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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정복길 따라, 조선 선비 유학길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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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정복길 따라, 조선 선비 유학길 따라

'국토학교' 제1강…한반도에 상상력 덧칠하기

여행의 제1원칙으로 '아는 만큼 보인다'를 꼽는다면 두 번째로 '상상하는 만큼 보인다' 정도면 그럴싸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그러면서도 역사 유적이 많이 훼손된 나라를 여행할 때는 상상력이 더욱 중요하다.

1973년 한국 땅의 숨은 이야기를 캐낸 기행문 <작가기행>을 쓴 소설가 박태순 씨가 교장선생님으로 나선 '국토학교'의 현장 강의는 과거 한반도 역사를 상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본래 모습이 사라진 길은 약간의 상상력을 더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한국을 재발견하는 국토기행'을 모토로 열린 국토학교는 4월 25일부터 이틀간 열린 제1강 '남한강 뱃길 따라, 영남대로 옛길 따라'를 시작으로 매달 마지막 주말마다 1박2일 코스로 열린다. 이번 강의에는 여행작가인 김우선 시인이 참가해 아름다운 국토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5월 열릴 제2강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삶을 되짚어보기 위해 '영남 전통마을 기행'이라는 주제로 경북을 답사할 예정이다.(☞문의는 인문학습원(바로가기)으로)

▲문경 고모산성 길을 밟으며 학생들은 교장선생님(박태순 소설가)과 수백년 전 봄내음을 맡았다. ⓒ김우선

구불구불 강길 따라 고구려 전성기 따라

강의는 드라이브 코스로 잘 알려진 양수리(두물머리)에서 여주 이포나루로 이동하며 시작했다. 금강산에서 출발한 북한강과 강원도 검룡소(儉龍沼)에서 흘러내린 남한강이 합친 뒤 여주를 타고 내려오면서 곡창지대를 어루만지며 흘렀다.

이포나루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이 인근 파사산성(婆娑山城)이다. 성터에 올라보니 왜 당시 이곳을 두고 삼국이 그처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지 짐작 가능하다. 좌우로 너른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남한강이 손에 잡힐 듯하다.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남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때 전성기를 맞았고, 잃은 후 국운이 기울었다.

▲충주에 왔다면 지방 별미인 사과국수를 맛보는 것도 좋다. 사과의 상큼한 맛이 김치를 곁들인 양념과 제법 잘 어울린다. ⓒ김우선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여주에서 충북 충주로, 고구려 전성기를 뒤따라 간다. 장수왕(長壽王, 394~491)이 남방을 공략한 후 세운 '중원고구려비'를 지나칠 수 없다. 중원(충주)을 차지한 고구려왕이 오랑캐(夷) 왕(신라)에게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듣지 않자 크게 화를 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힘이 미약했던 신라를 당시 고구려가 마치 속국처럼 부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힘을 맛본 후 국원나루, 곧 남방 공략에 성공한 고구려가 중원을 중시해 설치했던 국원성(國原城) 인근으로 향했다. 새파란 호수 위에는 조정경기시설이…. 아니, 조정경기장이 여기에?

슬픈 로맨스, 옛 정취 따라 감도네

"국원나루터는 전성기 고구려 최고의 군사전략지로 역사적 가치가 상당해요. 그런데 지금 충주시는 조정경기장 조성한다고 이렇게 중요한 지역을 방치하고 있어요. 만약 한반도대운하 계획마저 실행되면 남한강을 따라 내려오는 이 유적지들이 초전박살 납니다."

교장선생님이 이동하는 버스에서 울분을 토한다. 정치, 이념문제는 버리자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대운하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를 들으며 제천 옥순봉(玉筍峰)에 이르니 통일 직전 국운이 힘차게 뻗어나가던 신라시대로 들어선다.

▲천하절경이라는 옥순봉에 오른 아버지와 아들은 무얼 보았을까. ⓒ김우선

'단양팔경' 중 하나인 이곳에서는 그 옛날 슬픈 로맨스가 꽃피었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았던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이 17세 되던 해 나제동맹의 파트너였던 백제 성왕(聖王, ?~554)의 딸을 첩으로 맞으며 이곳에 하림궁(河臨宮)을 지었다. 사랑하는 딸을 내줘야 했던 백제왕의 서러움과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한 그 딸의 아픔이 진하게 느껴진다. "남한강 따라 내려오는 역사만 드라마로 만들어도 적벽대전 못지않게 박진감 넘칠 거다"는 교장선생님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시간가량 봉우리를 오르니 절경이 펼쳐진다. 녹색인듯 옥색과도 같은 물 위로 새하얀 유람선이 지나가고, 주변에는 깎아놓은 듯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푸른 나무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진흥왕은 물론이요, 단양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 1501~1570)이 나이 쉰이 다 돼 이곳에서 17세 꽃다운 나이의 관기 두향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만하다. 역시 백제 성왕을 추억하듯, 이황이 부럽다기보다 두향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하늘재. 한두시간 정도 걷기 좋다. ⓒ김우선
한국이 이렇게나 아름답다니

이튿날. 전날 남한강을 따라 삼국시대를 밟았다면 이날은 백두대간을 따라 충청도에서 경상도까지, 고려부터 조선시대 역사를 걸었다.

백두대간을 따라 죽 늘어선 월악산,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백화산, 이만봉, 군자산, 속리산, 민주지산, 덕유산은 옛날 삼국의 영토를 갈라놓았고, 역시 태평스럽게 남쪽으로 내려오던 남한강 물줄기를 단양 지경에서부터 서쪽으로 돌려놓았다. 국토 중앙지대에 산맥이 거대하게 늘어선 탓에 인력과 물자가 오갈 때마다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방불케하는 어려움이 있었을 터이다.

첫 답사지는 충주 중원 미륵사지.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그의 사돈인 충주 호족 출신 유긍달(劉兢達)이 경주 석굴암을 모방해 호국사찰로 지은 곳이다.

옆길로 난 하늘재가 걸을 만하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산길인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속세와 이별한 느낌이다. 울창한 숲이 우거져 햇빛을 보기 힘든 와중에 산새 소리를 들으니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싶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70대 학생이 커다란 사과를 손에 쥐고 싱글벙글 웃는다. 사연을 들어보니 연등을 달면서 만난 보살에게 선물받은 것이란다. 개신교도이지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쩨쩨하게 이런 걸로 화내실 분이 아니라는 말이 평온해진 날씨처럼 푸근하다. 최고 연장자가 선물받은 사과를 쪼개 열세 살 최연소 학생과 나눠먹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아이고~선비들이 유곽에 눌러앉은 이유를 알겠구나

뒤이어 간 곳은 문경새재(조령, 鳥嶺). 예부터 중부지방과 영남을 잇는 교통 요지였고, 큰 전쟁마다 숱하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군사요충지이기도 하다. 뒤늦게 역사의 소중함을 깨달아가면서 제3관(조령관)-제2관(조곡관)-제1관(주흘관)이 복원됐다.

당시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문경새재 외에도 추풍령과 죽령이 있었다. 그런데 선비들은 추풍령으로 가다가는 추풍낙엽처럼 시험에 떨어지고 죽령으로 가다가는 시험에 미끄러진다 해 오직 문경새재만 지나갔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고시생의 스트레스는 매 한가지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면서도 그들의 애환이 마음 아프다.

▲어머니와 딸이 밟은 이 길은 그 옛날 이름모를 선비의 금의환향 길이다. 누군가에게는 슬픔의 낙향길이었을 터이다. ⓒ김우선

참가 학생들은 3관에서 1관 방향으로, 즉 충청도에서 경상도 쪽으로 걸어갔다. '과거급제한 선비들은 금의환향(錦衣還鄕)했겠지만 청운의 꿈을 접어야만 했던 이에게는 눈물의 길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숨이 가빠온다. 아무리 걸어도 오르막길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아이고, 이거 장원급제해도 고향가기 무서워서 진짜 금의환향했을까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3관 문을 지나니 곧바로 휴게소가 눈에 들어온다. 감자전, 파전, 막걸리 따위를 판다는 간판이 커다랗게 붙어있다. 구수한 냄새에 절로 허기가 오고 발길이 이끌린다.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 중 상당수가 오르막길마다 있었을 법한 기방이나 주막에 머물러 앉아 시험은 새까맣게 잊고 술과 노름에 빠졌으리라.

서둘러 온 덕분에 빨리 트래킹을 시작했지만 버스에 오르니 예정시간보다 10여분이 지난 오후 1시10분이다. 내려오는 도중 자연을 벗삼아 작곡가 유승엽 씨의 오카리나 연주를 들은 터라 시간지연이 아깝지 않다.

개발만 말고 자연보전 합시다

마지막 코스인 문경 고모산성(姑母山城)으로 이동했다. 성터는 물론, 인근으로 난 토끼벼리길까지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토끼벼리길은 태조 왕건이 길을 못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마침 조그마한 토끼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갔다던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그만큼 험하다.

옛 유적지를 걸어보는 느낌은 좋았으나 아쉬움도 적잖았다. 성터를 설명하는 문구는 문경시에서 적극 홍보하는 카트경기장에 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터 역시 시멘트칠이 덕지덕지된 모습으로 복원돼 크게 거부감이 일었다. 당시 느낌을 그대로 살려야 하는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복원이 한창인 고모산성. 쓰인 돌의 형상과 축성법이 완전히 달라 이질감이 느껴진다. ⓒ김우선

이틀간의 짧지만 빡빡했던 일정을 모두 끝내고 버스로 돌아가니 십대부터 칠십대까지, 가정주부에서 최고경영자에 이르는 다양한 학생들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가득하다.

물론 기자처럼 일정을 따라가기 버거워 트래킹 코스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도 있었고, 이 때문에 다음달 열릴 제2강에 참가할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는 장난섞인 푸념도 나왔지만 대부분은 "다음에는 친구도 데려와야겠다"는 말들을 나눴다.

문경새재 트래킹이 끝난 후 막간에 들은 교장선생님의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문경새재를 보세요. 옛날 박통 시절에 도로로 내려고 하다가 대통령 지시로 사람만 걷도록 한 곳이에요. 지금 얼마나 막대한 경제적 가치가 있습니까? 휑하니 도로가 뚫렸다면 아무도 이곳을 주목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연이 이렇게 소중하고, 역사의 숨결을 보존하는 게 이렇게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옥순봉에서 내려다본 전경. '개발만 말고 자연보전도 좀 합시다!' ⓒ김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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