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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억류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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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억류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화제의 책] 김효순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1945년 8월 9일 밤.

소련 극동군 170만 병력은 0시를 기해 만주에 주둔 중인 일본 관동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독일이 전쟁에 항복하면 2~3개월 이내에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미국과 영국, 소련간의 비밀협약에 근거한 공격이었다.

소련군은 만주·한반도의 38선 이북, 쿠릴열도로 물밀듯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같은 해 8월 스탈린은 이들 포로를 시베리아 이송하는 극비지령을 내렸다.

이렇게 이들은 역사 밖으로 밀쳐내 졌다. 포로 중 조선인이 몇 명인지 정확한 집계조차 없다. 최근 출판된 한겨레 김효순 대기자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김효순 지음, 서해문집 펴냄)만이 반세기 동안 침묵을 강요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정리했다.

일제의 패망,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억류의 시작

▲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김효순 지음, 서해문집 펴냄). ⓒ프레시안
'시베리아 억류'란 말은 아직 우리 사회에 낯설다. 그만큼 관련 연구도 부족하고, 이를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모은 기록 또한 마땅히 없다. 억류 피해자 중 현재 남한에 생존해 있는 사람은 30명 남짓이다. 생생한 취재로 이들의 기억을 치밀하게 복원하지 않았다면, 이 현대사의 비극은 다시 비극적으로 묻혀버렸을 것이다.

"1945년 8월 초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다. 집에 연락하니 아버지가 평양에서 일부러 찾아왔다.(…) 끝내 비통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기 시작한 아버지는 하룻밤 자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마지막 대면이 될 줄을 이병주는 몰랐다. 8월 9일 북만주의 하이라얼에 있는 362부대로 들어갔다. 소련이 만주 주둔 관동군에 대해 총공격을 시작한 바로 그날이다."

해방이 1년도 남지 않았건만, 이들은 일본 관동군으로서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소련의 폭탄을 맞아야 했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소련에서의 억류생활이다.

"이규철이 소속된 작업 대대는 9월 초 셀레트칸에 도착해 인근 집단농장에서 감자 수확 등 농사일을 하다가 10월 초 산속으로 들어갔다. (…) 포로들은 벌판에 기거용 천막을 쳤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빨리 다가왔다. 천막 안의 땅바닥은 영하 30도 밑으로 내려갔다.(…) 이규철을 비롯한 조선인 포로들은 80여 일 동안 누워서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억류 중 동토의 땅에 묻히지 않고 돌아온 생존자들의 귀국 경로와 일시는 일정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에 섞여서 일본 마이즈루로 간 사람도 있고 선박편으로 청진, 웅기로 오거나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통해 38선을 넘은 경우도 있다.

"한참 가니 논 끝자락에 초소가 보였다. 박정의가 다가가서 "동무, 38선이 어디요"라고 묻자 (…) 초소 근무자는 총을 들이대며 '모두 손들어'라고 고함쳤다. (…) 박정의는 "소련군에 항복할 때도 손 안 들어 봤고 이북에서도 손들지 않았는데 내 고향 땅에 와서 손을 들라고 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결국 손들었지!"하며 자조하는 표정으로 당시를 회고했다."

몇 달 만에 겨우 풀려나 고향땅을 밟았지만 이들은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다시 전쟁터에 나가게 됐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 한 곳에 하소연할 수 없었다. 휴전 이후 남북 대치 상황이 계속되고 무슨 간첩단 사건이 요란하게 발표되는 분위기에서 이들의 소련 생활은 일종의 낙인이었다.

한 개인의 삶을 집어삼킨 당시 국제관계 재조명해

이 책은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김효순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의 기구한 삶이 전개됐는지 조망하고 있다. 현대사의 비극을 단순한 넋두리로 치부하지 않기 위해서다.

일제 말기에 조선 청년들은 왜 징집될 수밖에 없었는지, 2차 대전 이후 강대국 간의 관계 속에서 왜 소련은 참전하게 됐는지, 스탈린은 포츠담 선언을 무시하고 왜 일본군을 강제 억류했는지 등 이 책 한권으로 2차 대전 전후에 동아시아를 둘러싼 세력들의 역학관계를 탐색해 볼 수 있다.

게다가 '마루타'로 유명한 731부대의 실상, 소련의 일본인 전범 재판, 소련 수용소 내 실상 등을 자세히 다뤄 당시 현장감을 더욱 살리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를 조선인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일본인까지 넓혀, 일본 사회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다뤄지는지 제시한 점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베리아 억류', 기구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문제

1990년 6월 한소 수교가 이뤄지자, 억류자 사이에 자신들의 사연을 호소할 때가 됐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리고 1991년 12월께 '시베리아 삭풍회'가 결성됐다. '삭풍회'는 청와대에 진정서를 냈고,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이 얻어낸 것은 없다. 이병주 회장은 "우리 정부가 해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지난 2월 27일 서울 국회도서관 지하1층 강당에서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고 이 책은 전한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피해자인 이들을 기억하는 이날 오직 현직 국회의원 두 사람이 왔을 뿐이었다. NHK 등 일본 매체는 왔지만, 국내 언론사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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