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언론인의 반성 민주당이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둔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원들 못지않게 패배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파헤치기에 열 올리던 언론인들이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오버홀서는 언론이 심판자의 역할을 자임하던 종래의 오만을 반성할 기회라고 말한다. 언론은 사실을 만들어내는 기관이 아니라 전달하는 기관일 뿐이며, 그것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실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는 선거 몇 달 전부터 클린턴의 스캔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오버홀서는 지적한다. 대통령을 평가하려면 대통령 업무의 수행 실적을 보면 됐지, 사생활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유권자들의 뜻을 언론이 묵살해 왔다는 것이다. 워터게이트의 환상에서 언론인들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자아비판이다. 언론의 영향력이 미국 못지않게 막중해진 우리 사회에서도 깊이 음미해볼 만한 지적이다. 특히 <조선일보>와 최장집 교수 사이의 사상 검증 논쟁에서 요긴한 문제점들이 겹쳐짐을 느낀다. 공인 자격의 검증은 언론의 임무라고 신문 측은 주장한다. 그런데 이번 검증 대상은 공인으로서의 활동이 아니라 학술 문헌이다. 학술 활동 내용을 검증하려면 학술적 방법에 따라야만 한다. 갈릴레오의 종교재판도 당대 일류 학자들의 견해를 수집했다. 거두절미한 표현 몇 가지가 '사회 통념'에 벗어난다고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문제 삼은 것은 '심판자' 역할의 자부심이 지나쳤던 것이 아닌가 반성이 필요한 일이다. 독자의 관심에 충실히 부응하려는 자세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온 국민의 관심은 경제난 극복과 남북 관계의 전개 등 미래의 문제에 쏠려 있다. 중요한 과제에 사회의 관심이 제대로 모이지 못하고 있는 때라면 언론이 이를 어느 정도 일깨워줄 수도 있겠지만, 철 지난 파당적 정쟁이나 냉전적 대립 사고의 부활에 언론의 사명을 걸 수는 없다. 분쟁을 토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언론 최고의 사명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오버홀서는 술회한다. 이 또한 오늘의 한국 언론이 깊이 새겨들을 말이다. 칼에도 활인(活人)의 칼과 살인(殺人)의 칼이 있듯 펜에도 살리는 펜과 죽이는 펜이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언론이 추상같은 자세로 절대 권력 앞에 맞서주기를 국민이 원했다. 그러나 이제는 심판자보다 봉사자로서의 언론을 독자들이 바라는 시대가 되고 있다. |
2001년까지 10년 동안 정규직은 아니라도 객원 연구위원, 객원 논설위원 등의 위치에서 <중앙일보>에 의지해 활동했다. 1998년 말에 쓴 위 글도 <중앙일보>에 실었던 것이다.
1990년 교수직을 그만두면서 꼭 언론계에서 일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중앙일보>에 칼럼을 쓰게 되었고, 그 인연에 대해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중앙일보> 일을 하는 동안에도 '조·중·동'의 지나친 보수성을 비판하는 얘기는 있었다. 그러나 내겐 그리 큰 문제가 느껴지지 않았다. <중앙일보> 색깔을 의식해서 펜을 굽힐 필요를 거의 느낀 일이 없다. 거기 썼던 글을 여기 옮겨 담아 놓아도 별로 어색한 느낌이 안 든다.
2006년 귀국한 후에도 <중앙일보>를 당연히 구독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보는 이 신문이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몇 달 받는 대로 쌓아놓기만 하다가 결국 구독을 끊었다.
<중앙일보>에서 함께 일하던 유영구 선생을 몇 해만에 다시 만났을 때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 일이 생각났다. "유 선생, <중앙일보>를 한참 안 보다가 보려니까 왜 그렇게 읽기 힘들지? 신문이 바뀐 걸까, 내가 바뀐 걸까?" 유 선생이 크게 웃고 대답한다. "선생님, 그때는 정운영 선생님도 <중앙일보>에 글 쓰실 때였어요."
나보다 <중앙일보>가 더 많이 변한 모양이다. 허기야 나는 몇 달 전 이 자리에서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하던 중에도 스스로 밝힌 것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보수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앙일보>가 보수에서 수구로 그 사이에 바뀐 것일까?
<중앙일보> 일을 하던 당시 함께 '조·중·동'으로 불리면서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사이에 큰 차이를 느끼고 있었다. 위에 옮겨놓은 글도 <조선일보>의 색깔 논쟁 비판한 것을 <중앙일보>에 올리는 데 아무 스스럼이 없었다.
그런데 귀국 후 몇 달 동안 받아본 <중앙일보>는 <조선일보>를 많이 닮아 있었다. 괜찮은 보수 신문이었는데, 아깝다. 아깝기는 하지만 그리 크게 상심하지는 않는다. 이념 문제가 아니라 전술 문제이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기만 하면 원래 면목을 회복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정작 큰 실망을 느끼는 것은 '진보 신문'의 변하는 모습이다.
<중앙일보> 끊은 후 2년간 신문 구독을 않고 지내다가 작년 촛불 사태 중에 <경향신문> 구독을 시작했다. 촛불 현상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가 바뀌면서 <경향신문>도 자꾸 읽기가 힘들어졌다. '박연차 게이트' 빨대질에 누구보다 덜 빨아먹을까봐 안달이 난 꼴이었다. 오늘(5월 29일) 아침 만평에 김용민 화백이 "받아쓰기식 중계 만평 책임을 통감하며 반성합니다" 하는 반성문을 올렸지만, 그게 시원찮은 짓이란 사실을 이제 와서 알았단 말인가? 1년 전엔 괜찮은 신문 같아 보이던 것이 1년 뒤에 이런 '찌라시' 꼴을 보이는 건 웬 까닭일까?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꽤 아는 친구에게 얼마 전 물어보니 '진영 논리' 때문이라고 설명해 준다. 촛불 때는 'MB 대 반MB'의 단순한 진영 구도였지만, 박연차 때는 소위 진보 진영 내의 복잡한 갈등이 신문의 태도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오늘 <경향신문> 만평의 반성문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통해 '노무현 대 MB'의 구도로 갑자기 바뀌는 상황에 놀라 황급히 대응하는 것뿐이라면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며"란 제목의 사설은 실망스러운 쪽을 보여준다. "언론의 책임론"이 몇 줄 들어 있지만, "이른바 보수 언론들"을 가리킨 얘기고, 끝에 "<경향신문>도 그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을 겸허하게 새기고자 한다." 한 줄이 달랑 붙어 있다.
이것이 정말 "겸허하게 새기는" 자세인가? 언론답지 못한 꼴을 그 동안 보인 데 대해 일 터지고 1주일이 다 된 지금까지 새겨놓은 것이 아직 없어서 이제부터 새기겠단 말인가? 몇 달 동안 노 전 대통령 관계 보도 자세를 놓고 "이른바 보수 언론들"과 자신을 차별화할 의미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오버홀서가 반성한 자세를 보라. 그를 비롯한 미국 언론인들은 허위 사실을 내세운 것도 아니고 도덕적으로도 정당한 방향으로 펜을 놀렸다. 기사와 논설을 통해 미국을 더 정의로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뜻이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을 때 "분쟁을 토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언론 최고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오버홀서는 반성했다.
내가 왜 '조·중·동'은 놔두고 하필 어려운 여건에서 좋은 신문 만들려 애쓰는 <경향신문>에게 투정을 쏟아내나? <경향신문>이 한국 사회에서 '조·중·동'보다 더 중요한 신문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분도 신문 보고 마음 상했다면 '조·중·동' 보고 상했겠는가?
그리고 좋은 신문 만들기에 진정으로 열악한 여건 가진 게 '조·중·동'이다. 돈 사정은 좋은 신문 만드는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조·중·동'은 돈 사정 한 가지가 우월한 대신 다른 중요한 조건들이 그에 희생당하고 있다.
<경향신문>이 '조·중·동'보다 더 좋은 신문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조·중·동' 따라서 빨대질을 하나? 자기 진영, 그나마 '진보 진영'을 잘게 쪼갠 좁은 파벌에 공헌하는 것과 언론의 기본 사명에 충실한 것, 어느 쪽을 바라볼 것인지 통렬한 반성을 바란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내가 진보 신문을 자처하는 <경향신문>을 왜 구독하는가? 한국에서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의 구분에 큰 의미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찌라시와 신문의 차이다. <경향신문>이 '진보'에 집착하기보다 '좋은 신문'을 만들어주기 바란다.
지금 같아서는 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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