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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 마, X바!"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웃음을 박멸하려던 제국

때는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가 1년도 버티지 못한 채 독일에 항복했으며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 동맹이 결성되고 승승장구하던 시기였다. 창씨개명, 조선어 말살 등이 본격화되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것도 이 때였다. 1937년 중국 침략을 기점으로 일제는 총력전에 돌입했으며 '하면 된다' '(전쟁) 하면 이긴다'로 똘똘 뭉칠 것을 강요했다. 이 살벌한 시기에 웃음을 만들어 퍼뜨리고 싶어 했던 극작가와, 웃음을 박멸하고 싶어 했던 검열관이 있었다. 일본 연극 <웃음의 대학>(2004년 영화화, 2011년 국내 공연)은 이 두 사람의 '삼류' 인생을 얽어 짰다.

한쪽엔 검열관이 있다. 만주에서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험한 일을 하다가 갓 제국의 심장부로 돌아왔다. 비교적 자유로운 '내지'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다. 물론 경관이니만큼 경찰국가 일제에서 권력의 한 구석을 차지한 것으로 나오지만, 자신의 소신에 반하는 행위를 매일 직업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말단 부속품에 불과하다.

그의 소신은 검열이란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를 신봉해서가 아니다. 어떤 작품은 괜찮고 어떤 작품은 불가하다는 식의 판정을 내리는 일 자체가 난센스라는 것이다. 1억이 단결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성전을 치러야 할 비상시국에 무슨 놈의 웃음이란 말이냐, 검열할 것도 없이 모든 희극의 상연을 금지해버리는 게 마땅하다는 것.

그러나 말단 검열관에 불과한 그는 검열 제도를 고칠 힘은 없다. 그러니 자신의 권한 안에서 그 일을 수행한다. 무자비한 검열을 통해 스스로 상연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 대본에 대해서 무리한 수정 요구를 계속 내린다. 심지어는 웃음을 삭제해버리라고까지 요구한다. '웃음 없는 희극'을 요구하는,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검열을 자행한다.

▲ 영화 <웃음의 대학>.

다른 쪽엔 희극 작가가 있다. '웃음의 대학'이라는 삼류 극단에서 그럭저럭 먹고산다. 어떻게 해서든 검열관의 허가를 받아내야 한다. 공연 날짜는 다가오는데 검열 도장을 받지 못했으니 극단주도 배우들도 초조하다. 검열실 밖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들어서자마자 90도로 허리를 꺾어 절한다. 뇌물이랍시고 과자를 사왔다가 면박만 받는다.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검열관이 아무리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밤을 꼬박 새우면서 그에 맞춰낸다. 그 다음날 가져오면? 또 구박만 받고 퇴짜. 천신만고 끝에 통과되는가 싶으면 또다시 새 요구가 제시된다. 동료 배우들마저 분개한다. 그들의 분노는 검열 권력이 아니라 힘없는 희극 작가에게 집중된다. 검열관의 요구마다 백기투항으로 응하는 비겁한 자라면서 작가를 두들겨 팬다. 하지만 작가는 계속 새 각본을 써서 검열실을 찾아간다.

둘 사이의 대립이 이 영화의 주된 얼개이며 재미도 거기에서 나온다. "고국을 위하여(충성을 바친다)"라는 대사를 세 군데에 삽입하라고 검열관이 요구하면, 세 번을 넣은 뒤에 "고깃국을 위하여"라는 대사를 한 번 더 끼워 넣어 웃음을 만든다(일본말에서 '國'은 '쿠니'로 발음되며, '肉'은 '니쿠'로 발음된다. '쿠니'와 '니쿠' 사이의 말장난이다. 말장난이란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 번역자는 '고국'과 '고깃국'으로 순발력 있게 바꿔냈다).

'고국을 위한 충성'이 '고깃국을 위한 충성'으로 뒤바뀌는 것은, 단순한 웃음에 그치는 게 아니다. 사실 전쟁이란 많은 경우 '고깃국'을 위한 것이었다. 한 번도 본 일이 없고 자신에게 어떤 위해도 가한 일이 없는 동족에 대한 대량 학살에 나서는 이 기괴한 일은 흔히 '성전'으로 미화되지만, 기실은 많은 부분 이익을 둘러싼 충돌이다. 물론 병사들의 이익이라기보다는 자본과 국가 권력의 이익이겠지만, 전쟁에서 생긴 이익의 극히 일부나마 병사들의 가족들에게 배분되는 효과는 있다. 그리하여 전쟁이란 '식인'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고국'은 '고깃국'이다. 단순한 말장난처럼 보이는 웃음 속에는 자못 깊은 뜻이 자리한다.

물론 고국과 고깃국의 말장난은 검열관의 엄숙주의를 자극하여 화나게 만든다. 왜 자꾸 쓸데없이 웃음을 만드냐는 검열관의 힐난에 희극작가는 대답한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손이 그렇게 가는걸요." 그렇다, 웃음이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긴장을 해체하고 같이 웃는 자들과 동류 의식을 만들어낸다. 그 자연스러운 웃음에의 충동이 비교적 강력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무리한 요구를 받아도 이를 수용해서 다시 고쳐 쓰는 자, 동료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까지 웃음을 만들고 싶어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런 에너지가 창작의 원동력이겠지.

검열관에게도 기실은 웃음이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도 인간이니까. 작가를 혼쭐내어 쫓아내지만, 혼자 있을 때는 그 대사를 생각해내고 킥킥거린다. 일억이 총 단결하여 천황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워야 한다는, 제국이 강요하고 자신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엄숙주의에는 이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갈등은 검열관의 극적 변화로 귀결된다. 그는 '박멸해 버려야 한다'고 말하던 희극 상연 극장을 찾아가 구경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극본을 더 재미있게 고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그런 경찰관이 어디 있어? 그렇게 하면 부자연스럽잖아. 이렇게 설정하면 어때?" 뭐 이런 식이다. 그래서 검열실 자체가 '웃음의 대학'이 된다. 웃음의 사형 집행장이 웃음의 대학으로 바뀌는 대반전. 검열관은 이 대학의 교수이자 학생이다. 그는 웃음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웃음의 힘을 배우기도 한다. 희극 작가도 마찬가지이다.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배운다. 흔하게 발견할 수 없는, 아름다운 배움의 공동체.

그들은 이제 동지이다. 희극 작가가 징병되어 떠나는 장면. 마지막 인사를 온 작가에게 검열관은 죽지 말고 돌아오라고 외친다. 함께 희극 공연을 올리자고 말한다. '고국'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던, '고깃국'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던, 웃음을 박멸해버려야 한다고 믿던 제국주의자의 전향.

제국은 병사들이 부상당한 채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부상병의 신체는 전쟁의 참혹함을 대중들에게 공개 전시하는 셈이었고, 부상병 치료란 총력전에 집중되어야 할 국가 자원의 '낭비'에 불과했다. 그들은 차라리 죽어야 했다, 가미가제처럼. 전사자는 추앙받았지만 부상병은 외면당했고, 훈장을 단 채로 구걸에 나서야 했다.

그런 죽음을 향해 징병되어 가는 작가의 뒤통수에 검열관이 외친다. 죽지 말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죽지 말라. 웃음이여 죽지 말라. 살아 돌아와서 함께 웃음의 대학을 다시 건설하자고 말한다.

이 연극에서는 희극 작가에게 엄혹한 검열 조건이 주어졌을 때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는 높아졌다. 자신의 직업적 규칙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게 검열하고자 했던 검열관은, 검열이라는 직업적 행위를 통해 오히려 새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웃음과 예술에 감화되고 새로운 세계에 입문한다(웃음과 춤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한 니체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만주에서 노동자를 학대하던 경관이 예술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검열관과 희곡 작가가 만나면서 누구도 혼자서는 쓸 수 없었던 훌륭한 대본이 탄생되었다.

물론 이런 검열관은 실제로는 없다. 그들은 그저 무미건조한 책읽기와 결재 서류와 조사 보고서 작성에 시달리는 서류 노동자일 뿐이다. <웃음의 대학>을 쓴 미타니 코키(三谷幸喜)는 묻고 싶었을 터이다. 검열 권력은 예술을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을까, 예술은 어디까지 사람을 바꿔나갈 수 있을까.

미타니는 예술과 웃음의 감염력 쪽에 거는 셈이다. 극 중의 희극 작가는 검열관의 무리한 요구를 맞춰나가면서 극본을 오히려 더 훌륭한 것으로 만들어갔으며, 검열관은 자신의 직업을 배신한 채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했다는 것이니까. 미타니는 검열의 생산적 효과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검열의 금지를 우회하는 과정에서 예술은 더 훌륭한 것이 될 수 있다.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정신은 단련되고 그 표현 역시 격상된다.

검열관은 '웃음'을 재건하자고 '절규'했다. 이런 희비극적 아이러니는 총력전 체제에의 항변이겠지만, 그다지 외칠 필요까지는 없는 외침이었다. 웃음은 박멸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검열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하지만 그는 죽는다 하더라도 무수한 작가들, 무수한 웃음들은 이어지게 마련이다.

눈물이 동일시에 의해 발생된다면 웃음은 거리감에 의해 발생된다. 눈물이 국가 권력과 개인을 초월적으로 동일시하라고 요구한다면, 웃음은 그 까마득한 거리를 인식하도록 만든다. 숱한 전쟁 미담들이 '거룩한 죽음'을 향해 나아가기를 촉구한다면, 웃음은 그렇게 걸어가던 병사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는 모습에 주목한다. 노모(老母)의 눈물이 눈에 밟혀 뒤돌아보다가 그랬을 수도 있겠지. 여하간 그 순간에 무중력 상태의 관념에서 만들어지는 엄숙주의는 균열되고, 인간은 신체를 가졌기에 중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각인된다.

비극이 귀족의 것이었다면 희극은 별 볼일 없는 대중들의 것이었다. 그들을 살게 하고 위안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었다. 대중들의 삶이란 킥킥거리기라도 하면서 버텨야 했던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웃음이란 흔히 피눈물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

말하다 보니 지금 우리도 비슷하다. <나는 꼼수다>와 '애정남'이 없었더라면 이명박 정권과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사는 일이란 얼마나 삭막했을 것인가. 애정남은 검열을 우회하면서 권력에 대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나꼼수>는 아예 법망의 허점을 이용해서 검열을 받지 않으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애정남 최효종이 "숨만 쉬고 살면 된다"면서 88만 원 세대의 절망을 풍자할 때 젊은이들은 웃는다. 그 웃음의 8할은 피눈물이다. 그 웃음은 지금은 그저 발산이나 위안에 불과하지만 그 에너지는 언젠가 폭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웃음의 대학'은, 징병된 희극 작가의 예정된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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