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는 교육 개혁에 나서겠다며 대입 제도를 바꾸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까지 서열화가 이뤄지고 있는 현 추세에서 대입 경쟁을 완화하기란 어려워보인다. 더구나 정부는 학교 순위를 매기는 가장 큰 도구인 수능 점수를 올해부터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한 고등학생이 수능 거부 운동을 제시했다. 청소년의 행복을 앗아가는 입시 경쟁과 학벌 사회를 사회나 정부가 나서서 바꿀 수 없다면, 당사자인 청소년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글은 다소 길지만, 입시 경쟁의 한복판에서 바라본 한국 사회에 대한 생각이 잘 녹아 있다. <편집자>
<들어가기 전에>
※ '우리'라고 함은 : 대학 입시를 앞둔, 약 200만 명 정도의 현 고2, 고1, 중3 학생들.
※ '그들'이라 함은 : 현 체제를 만든 책임이 있는 이들과 침묵으로 동의한 어른들.
1. 나, 지금, 행복한가. : 스스로 판단해보라
인간이 삶의 목적은 행복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향한다. '우리'도 인간이다. 고로, '우리'도 행복을 위해 산다. 생각해볼 것은 '우리'가 과연 체제 속에서 행복하냐는 것이다.
"자율 학습, 보충 수업, 사교육은 더욱 심해져 고고생의 경우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을 학교에서 보내고 있는가 하면, 평균 수면 시간은 중학생이 6.7시간, 고교생이 5.6시간인 것으로 조사됐다." (<경향신문>)
(물론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아주 훌륭하고도 놀라운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그것을 '명랑'정신이라 부른다. 어른들에게선 쉽게 찾아보기 힘든 바로 그 정신 말이다.)
스스로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 판단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에게 달렸다. 아무리 부정적인 지표들이 많다하더라도, 스스로 행복하다면 내가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진정 자신이 고등학생으로서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이건 더 이상 읽지 않아도 좋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문제의식 하에 전개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반박 잠재우기 ① : 오늘의 고통은 미래의 행복을 위한 투자가 아닌가? '그들'과 '우리' 중 몇몇은, 모든 것이 미래의 행복을 위한 일종의 투자가 아니냐고 반박한다. 그렇다. 사람들은 현재의 행복을 미래의 가치에 투자해 미래를 대비하는 아주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인류 역사를 거쳐 대단히 현명한 방법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미래의 행복을 보장해줄 현재의 투자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투자의 기본 원칙은 미래의 위험을 감안하여 현재에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현재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투자를 해오고 있는가? 혹시 현재의 거의 모든 행복을 포기하고 미래의 행복에 과감히 올인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대부분 후자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성공률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대박'이라 칭하는 소위 SKY, 최상위 세 대학의 정원은 넉넉잡아 1만5000명. 이는 대입 준비생들의 2퍼센트에 불과하다. 소위 상위권이라 불리는 성대, 서강대, 한양대부터 시작해 서울시립대에 이르는 대학들과, 범위를 더 넓혀 소위 '인 서울'이라 불리는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의 정원을 다 합친다 해도, 2011학년도 대입 준비생 70만 대군의 20퍼센트나 될까. 그런데 세상은 여기까지를 '성공'이라 말한다. (이들을 뺀 나머지 그 밖의 대학은 논외로 친다지.) 즉, 몇 년간의 올인을 통해 소위 성공하는 사람들은 투자자의 20퍼센트에 불과하다. '우리'는 '대박' 성공률 2퍼센트, '중박' 성공률 20퍼센트에 불과한 불리한 게임에 올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도 당신은 이것이 미래를 위한 현명한 투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
2.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가 : 완전경쟁 = 수능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우리'가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우리'가 힘들게 공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힘들게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우리'가 완전경쟁체제 하에 있고, 그래서 서로 경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한 완전경쟁체제는? 수능이다.
고로, 수능을 개혁해야한다.
※수능의 해악 : 획일화와 완전경쟁 고등학생 때부터 아이들을 전면적인 완전경쟁으로 돌입시킴. 언어/수리/외국어 로 획일화된 공부. 공부의 다양성 훼손. 무엇보다 수능은 주입식 교육을 조장함. +α(너무 많다.) |
▲ 2010학년도 수학능력시험에서 시험지를 기다리고 있는 응시자들. ⓒ뉴시스 |
3. 무엇이 우리를 순순히 경쟁하게 하는가 : 학벌사회
'우리'가 기꺼이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경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우리'가 좋은 학벌을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은 학벌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우리 사회는 사람을 학벌로서 계층화하는 학벌사회이기 때문이다.
학벌사회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자 '우리'를 처음 계층화하는 것이, 바로 수능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상위계층을 선점하기위해, 고등학교 시절의 행복을 포기하고 기꺼이 경쟁하려한다.
학벌사회가 경쟁의 근본원인이다. 경쟁은 고통의 근본원인이다. 학벌사회가 모든 것의 근본원인이다.
고로, 학벌사회를 개혁해야한다.
4. 문제는 문제의식 : 현실은 이미 시궁창이다
'그들'은 언젠가 말도 없이 수능이란 판을 정성스럽게 짜놓으셨다. 그리고 우린 언제부턴가 그 위에서 펼쳐지는, 너나 없는 경쟁 속에서 승자독식, 배틀로얄의 법칙아래 살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우리' 중 대다수는, 너무 멍청해서일까, 아직 철이 안 들어서일까, 아니면 체제에 너무나 잘 길들여져서일까, 이 뭐 같은 상황을 너무나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이런 상황에서조차 굳이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경쟁'이라는 게 얼마나 강력하고 교묘한 통제수단이 되는지, 새삼 깨닫는다.
실제로 앞으로 다룰 내 생각을 우리 학교 친구들에게 말해본 결과는 암담했다. 우리 동네의 보수적인 경향성 때문일까, '그게 왜 문젠데? 꼬우면 공부하면 되잖아.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야.'라고 대꾸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특히 나의 좌절은, 내가 체제의 최대 피해자라고 보는 하위권 친구들에게서 왔다. 별다른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주제로 말을 걸고 1분이라도 대화하는 것조차 나에게도, 그 친구들에게도 상당히 어렵고 버거운 일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체제를 설계한 '그들'은 그것에 의해 인생이 결정될 당사자인 '우리'와는 상의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끼리, 그들이 아닌 우리들이 겪을 고생길을 그들 뜻대로 디자인했다. 물론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판을 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우리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일일게다. 그러나 이를 어쩐다, 그들의 선량한 의도야 어찌 됐든, 현실은 이미 시궁창인걸. 그러한 고민의 결과들은 절망적이게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명랑'을 한 꺼풀 뒤집자. 그 얇은 막 너머엔 학벌사회와 완전경쟁의 수능이, 고통이 있다. '우리'가 속한 학벌사회란 판, 그리고 그것을 위한 수능이라는 완전경쟁은 고통스러워, 결코 행복하지 않다. 적어도 판을 뒤집기 위해, 일단 그 판을 뚫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나는, 그렇다고 본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문제의식을 가지자. 현실은 이미 충분히 문제적이다.
5. 나의 대안 : 스펙트럼 좁히기
문제의식을 가졌다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할지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대안은 대학 평준화이다. 대학의 등급을 없애 학벌을 없애는 것. 고등학교 가듯 대학교 가는, 대입의 고입화.
그러나 명문대, 사립대가 뿌리가 깊을 대로 깊었고 그것들이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대학의 절대적 평등화를 단기간에 이루기란 차라리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당장 목표로 할 형태는 정부 차원의 정책을 통해 하위권 대학을 강화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명문대의 지위를 낮추고, 심각하게 벌어진 대학 간 격차를 최소화하여 대학의 스펙트럼을 좁히는 것, 이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6. 왜 '대학 평준화' 인가? : 학벌과 경쟁과 고통, One 펀치 Three 강냉이
'우리'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경쟁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경쟁하는 이유는 학벌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안은 1)학벌을 없애 2)경쟁을 없애고 3)그래서 고통을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대학 평준화이다. 대학을 평준화하면 대학의 등급, 즉 학벌이 없어지고,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한 심각한 경쟁이 없어지고, 심각한 경쟁으로 인한 심각한 고통이 없어진다.
어른들은 요즘 고딩들 철없다고 말한다. 수능이 코앞인데 뭐하는 거냐고, 철 좀 들라고 말한다. 너희들 철들고 후회할 거라고, 쯧쯧, 혀를 찬다. 공감한다. '우리'의 몸엔 아직 철분 함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는 아직 어리다.
그런데 고딩들에게 철없다고 말하는 '그들'은, 앞으로 학벌사회에 살게 될 철없는 고딩들에게 학벌이 결정되는 거대한 숙제를 내준다. 철도 채 들지 못한 '우리'라서 70퍼센트는 실패할 거라는 걸 뻔히 알고서. 그것도, '그들'이 계획한 12년간의 주입식 교육을 통해 멍청해질 대로 멍청해진 '우리'에게.
'우리'보다도 훨씬 더 일찍, 어른사회는 완전경쟁의 체제를 갖추고 약육강식이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말 그대로 약한 자는 도태되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어른들도 살아남기 힘든 완전경쟁의 세상이다.
('그들' 사회 역시 지나치게 경쟁적인 것이 문제다. 그래도 여기선, 우리들의 이야기만 다루도록 하자.)
그런데 수능으로 대표되는 현 체제는 아직 어린 고등학생들을 어떠한 보호 장치와 구제 장치도 남겨두지 않은 채 어른들의 사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완전경쟁의 세계로 돌입시킨다.
오히려 그 체제에선 모든 학생의 수치화될 수 없는 결과물들까지, 모두 성적이란 이름으로 수치로서 점수화, 등급화 되며 1등부터 꼴찌까지 1열로 나열된다. 이런 점에서 이 체제는 '그들'의 체제보다도 더 잔인하다. 어쩌면 '그들'의 사회보다 더 잔인한 그런 완전경쟁 아래, 준비되지 않은 많은 고등학생들은 시작부터 마구 썰린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은 미처 진정한 삶의 무대에 나오기도 전에 대학 입시 관문 앞에서 일차로 낙오되는 것이다.
사회에도 이미 경쟁이 넘치는데, '우리'가 이런 낙오를 겪으면서까지 굳이 고등학생 때부터 완전경쟁에 돌입해야만 하는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도대체 알 수 없다.
반박 잠재우기 ② : 경쟁만이 너희들을 공부하게 하리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재반박 논리와 사례들이 있었기에 굳이 여기선 자세히 다루지 않으려 한다. 깊이 다루려면 이것만으로도 또 하나의 글을 쓰는 분량이 만들어질 것 같고. 그래서 이에 관한 재미있는 연구결과만 하나 소개하려한다. <이코노미스트>지 2009년 7월호에 실린 글이다. 미시건 대학교의 Stephen Garcia와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의 Avishalom Tor, 두 명의 행동과학자들이 2005년 미국에서 치러진 SAT(미국의 수학능력시험) 시험의 결과를 분석했다. 그들은 미국의 각 주마다 서로 다른 수의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특히 시험을 보는 장소마다 시험을 치르는 학생의 수가 다르다는 점에 착안했다. 재미있게도 다른 요소들과는 무관하게 많은 학생들이 모여서 치룬 곳일수록 시험 평균 점수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더해 SAT와는 별도로 Cognitive Reflection Test(또 다른 형태의 분석적 사고를 평가하는 시험)의 결과도 함께 분석했는데, 이 결과 역시 앞의 경우와 동일했다. 문제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두 연구자는 74명의 대학생들에게 쉬운 일반적인 상식으로 구성된 퀴즈를 정해진 시간 내에 가능한 빨리 풀게 하는 시험을 보게 했다. 각각의 학생들은 혼자서 시험을 치르는데, 빨리 푸는 순서대로 상위 20퍼센트에 들면 5달러의 상금이 주어질 것이었다. 연구자들은 절반의 학생들에게는 이것이 10명의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100명과 경쟁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테스트 결과 10명과 경쟁하고 있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평균 28.95초에 시험을 마친데 반해, 100명과 경쟁하고 있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33.15초가 걸렸다. 약 15퍼센트에 가까운 시간의 차이가 난 것이다. 이는 단순히 경쟁자의 수가 좀 더 많다는 생각만으로도 개인의 능력을 제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교육은 경쟁이 아닌 협력의 과정이어야 한다.
7. 중간정리
지금까지의 말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1.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2. '우리'는 행복하고 싶고, 그럴 권리도 있다. - ①
3.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선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을 개혁해야한다.
4.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완전경쟁체제이다.
5. 그 체제는 수능이다.
6. 수능을 개혁해야한다 - ②
7. '우리'가 경쟁하는 목적은 좋은 학벌을 얻는 것이다.
8. 좋은 학벌을 얻어야할 이유는 사회에 있다.
9. 우리 사회는 학벌에 따라 사람을 계층화하는 학벌 사회이다.
10. 경쟁하는 목적을 없애면 경쟁은 없어진다.
11. 경쟁을 없애려면 학벌 사회를 없애야 한다.
12. 학벌은 대학교의 등급으로 정해진다.
13. 대학교의 등급을 없애야한다.
14. 대학의 평준화를 해야 한다. - ③
15. 수능은 사람들을 고등학생 때부터 완전경쟁에 돌입시킨다.
16. 그러나 고등학생들은 일찍부터 완전경쟁에 돌입할 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
17. 그래서 준비 없이 완전경쟁에 노출된 대다수 고등학생들이 낙오된다.
18. 사회에도 이미 경쟁은 넘친다.
19. 굳이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일찍 완전경쟁에 돌입할 필요는 없다.
20. 사회에서의 진정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준비기간이 더 필요하다.
21. 완전경쟁에의 노출순간을 고등학교졸업에서 대학교졸업까지로 늦추어야 한다.
22. 대학교 진학까지 경쟁은 최소화해야한다.
23. 그 방법은 대학 평준화이다.
24. 그러나 대학의 완전 평준화는 대한민국에서 단기간에 현실화하기 힘들다.
25. 처음부터 완전 평준화까지는 힘들더라도 너무 벌어진 대학의 스펙트럼은 좁혀야 한다.
26. 점진적으로 대학의 평준화를 해야 한다. - ④
① + ② = 수능을 개혁해야 한다.
① + ③ + ④ = 점진적으로 대학의 평준화를 해야 한다.
8. 힘은 있는가?
고작 10대 후반에 불과한 '우리' 개개인은 사회적 약자다. 투표권도 없고,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발언권도 적다. 아직까진 스스로를 건사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 '우리' 개개인은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용한 실질적 힘이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는, 도와줄 아군이 필요하다.
(역사가 프랑스의 68혁명과 우리나라의 4.19혁명에서 대표적으로 증명하듯, 개개인으로 보면 보잘 것 없던 학생들도 거대한 무리 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9. 아군 찾기 : 그들은 우리들과 같은 집에 산다
없을 것 같지만, 주위를 잘 둘러보면 '우리'에게도 든든한 아군은 충분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집 안에 함께 살아가는 '그들' 말이다. 이 체제를 만든 '그들'.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이었다.
부모님. (난 그러지 마시길 바라지만) '그들'은 '우리'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살아가신다. 만약 부모님들이 '우리'들이 현재 불행하다는 걸 정말로 이해하게 되신다면, '그들'은 이제 우리 편이다. 현 고2, 고1, 중3 학생들의 수는 대략 200만 명. (2인 자녀 가구가 대부분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는 한 명이 부모님 중 한 분씩 손 붙잡고 나온다면 약 200만 명의 아군과 함께 할 수 있다.
형 누나 언니 오빠들. 현 고3, 대1, 대2 분들께 SOS를 쳐보자. 그들도 불과 몇 년 전 겪었다. 이런 걸 '너네도 겪어봐라'할 정도로 인간은 잔인하지 못하다. 이들을 꼬시면 다시 약 150만 명의 아군을 얻는다. 평소 앙숙이던 형에게도 오늘부턴 하루에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건넬 일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을 당선시킨 유권자 수도 겨우 전 국민의 10퍼센트인 500만이다. 그렇다면, 투표력만 있다면, 약 350만, 적은 숫자가 아니다. 물론, 200만의 부모님들과 150만의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평을 듣는 20대'인 선배를 설득시키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몫이다.
10. 목소리 키우기 : 인터넷,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현실의 갖가지 시궁창적 요소들에 공감한다 하더라도, 또는 하지 않았더라도, '그래서 너희 말을 세상이 들어주기나 할 것 같냐?'라고 할 사람들이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는 인터넷 세대다.
나는 가능성을 인터넷에서 본다. 인터넷의 수많은 뜨거운 사이트엔 아직도 뜨거운 이슈에 뜨거운 글이 올라오고, 수백,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리고, 화제가 된다. 화제가 된 글은 각종 언론 매체에도 곧잘 소개된다.
'우리'만큼 어려서부터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도 없고, '우리'만큼 잘 다룰 줄 아는 세대도 없다. 인터넷 공간에 '우리'의 생각을 펼치고, 좋은 글은 열심히 퍼 나르자. 인터넷이 있는 '우리'에게, 공론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11. 협상테이블로 불러내기
'우리'가 앞서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것들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의사를 입시제도에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우리'의 대표가 앉아있는 협상 테이블로 '그들'을 끌어낼 힘이 필요하다.
'우리'의 목소리를 키우는 것도 결국 궁극적으로 '우리'를 '그들'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공론화를 통해 여론에게서 도움을 받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말한 가능한 수단들의 한계는 이것들이 어디까지나 대리인 운동을 부탁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우리'의 생각을 스스로 효과적으로 알리고, 화제를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당사자 운동이 필요하다.
12. 궁극기를 쓸 때가 왔다 : 그것은 '떼쓰기'
'우리'에겐 꼬꼬마 어린 시절부터 '우리'의 바람을 어른들에게 관철시키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던 궁극기가 있다. 하지만 좀 삭았다 싶으면 이런 궁극기를 유치하다고 멸시하고, 심지어 이런 기술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는데, 실은 그것이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바로 '떼쓰기'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지간한 떼는 이젠 통하지 않음을, 오히려 본전도 찾지 못하고 호되게 혼날 것임을, 다년간의 연마를 통해 언제부턴가 본능이 되어버린 특출한 눈치로서 이미 파악했다. '우리'의 머리가 커진 만큼 '그들'의 아량은 줄어들었다. 이제 어지간한 '떼'엔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뜨끔'할만 한 좀 극단적인 '떼쓰기'를 주장하는 바이다.
나는 우리들의 의견을 입시 정책 결정 과정 속에 반영시키기 위하여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전국적인 '생 떼 쓰기'에 동참하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그것은 전국적인 '수능 거부 운동'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것이 '우리'의 힘과, 무기와, 방식과, 화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3. 극복해야할 죄수의 딜레마
내가 주장하는 '수능 거부 운동'은 온전히 실현될 경우 '그들'을 불러내는 데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들의 근본적 원인들을 파고 들어가 보면, 거의 모든 문제들은 결국 '죄수의 딜레마'로 귀착된다. 이것은 '수능 거부 운동'이 전개된다면 그것의 최대 취약점이 될 것이다.
찾아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던 선배들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거기서 한 번 놀랐고, 그런 게 있었다는 것조차 '우리' 대부분이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다시 (더욱 크게) 놀랐다. 그만큼 선배들은 스스로를 알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원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수능 거부는 죄수의 딜레마를 이겨내지 못했기에 소수로 끝났고, 다수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결국 성공하지도 못했다.
나는 '우리'의 의견을 반영시키기 위해, '행동할 자신은 없지만 소리를 내고 지지를 보내는' 동조자가 전체 수험생의 50퍼센트 정도인 약 35만 명 정도,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수능 시험장 입장을 거부하고 시위할' 동조자들은 하다못해 최소 1만 명이라도 존재할 수만 있다면, 수능 거부 심리가 전국적으로 확장되면서 2011학년도 수능을 충분히 파행으로 몰고, '그들'을 긴장시키고,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수록, 죄수의 딜레마는 점점 더 쉬워진다.
※반박 잠재우기 ③ : '수능 거부'는 패배자들의 변명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능 거부 운동'이 체제에 부적응한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라고 그 의미를 축소시킨다. 그러나 전국 수험생의 20퍼센트만이 성공하고 80퍼센트가 실패하는 상황에서, 하위라 할 수 없는 하위 80퍼센트에 들었다는 이유로 '패배자의 변명' 운운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
14. 결론
27. ① + ② = 수능을 개혁해야 한다, ① + ③ + ④ = 점진적으로 대학의 평준화를 해야 한다.
28. '우리'의 의견을 반영시키기 위해선 '그들'과 이야기해야 한다.
29. '그들'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내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30. 그런데 '우리'는 투표권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낮고, 발언권도 적은 사회적 약자이다.
31. 그러나 '우리'는 경험적으로 우리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던 궁극기가 있다.
32. 그것은 '떼쓰기'이다.
33. 어지간한 떼쓰기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34. 그들이 뜨끔할 만한 좀 더 강력한 떼쓰기가 필요하다.
35.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강력한 떼쓰기는 존재한다.
36. 그것은 '수능 거부'이다.
'우리'는 현재 완전경쟁으로 인해 불행하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하길 원한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선 수능 개혁 + 점진적 대학의 평준화가 필요하다. 이를 '그들'에게 관철시키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능 거부'이다.
전국의 고딩레탈리아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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