드는 그 광기와 같은 저항의 힘이 근대적 제도에 의하여 선생이나 남자 그리고 아버지(혹은 아들)로 살아가는 강인호로 하여금 학생 되기나 여성되기, 그리고 마침내 소수자 되기를 달성하는 탈근대적 생명의 힘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 생명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서구인 되기, 백인 되기, 남성 되기라는 근대적 이성에서 벗어나 아시아인 되기, 한반도인 되기, 그리고 소수자적 삶의 여성되기를 하게 만드는 탈근대적 느낌과 정서의 삶이다.

III. 교육문화권을 통한 탈근대의 교육
ⓒ영화 <도가니>

우리는 모두 근원적으로 탈근대인이다. 스피노자가 일찍이 "신, 즉 자연"이라고 일컬은 것처럼 기독교나 불교 혹은 이슬람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사회적 관계에서 자연적 관계를 근본으로 하는 자연인이 되기 위한 방법이다. 자연인이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도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느낌과 정서이다. 그 느낌과 정서의 사회적 발현이 사랑과 우정이다. 가족이나 학교 그리고 교회나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토대로 한 것이지 근대적 현실을 지배하는 지배와 피지배 혹은 주인과 노예의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관계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다.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교사들이나 기독교 신도들 그리고 법원의 판사나 변호사들을 끊임없이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근대적 교육제도에 있다. 학생들 개개인의 삶의 방식을 토대로 하는 교육문화권이 아니라 일반학교와 특수학교를 구분하고, 일제고사로 학생들을 일등서부터 꼴등까지 일렬로 줄을 세우고, 미국의 대학을 모델로 하여 일류대학과 이류대학을 서열화하는 근대적 교육제도는 소설과 영화 <도가니>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이런 근대적 교육제도 속에서 교육을 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즉 정상적인 교육을 남들보다 뛰어나고 훌륭하게 수행한 교수나 판사 혹은 의사나 목사 등등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한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고 하수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미국이나 유럽의 문화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듯이 아프리카나 중남미 혹은 이슬람지역에 가면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육은 수화를 포함하여 각각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자기 문화의 언어와 종교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그들 문화의 느낌과 정서를 배가시키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교육문화권을 토대로 한 교육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인권이 만든 편협하고 파괴적인 경험을 거울삼아 각각의 지역과 언어 그리고 종교를 근본적으로 보장하는 삶의 문화권을 토대로 탈근대의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교육문화권이다. 스크린 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문명의 언어를 토대로 한 근대적 이성에서 벗어나는 탈근대적 느낌과 정서를 보여주듯이 영화 <도가니>는 근대적 이성을 가진 근대적 교육을 받은 인간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영화 <도가니>에서 인권운동가 서유진이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싸우는 것"라는 근원적 생명의 힘이 탈근대의 대한민국 만들기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근원적 생명의 힘은 인간이 동물의 한 종(種)이듯이 근대적 이성의 인간 이야기가 아닌 오성윤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과 같은 동물 이야기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