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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창도, 서까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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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창도, 서까래도 아니다"

<박원순의 희망탐사 47>충북 옥천 옥천신문 오한흥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를 구분해내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그 영원한 미제는 삶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언론의 숱한 문제들이 언론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켜 그 상황을 어렵게 했는지, 아니면 반대로 언론의 어려운 상황들이 정론직필을 하지 못하게 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언론을 향한 숱한 칼날이 있다. 언론과 언론인들이 억울하든 말든 말이다.

또 그 숱한 칼날 가운데 더욱 더 날카로운 칼날들이 지방언론을 향해있다. 지방언론사와 그 속에 몸담고 있는 기자들의 남모르는 속사정이야 어쨌든 말이다. 어쨌거나 다양한 문제가 있는 게 사실이고, 그 문제들이 전체 언론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불신 때문에 비롯된 문제인지, 아니면 그 불신을 가져온 원인인지 모르겠지만 지방언론사는 참 살아남기 어렵다. 대부분의 지방언론사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지방언론 중에서 광역 언론사보다는 기초단위의 지역언론사는 그 실정이 더욱 어렵다.
▲ 전 옥천신문 대표 오한흥 씨. ⓒ희망제작소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지역언론의 대안으로 떠오른 언론사가 '옥천신문'이었다. 언론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이름이 지역언론사, '옥천신문', 그리고 옥천신문을 만들어낸 오한흥씨다.

그 오한흥씨를 만났다. 세련된 언론인의 모습이 아니라 운동하는 투쟁가의 모습에 더 가까웠고 사실 투쟁가보다는 촌부가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와 낮과 밤을 같이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록이다. 한마디도 놓칠 것이 못된다. 조용히 앉아 이야기 하지 않고 오며가며 듣다보니 다 받아 적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잘 전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녹취를 해서 그대로 들려주는 것일 것이며 둘째로 좋은 것은 이를 다 글로 옮기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매체의 문제와 지면의 관계상 난 그의 주요 이야기를 중심으로 우선 그대로 옮기며 간단한 설명만 덧붙인다. 부디 나의 자름과 나의 부가설명이 그의 말을 듣는데 방해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옥천신문 스토리 - 지역신문도 성공할 수 있다

옥천신문을 떠올리면 오한흥이 함께 생각나고, 오한흥 이름 속에는 옥천신문이 묻어난다.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옥천신문의 이야기를 먼저 전하는 이유다.

옥천신문의 유료 구독부수는 이제 4300부라고 한다. 중앙언론사들은 몇 십만 부라는 이야기가 쉽게 오르내리는데 몇 천부가 대수냐 쉽지만, 옥천군내 다섯 가구 중의 한 가구가 옥천신문을 본다. 하루라도 나오지 않으면 야단이 날만큼 열성독자들이다. 어떻게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는 '섭리'라는 한 단어로 이를 정리한다.

89년도에 군민들이 주식을 사서 자본금을 모아 옥천신문이 처음 선을 보였다. 그때까지도 기자가 권력이었다. 그런데 사실 언론은 주체일 수 없고 그저 매체일 뿐이다. 서까래도, 창일 수 없다. 서까래와 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언론이다. 이 중요한 것을 하지 않고 어느 날 창이 되기도 하고 또는 서까래가 되는 것이 오늘의 대다수 신문이다. 언론과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중요한 점은 언론은 주체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도 주체로 착각하고 제도권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세대의 문화였는지 모르겠다. 서울 지향이고 서울대 지향이고 미국 지향인 그 문화 속에 빠져있었다. 시골에 살면서 좋은 매체를 볼 수 없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도 폭도가 일으켰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옥천신문을 하면서 난 달라졌다. 세 명만 보여도 스승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직원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었다.

88년에 한겨레신문 지국장을 했다. 의식이 있어 한 것은 아니고 한겨레신문조차도 지국을 안둘 정도로 옥천이 소외되었는데 아침 운동한다는 마음으로 맡았다. 본사 사규에도 없는 옥천분국을 시작한 것인데 1년 하면서 '참교육'하는 선생들 만나고 월간 '말'도 만났다. 건강한 매체를 접하며 안경을 바꾼 셈이었다. 오염된 안경을 바꾸니 어느 날 개안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갈등, 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응어리가 터지는 느낌이었다. 한겨레신문과 월간 말을 통해 생각이 바뀌면서 생활 속에서 의식화가 되어갔다.

옥천신문하면서 지역에서의 역할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신문사를 그만둘 때를 생각했다. 주민들이 오해할지 모르지만 직원들은 내 뜻을 알지 않겠느냐. 나아가 독자를 생각해서도 그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무는 건 옳지 않았다. 98년에 최장집 교수 사태를 보면서 조선일보를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난 되게 늦다. 운동가들에게 말한다. 늦깎이를 발굴해라.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


옥천신문을 시작하던 때-미분적분을 하면서 덧셈, 뺄셈은 못하는 우리 사회

한겨레신문의 탄생은 우리 언론사에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옥천신문의 탄생 역시 우리 언론사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민주로 시작한 한겨레신문이 민주언론에 대한 염원이었다면, 군민주로 시작한 옥천신문은 제대로 된 지역신문을 갖고 싶다는 한 운동가와 그에 호응한 옥천군민들의 염원이었다. 그리고 그 옥천신문은 성공했다. 돈을 많이 모아서도 아니고, 수십만의 독자를 확보해서도 아니다. 처음의 그 염원처럼 신문을 통해 마을의 공동체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지역주민과 함께 호흡하는, 독자는 당연히 유료독자이고, 그 유료독자가 열혈독자가 되는 제대로 된 지역신문의 모습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옥천신문의 자본금으로 2700만원이 모였다. 한겨레의 사례를 배워 군민주로 했다. 1987년 당시에는 암흑 같던 시골지역에서 벌인 무모한 시도였다. 막걸리 사주는 셈치고 준다고 하는 심정으로 준 돈이다. 나머지는 할 수 없이 부담했는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주주의 형태로 가게 됐다. 촌놈이라서 예탁했다가 반환해도 된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무튼 옥천신문을 통해 매체의 역할을 알았다. 그나마 일찍이 알았다.

경영은 법보다 상식으로 갔다. 문제가 되면 법을 따져 보는데 어쩌면 무모할 테지만 내 방식의 경영이다. 사람들은 터프하게 보는데 사실은 나름 섬세하다. 굉장히 용의주도한 편이어서 오히려 반대의 모습으로 가고 있다. 처음에는 끗발 부려보자고 한 것인데 그러면 인생망치는 것이라는 것도 배웠다.

특히 장호순 교수 같은 분들을 만났다. 촌지 받지 말라,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냥 꾸준히 실천했다. 장호순 교수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은 너무 쉽게 이야기를 해주는 점이다. 우리사회는 미분이나 적분은 잘하는데 오히려 덧셈, 뺄셈 못하는 병에 걸려 있다고. 국제이해는 대학원 수준인데 촌지 받는 것은 초등학교 수준이다.

배달사고 나면 신문 들고 바로 뛰어 간다-고객감동으로 확장하다

어떻게 보면 신문은 단순하다. 제품이 하나뿐이고 가격도 1년 내내 간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간다.

아주 여유롭게 사장 행세하며 구독자 늘리러 다녔다. 배달사고 전화 받으면 바로 들고 뛰어가야 한다. 그래야 고객이 감동하니까. 진짜 독자를 주인처럼 섬겼다. 사설에 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부수 한 개 떨어지면 자기 살에 가시 박힌 것처럼 통증 느껴야 하고 부장은 손가락 하나 잘리는 충격, 사장은 손목 하나 끊기는 슬픔을 느껴야 한다. 지역신문사 사장이 '지역유지입네'하며 토호들과 밥 먹고 대우받는데 나는 공식행사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지역 소외주민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러다 보니 논조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늘 강자와 약자가 있는데 무게중심을 약자에 두면 정확히 보게 된다. 하지만 약한 사람을 편들면 힘센 사람한테 나도 맞게 되기 때문에 약자 편을 들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독자기반이 약하면 바로 무너진다. 그래서 부수가 몇 부라는 것을 알리는 것을 극비사항으로 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옥천신문은 발행부수를 정확히 알린다. 정직하게 간다. 독자가 주인이라면서 주인을 속일 수는 없다. 거기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너무 단순한 이야기이다.

사내민주화도 그런 식으로 했다. 재정을 총무만이 아니라 모든 직원이 다 볼 수 있도록 했다. 투명성이 힘이더라. 고객과 주인을 이론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기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자신들이 주인라고 착각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일단 기사를 쓰면 그것은 독자의 것이다.

옥천신문기자는 교만하지만 않고 나태하지만 않는다면 절대적인 위치에 와 있다. 열독률, 영향력 모두 그렇다. 옥천신문 없으면 옥천 사람들은 갑갑할 것이다. 옥천신문 온라인도 유료독자에 대한 부가서비스이다.

종이신문이 주력인데 온라인신문은 무료이다. 고집스럽게 느껴지겠지만 말은 부가서비스지만 옥천신문은 유료다.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인터넷 때문에도 옥천신문 봐야 한다. 음란사이트에도 돈 내고 들어가는데 내 지역 좋은 소식도 무료로 본다면 말이 되겠는가. 어쨌든 나중에 자발적 유료로 가더라.


오한흥류의 풀뿌리운동론-내 자신과의 운동이다

1998년, 한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한 '최장집 사태'라는 게 있었다. 당시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이던 최장집 교수의 사상을 월간조선에서 검증하는 기사를 쓰면서 벌어진 '최장집 사태'에서 강준만 교수는 글을 쓴 기자를 두고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살인업자"라고 비판했고, 월간 말의 정지환 기자는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대해 "마조히즘적 정신분열증상"이라고 지적해 고소당했다. 이로 인해 비롯된 안티조선 운동의 중심에도 옥천이 있었다. 그 운동의 바람은 전국을 타고 흘렀으며 당시 운동의 커다란 조류가 됐다.

80년대 광주가 운동권들의 정신적 고향이었다면, 2000년 이후에는 '옥천'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고 육영수 여사의 고향이기도 한 옥천은 보수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 곳이 조선일보를 상대로 한 언론개혁운동과 주민운동의 성지로 부상한 것에는 옥천신문과 오한흥씨의 역할이 있었다.

지역언론의 희망이 된 옥천신문의 경험을 살려 그는 2006년 3월 5일 조선일보의 창간일에 맞춰 입법전문 신문 '여의도통신'을 창간했다. 이는 오한흥씨에게 운동과 투쟁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운동도 사람끼리 소통해야 한다. 그게 되지 않고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와 다름없다. 이제는 풀뿌리를 돌아볼 때이다. 풀뿌리 문화에 대한 언급은 더 많아졌지만, 진정한 관심은 적은 것 같다. 그것만 살려내면 운동이 잘 된다. 택시 하나를 타도 기사들과 소통을 한다. 인사하면서 때 거르지 않고 식사는 하셨는지 꼬박꼬박 챙기는 게 촌놈방식의 인사법이다.

그러면 어떤 신문 보는지 물어보고 명함도 교환하고 조선일보 절독을 권유하기도 한다. 옥천에서는 공동체적 요소가 살아 있으므로 모두 아는 얼굴이다. 옥천신문의 논조만 보았겠는가. 서로 알음알음으로 한 것이다.
오한흥 씨가 2006년도에 창간한 여의도통신 홈페이지.

정성이다. 진정한 의미의 애정이다. 사랑이다. 상대가 자기사랑이다. 인근 식당과의 관계, 일상용품을 파는 가게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좁은 지역의 운동이지만 조선일보반대운동도 자기 자신의 운동이며 내 자신의 운동이라고 본다.

바둑을 응용하는데 18급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점차 승급하고 승단을 한다. 그래서 18급을 끊으면 1단까지 간다. 구체적으로 한부 떨어뜨리면 확인가능하게 전화번호까지 적고 일기까지 적어야 한다. 실명으로 해야 한다.

절독운동이 보통 일이냐. 식당에 신문을 끊어놓고도 익명으로 하는 경우가 보통인데 이름을 밝힌다면 그건 대단한 일이다. 이를 제안하고, 실천했다. 이 운동을 하기 전에는 옥천에서 팔리는 조선일보가 1500~2000부라고 했다.

광고전단지 뿌리는 부수가 그랬다. 조선일보 지국에서 나를 고발했다. 우리 때문에 100부 떨어진다고 했다. 한나라당 심규철 변호사가 법률자문을 하면서 남은 것이 300부라고 했다. 몇 부 줄어든 것도 중요하지만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정경희 선생이 옥천에 왔다 갔다가 어딘가에 이런 글을 썼다. 옥천이 별천지이고 해방구라고.

책은 한번 뿌려놓으면 계속 본다. 구멍가게고 미용실이고 갖다 놓는다. 조선일보바로보기옥천모임이 만든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옥천'이라는 책자는 바로 이 작은 동네 옥천에서 만들었다. 책 두 장 넘길 때마다 이 옥천의 작은 자영업들의 광고가 쭉 나온다. 작은 가게들이 이 책자에 광고를 실은 것이다. 또 광고를 실은 가게들은 소책자의 배부처 역할을 한다. 거기에다가 이 책자의 제일 뒤에는 옥천역기차시간표가 나온다. 옥천을 다녀가라는 뜻이다.


반딧불은 우리 보러 안 온다.

그와의 이야기는 언론과 운동을 넘어 인생철학으로 자연스럽게 페이지가 넘어갔다. 살아있는 철학, 살아있는 배움, 그는 모든 것을 자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런 시골에서 살면서 이런 일상생활 속에서 많은 지혜를 얻는다. 닭 노는 것, 개 노는 것만 보아도 철학을 배운다. 그러나 책을 읽거나 제도권에나 이런 것에는 취미가 없다. 책을 읽음으로서 간접경험을 통해 얻는 것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평면적이다. 자연 속에서의 지혜는 차원이 다르다. 아지랑이 올라가는 것, 반딧불, 개구리 우는 것 모두가 그렇다. 개구리 소리가 질서정연하다. 개구리 소리 듣고 시끄럽다고 하면 얼마나 황폐화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반딧불 보면 영혼이 세척되는 것 같다. 스스로 정화된다.

밤길 걷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 오는 손님들에게 밤길을 걷게 한다. 갔다 오면 소화 다 되고 노곤하니까 잠 잘 오고 약하게 걸으면 밤길은 두 시간정도 걷게 된다. 청각적인 효과, 시각적인 효과를 통해 스스로 정화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반딧불 보러 가려면 반딧불 일정을 봐야 한다. 반딧불은 우리 보러 안 온다. 발광하는 조건이 있다. 비 오기 전, 비온 후에 발광한다. 휴대폰의 불빛, 자동차의 불빛을 가져가면 만날 수 없다. 우리 시각으로 맞추면 안 된다. 동공을 컴컴하게 맞추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정성을 모으면 그들이 나온다. 마음이 그렇게 되면 저절로 환경운동은 된다.

나는 마흔이 넘어 설렘이 생겼다. 손님 오면 꼭 입구까지 마중 나간다. 그 전에는 재미없어 죽으려 했다. 스스로 목숨 끊으려 했고 머리 깎고 중이 될까도 했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만 해도 엄청나다.

지자체에서 투자유치하면서 기업을 유치하려 하는데 사람 유치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 집만 해도 사람이 엄청 온다. 우리 집 같은 집들이 몇 개만 있으면 사람 엄청 오게 되어 있다.

얼마 전 평택고등학교에서 여기 민박 오겠다고 하면서 프로그램 보내라고 했다. 나는 그런 것 없다고 했다. 설렘만 가지고 오라고 했다. 서울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여기서는 설렘을 가지고 왔다가 감동을 가지고 가도록 한다. 밤길걷기, 아침에 늦잠자기 등 상상하기 어려운 프로그램들이 있다. 1박에 1만 원씩 받는다.

속삭이듯 시위하라

군청에 가서 미화원 불법해고를 항의하기 위해 70일간 시위를 했다. 공무원들은 이불을 펴는 모습에 질겁하더라. 그 앞에서 민원인들한테 엄청나게 친절하게 대했다. 청소부들과 친해졌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모두 친해졌다. 거의 매일 리사이클 수준으로 지냈다. 70일 동안 1인시위하고 나서 군수와 인기투표하면 이긴다. 이불가지고 거의 살았다. 나중에 집시법으로 걸어 내가 1인 시위는 문제가 없는데 왜 거느냐, 이불을 기소하라고 했다.

또 한 번은 신성국 신부님이 청남대 앞에서 시위를 하는데 격려 방문했다. 삼겹살과 고추하고 불판까지 가져갔다. 질겁했지만 나는 이거 가지고 오래오래 하겠다는 뜻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고 했다. 피켓 있어야 시위하나. 속삭이면 안 되는가. 마이크가 있어야 시위하는가.


▲ 옥천신문의 기자들은 여전히 씩씩하다. ⓒ희망제작소

덧붙이는 글 - 오한흥 없이도 옥천신문은 건재하다


오한흥은 전 옥천신문 대표이다. 지금은 여의도통신의 대표로 있다. 그가 없는 옥천신문은 어떨까 궁금해 옥천신문 사무실을 방문했다. 조주현 편집국장과 여러 기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결론은 오한흥이 없어도 옥천신문은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옥천신문에는 10명이 일하고 있고 대체로 수지를 맞추고 있다. 소외계층구독료지원과 학교언론교육지원과 관련하여 지역언론발전기금 일부를 받고 있다. ABC심사결과 구독료 납부율이 73%에 이른다. 구독자들이 꼬박꼬박 돈을 낸다. 옥천신문 기자들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써 낸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신문, 바로 자신들의 신문이 된다. 그러니 열독율이 높다. 오한흥 대표가 지난 해 3월 그만두고 여의도통신으로 나갔지만 별 영향이 없다. 17년 동안 쌓아올린 노하우와 시스템의 힘이다. 여기 기자들 대부분이 외지인이다. 그러니 별 영향 안 받고 무엇이든 쓴다. 이제 독립성은 너무 당연한 일상적 일이 되었다." 여의도통신을 통해 펼쳐가는 오한흥의 독립운동이 여의도에 어떤 새바람을 불러올지 자못 기대된다.
면담일시 - 2006년 5월 28일
면담장소 - 충북 옥천군
면담인사 - 오한흥(옥천신문 전 대표. 현재 여의도통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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