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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싸우다 박정희가 될 뻔한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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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싸우다 박정희가 될 뻔한 이정희!

[박권일의 '소셜 맥거핀'] '정권 심판'과 '민주주의'

사회의 적대(hostility)는 하나가 아니다. 수많은 적대와 갈등의 전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거기엔 실제로 적대가 아닌데 적대인 것처럼 위장한 적대도 있고, 모종의 이유에서 침소봉대된 적대도 있다. 물론 첨예하고 거대한 싸움들도 있다. 그 중에서 사회의 구성 원리를 건드리는 적대이자, 한편으로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상위에서 규정하는 규칙도 있다. 그 적대는 하나의 대의로 표현된다. 바로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라고 하니까 너무 추상적이고 거대해서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 시대가 "냉소적 이성(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시대여서 더 그렇게 들리는 건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상이 갖춰지고 담금질되어온 개념이다. 현대 정치철학은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이라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이해할 때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을 절차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자꾸만 완성시켜야할 숭고하고 고귀한 목표로, 다시 말해서 미래의 어느 날 마침내 완결시켜 모두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는, 그런 '실체적 과제'로 이해하려 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참 오랫동안 민주주의는 제도나 절차 같은 건조한 대상이 아니라 뜨겁게 갈망하던 숭고한 대상이었다. 글자 그대로 "숨죽여 흐느끼며 남 몰래 쓰는 이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인식은 상당수 민주주의자들과 그들을 탄압하던 반민주주의자들이 사실상 공유하던 인식이었다. 민주주의를 무참하게 파괴해온 독재자들은 민주주의를 한 번도 부정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민주주의를 우리가 실현해야할 궁극적 이상의 하나로 제시했다. 다만 그 고귀한 이상은 때에 따라, 즉 '긴급 상황'이 되면 "잠시 훗날로 유예"할 수 있는 그런 가치였다.

참된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키는 데 있어서는,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분명히 구별해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조화롭게 달성하려는 민주주의의 이념은 모든 민주 국가의 목표요 염원이며, (…) 그러나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와 양식은 나라마다 서로 다를 수 있다. 개인마다 원하는 것이 같더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생활환경과 개성에 따라 서로 다르듯이. (<민족중흥의 길>(박정희 지음, 광명출판사 펴냄, 1978년, 38쪽(<박정희 평전>(전인권 지음, 이학사 펴냄), 174쪽))

박정희의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론'에서 민주주의란, 다른 가치들의 추구를 규정하고 보장하는 사회의 구성 원리라든가 민주적 절차가 아니었다. 그저 '아름답고 고귀한 하나의 가치'였을 뿐이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우선순위를 부여한 다른 가치들과 민주주의를 '경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민주주의관은 1970년대 초반 유신을 선포하면서 전면에 드러나는데,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란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며, 그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조화롭게 달성하려는 민주주의의 이념"처럼 민주주의의 목표를 주로 논의한다. (…) 그리하여 박정희는 만약 민주주의가 개인과 민족의 행복의 증진에 단기적으로 기여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를 "생활환경과 개성에 따라" 상당 기간 유보할 수도 있는, 선택 가능한 여러 방법(제도) 중의 하나로 이해했을 뿐이다. (<박정희 평전>, 331쪽)

이정희 사퇴를 둘러싼 풍경

관악(을) 경선 선거 조작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의 사퇴로 이어진 일련의 스펙터클을 가지고 여러 '결'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지만 사태의 핵심은 무척이나 간명하다. 역시, 민주주의다. 이정희 캠프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선거 부정이 드러났을 때 소위 진보 개혁 진영의 많은 이들이 두 번 경악했다.

첫 번째 경악은 이 선거 부정을 저지른 주체가 다른 정치인도 아닌 '진보 정치인 이정희' 캠프라는 점에서의 경악이었다. 두 번째 경악은 그 명백한 선거 부정을 옹호하는 소위 진보 개혁 진영 일각에 대한 경악이었다. 이정희 캠프와 맞붙은 상대 진영의 선거 부정 의혹을 가리키면서, 혹은 야권 연대와 정권 심판의 대의를 내세우며 사퇴가 아니라 재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식의 억지와 피장파장의 논리가 판을 쳤다.

이 사건은 새로운 형태의 선거 부정 수법이었으며 사법 처벌이 애매하거나 사실상 불가능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사법적 사안인지 여부와 별개로 당연히 정치적 책임을 묻고 처벌을 가해야할 사안이었다. 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토대라 할 공정 선거의 룰을 의도적으로 어기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획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당연히 이정희 후보 사퇴의 요구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정희 측은 재경선을 하겠다고 버텼다. 이정희를 옹호하는 진영은 온갖 이유를 들어 재경선이 답이라 주장했다. 시민들의 비난은 더욱 거세졌고, 여러 정치 세력이 위기감 속에서 사태 해결을 도모하는 듯 보였다. 며칠이 지나 이정희 대표는 결국 사퇴 기자 회견을 열었다.

현실적으로 '사퇴' 아니면 '재경선'이라는 선택지만 남은 상황에서 재경선은 택할 수도, 그리고 택해서도 안 되는 선택지였다. 반칙을 저지른 측에게 몰수패가 아닌 재경기를 할 권리를 주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직관적으로나 결코 '패널티'가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정희 본인은 캠프의 부정행위를 몰랐다고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주장일 뿐이다. 부정행위 당사자와 직접적 이해관계에 있는 이정희의 말을 근거로 사안을 판단할 수는 없다. 더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정희 캠프의 선거 부정행위는 이정희라는 정치인이 책임을 져야한다.

결과적으로 증명된 셈이지만, 이정희의 사퇴는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사퇴로 인해 야권 연대는 극적으로 봉합됐다. 만약 재선거를 치렀으면 엄청난 도덕적 비난과 함께 야권 연대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관점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놓고 볼 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전략적 판단이 아니다. '반칙에 대해 명확한 정치적 책임을 지우는 것'이야말로 전략보다 우선하는 원칙이었다. 이번에는 전략적 선택과 민주주의의 원칙이 다행히 일치하였지만, 대개의 경우 정치 공학적 판단과 민주주의의 원칙은 서로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의미부여할 만한 일은, 우리가 이 혼미한 '아수라장' 속에서도 정치적 경쟁이 넘어선 안 될 선을 간신히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면, 그건 그냥 지는 것이다. 온전한 정신이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 부르지 않는다. 경제 발전과 안보를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민주적 절차를 파괴한 행위를 정당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권 심판이 아무리 우리에게 소중한 대의라 할지라도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고 얻어낸 결과일 경우, 우리는 그것을 민주주의라 불러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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