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과 피케팅이 정면 충돌한 평택역 광장에 택시 한 대가 들어섰다. 쌍용차에서 잘린 뒤 택시 기사로 전업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가 피케팅을 하는 분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이를 지켜보던 사측 관계자가 택시로 다가섰다. 번호판을 살피던 사측 관계자의 말 한마디가 해고자 가족들의 가슴을 송곳처럼 파고든다. "이 차 몇 번이야? 저 택시는 절대 타지 마라." 정녕 사람 사는 세상이 이렇게 망가져도 괜찮은 것일까.
송전탑에서 농성 중인 복기성 씨(쌍용차 비정규직지회 수석부회장)의 집을 찾았다. 아파트 현관에 나붙은 관리소장의 공개 사과문을 읽으며 이곳이 또 다른 전쟁터임을 실감한다. 아파트별로 국정조사 반대 서명 운동을 진행하려다 주민들이 항의하자 서둘러 중단한 모양이다. 여야 대통령 후보가 공개적으로 약속한 국정조사를 뭉개는 모양새도 우습지만, 아파트 관리소장까지 나서서 여론몰이를 하려 드는 꼴은 후지다 못해 꼴불견이다.
▲ 아파트 현관에 나붙은 관리소장의 공고문. ⓒ다산인권센터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민주'와 '민중'
복기성 씨의 집엔 아내 전은숙 씨와 딸 '민주(8)', 아들 '민중(6)'이가 있다. 아들과 딸의 이름을 나란히 붙이면 '민중 민주', 그 속에 아빠와 엄마의 오랜 꿈이 담겨 있다. 아빠는 결혼하기 전부터 딸을 낳으면 이름을 '민주'로 짓자고 친구와 약속했단다. 그래서 민주의 친구 이름도 민주다. 엄마는 아빠가 직접 지은 별난 이름에 토를 달지 않았다.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민주'를 세상에서 아름다운 이름으로 여긴다.
전은숙 씨는 커피 잔을 내려다보면서 2개월 전의 남편을 떠올렸다. 남편은 어디론가 떠날 것처럼 암시하며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아내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길 것을 직감하고 캐물었지만 남편은 "모른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날 밤 잠을 설친 아내는 페이스북을 보고서야 남편이 철탑으로 올라간 사실을 알았다. 5년의 풍파를 겪으며 아내도 노숙과 시위에 이골이 났지만, 철탑 위에서 딸랑 나무판자 하나로 버티는 남편을 보고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가 '아빠는 어디 갔느냐?'고 물을 때마다 '100일 뒤에 온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러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촛불 문화제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어요. 캄캄한 밤중이라 아빠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계속 우는 거예요. 누나가 우니까 동생도 울고, 저도 따라 울고 그랬어요. 다음 날 낮에 다시 가서 아빠 얼굴을 보고 나니까 울음을 그치더라고요."
▲ 민중이와 민주 ⓒ다산인권센터 |
남편은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이 작심하고 싸우러 갈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은 철탑으로 가기 전 아내에게 1년간 잘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라고 말했다.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이기에 아내도 물러서지 않았다. "공장이라도 안 나가면 뭘 먹고 사느냐?"는 아내의 물음에, 남편은 "나를 믿어라. 내가 확실하게 끝내겠다"고 답했다. 남편이 직장을 잃었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5년은 참겠다'고 다짐했던 아내는 "이번에 확실하게 끝내지 못하면 더 이상 당신하고 못 산다"는 말로 남편을 보냈다. 2013년, 올해가 바로 5년이 되는 해다.
복기성 씨와 전은숙 씨는 평택 지역 풍물패에서 처음 만났다. 세 살 연상인 전은숙 씨는 복기성 씨의 열정적인 모습이 좋았다고 말한다. 전은숙 씨도 L제과 노동조합에서 일했던 터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전은숙 씨와 친하게 지낸 L제과 직원들이 거지반 회사에서 잘렸다는 사실에서 그도 남편 못지않은 활동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05년 결혼한 두 사람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도보 순례단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2009년 쌍용차 노동자들이 생사를 건 옥쇄투쟁에 돌입하기 직전 둘째 민중이가 돌을 맞았다. 오순도순 웃음이 넘쳐야 할 그 무렵 복기성 씨는 직장을 잃었고 가족들은 농성장에서 먹고 자며 살았다. 외부인의 눈으로는 농성장에 모인 가족들이 화목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거기 말고 갈 곳이 없던 처지였다. 어제의 동지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새총을 쏘며 대치하는 막장에서 누구인들 온전한 심신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딸 민주에게 먼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말문이 터지지 않는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전은숙 씨는 뒤늦게 언어 치료와 미술 치료를 시작했으나 좀처럼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촛불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는 질문에 대개 아이들은 '생일'이나 '케이크'를 떠올렸지만, 민주는 '종이컵'이나 '촛불문화제'를 그렸다. 닫힌 공장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엄마 곁에서 민주는 날마다 마음의 병을 앓았던 것이다.
생활고보다 힘든 주위의 차가운 시선
▲ 복기성 씨의 아내 전은숙 씨. ⓒ다산인권센터 |
지금 이 순간 전은숙 씨에게 가장 힘든 건 돈이 없는 현실이 아니다. 쌍용차 문제를 바라보는 주위의 차가운 시선이 훨씬 더 아프다. 친정 엄마는 "더 늦기 전에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 채근한다. 무급 휴직자들의 복직 결정으로 마치 쌍용차 문제가 해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가 야속하다. 잇따른 죽음 앞에서 "함께 살자"고 외치는 해고자들에게 수백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회사의 파렴치에 이를 깨물고야 만다.
아주 가끔씩은 남편 생각으로 가슴이 울컥한다. '평택에서 복기성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있을 만큼 남편은 정열적인 활동가다. 그러나 밖에서 열심히 뛰어다닌 만큼 가족들에게는 아쉬움이 컸다. 남들처럼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하는 남편을 자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울렁거리는 가슴을 두드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누구보다 미안해할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 자신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올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생전 힘들다는 소리 한 번 하지 않던 남편이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탑 위에서 두 달 넘게 칼바람을 맞은 사람에게 무탈함을 기대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아내는 비나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감전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뜬눈으로 밤을 샌다. 민주는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리는 3월까지 아빠가 내려왔으면 좋겠단다. 민중이는 아빠와 함께 강원도로 여행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들 모두 오는 26일 오후 희망버스를 타고 아빠를 만나러 간다.
▲ 복기성 씨가 고공농성 중인 송전철탑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
* 희망님은 다산인권센터 벗바리이며, 글을 쓰고 산을 타는 일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 쌍용차로 향하는 희망버스 행사 웹자보 ⓒ다산인권센터 |
- 쌍용차 희망버스 연속 기고 ① "20년 전 신입사원 땐 이렇게 울게 될지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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