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월급 받는 날이다. '월급'이다. 세무서에 가서 면세사업자 등록증을 발급받은 '개인사업자' 신분이지만, 어쨌든 한 달에 정해진 날짜에 '원장'이란 직책의 오너에게 일방적으로 받은 급여이니까, 나는 '월급'이란 명칭을 정정할 생각이 없다.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우리는 '노동자'로 규정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대졸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직업으로 선택하고 있는 '노동자'이다. 학원강사. 정치적으로나 국민 여론으로나 늘 사회적 척결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비정규직이면서도 넥타이를 매고 선생님이라는 호명을 받는 괴리감에 저당 잡힌 '노동자'.
대학 졸업반 시절부터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시작했던 이 일을 한 지 어느덧 칠 년이 넘었고 이제는 '전업'이 되었다. 보습 입시학원에서 정액 급여를 받으며 일하던 시절엔 아르바이트 노동자란 생각을 하기 십상이었지만 수강생들의 수강료 총액을 학원 측과 일정 비율로 나눠 지급받는 비율제 단과강사로 일하면서 나는 '노동자'와 '사교육 개인사업자'의 이율적 배반 속에서 혼동을 느끼기 일쑤였다. 단과강사는 결국 자신의 강의와 프로필을 팔아 더 많은 수강생들을 끌어 모아야 더 높은 수익을 얻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노동자의 범주에 넣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장과 노무 계약을 체결하고 일정한 출퇴근 시각을 준수하며 수업 외적인 업무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선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월급을 월급이라 부르지 못하고
그럼에도 내가 스스로 노동자라고 하는 이유는, 계약서조차 쓰지 않는 것이 관행인 학원가에서 벌어지는 비일비재한 당일해고와 고용보험 미적용이라는 현실 탓이다. 그리고 분필가루를 목으로 코로 삼키어 가며 수업을 하다가, 퇴근길이면 이렇게 울적하고 허한 기분을 달래려 동료 강사들과 모여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여야만 하는 일상만 볼 때, 분명 우리는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자신들의 노동자성을 외면하거나 망각하는 우리 자신에게 있을 뿐.
내가 일하는 이 학원은 경기도의 작은 신도시에 위치한 곳으로, 비교적 안정된 학원운영으로 평판이 좋은 곳이다. 그래봤자 우리는 각자의 사비로 밥을 사 먹고, 퇴직금 따위는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기에 '물론' 없으며, 학생들의 시험대비 기간이면 알아서 시간 외 수당은 '당연히' 없이 주말을 반납하며 보충근무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보습학원의 단기계약 노동자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튼 월급날이었다. 평소 오지랖도 넓고 비교적 친화력이 강한 수학강사 K가 퇴근길의 몇몇에게 술자리를 제안한다. 잠깐의 망설임 없이 나를 포함한 대다수는 바로 콜을 외친다. 언제나처럼 즐겨가던 삼겹살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차는? 대리 맡기려고. 이번 달 돈 좀 들어왔나 보네? 대리도 부르게? 오늘 문과반 수업에 애들은 다 출석했어? 잠깐만, 마누라한테 전화 좀 걸어놓자. 두서없는 웅성거림 속에, 우리는 술집으로 들어간다.
"우리 다 굶어 죽으라는 놈들인데"
고기를 굽고 술잔을 채우면서 아직 취기가 찾아오기 전에 약간의 적막과 어색한 기운이 흐른다. 모두 카운터 옆의 브라운관을 본다. 뉴스 채널 아나운서는 대선 후보들의 교육 정책을 소개하고 있다. 여당과 야당 가릴 것 없이 모두 사교육 억제와 공교육 혁신을 약속한다.
"저런 놈들 누굴 뽑으라는 거야. 우리 다 굶어 죽으라는 놈들인데."
대부분 밋밋하고도 수줍은 표정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우리는 분명 알고 있다. 사교육의 과잉과 입시 교육의 병폐를. 그것은 사실 직접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학교를 파하고 교복을 입은 채로 곧바로 학원 첫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들어와 책상에 앉는, 멍 때리는 아이들의 피곤에 절은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 교육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차라리 저 위정자들이다. 나 역시 사교육이 궁극적으로 사라질 만큼 이 나라에 노동자들이 대접받고 학력 간의 임금 차별이 없기를 바란다.
▲ 학원. (사진은 기고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연합뉴스 |
그러나 그런 말은 개인적 실존의 불확실성과 불안 앞에서 결코 내뱉을 수 없었다. 우리는 교육 모순을 체감하며 인지하는 '시민'이면서 동시에 아무런 공적 차원의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교육 노동자'이다. 정책과 국민 여론에는 사교육 척결은 요란한데, 정작 십 만 명이 넘는 수많은 사교육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과 대책은 없었다. 글쎄, 척결의 대상일 뿐인 학원강사들은 각자 알아서 먹고 살라는 것인가. 그렇다 해도 사실 할 말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정말 깊고 깊은 절망은, 이 사회적 낙인이 찍힌 학원강사들은 어디서 노동권을 주장할 계제도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화는 더 이상 정치권의 교육 공약에 모아지지 않았다. 두세 잔을 주고받을 뿐이었는데, 늦은 시간에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취기가 쉽게 올라온다. 회식의 주최자인 K는 결혼할 여자를 만났지만 학원강사의 불안정성과 노후 불안을 이유로 쉽게 청혼을 수락하지 않는다고 하소연이다. 반면 이번 달 가장 많은 수강생들을 상대로 수업해 꽤 괜찮게 급여를 받은 영어강사 L은 곧 교습소라도 차려야겠다며 다소 거들먹거리는 톤으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나는 이민이라도 갈려고. 다음 달에 와이프랑 같이 회화 학원 등록하려 한다."
이제 나이 오십 줄을 바라보는, 우리 학원에서 원로급 강사로 존경받는 사회강사 P는 갑자기 덤덤히 담배를 피우다 충격선언을 하신다.
"아니, 갑자기 무슨 이민이에요? 그래, 어느 나라로 가시려고요?"
"응, 너희는 잘 모를 거야. 저 코스타리카라고, 중남미에 있어."
"거기 알아요. 우리 은근히 무시하시네? 근데 거기 가서 뭐 하시고 사시려고?"
"응, 게스트하우스. 외국 관광객들 상대로 숙박업 하는 건데, 우리나라하곤 좀 다르지."
평소 점잖고도 과묵한 P선배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민 프로젝트로 일순 화제가 집중되었다. 나는 술잔을 채워드리며 이야기를 계속 보채고 있었다.
"선생님, 하고 많은 나라들 중에서 굳이 그 쪽을 택하신 이유라도?"
가볍게 건성으로 단문 대답을 하던 선배는 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실린 궁금증의 진의를 알기라도 한 듯, 담배를 끄곤 술잔을 들이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코스타리카로 이민 가려는 이유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그 나라에서 일을 했었지. 요즘이야 가족 전체가 그리로 이민 가서 살았겠지만 나 때만 해도 그런 거 상상도 안 했거든. 아버지야 그저 어머니에게 나 잘 가르쳐서 서울대 보내자 하면서 생이별을 하신 거지. 아무튼 그래도 일 년에 한 두 번씩은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그리로 불렀지. 너희들은 내가 그 나라 풍광에 매혹된 걸로 생각할 텐데 사실 그게 아냐. 물론 그 나라 경치야 말할 게 없지. 에메랄드 빛 카리브 바다, 장엄한 휴화산, 그런 경치야 사진 보면 그만이고 여행으로 족할 거 아니냐.
정작 내 생애에서 잊히지 않았던 건 아주 사소한 목격 탓이야. 아버지가 그 나라 현지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봉제공장에 계셨거든. 그쪽 나라 애들이야 뭐 알겠지만 우리보다 경제력이 한참 낮지. 그 애들은 주급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한 주치의 급여를 받는데 희한한 건 다음 월요일이면 다들 빈털터리 신세라는 거야. 사내에 마련된 구내식당에서 식권 사서 밥 먹는 놈들이 없었다고. 다들 과일이나 또르띠야(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지역에서 주로 먹는 음식. 우리나라의 '호떡'과 비슷한 모양의 간식 이름)를 각자 도시락으로 싸와서 먹더라는 거지. 그래서 비록 통역을 통해서이지만 내가 한 노동자랑 이야기를 나눴거든. 당신들은 대체 돈을 벌면서 왜 돈이 없냐고. 그랬더니 그 노동자가 그 특유의 낙천적인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 게 있었는데. 난 그 말에 내 인생의 궤도를 바꾼 거지.
걔네 말은 이런 거였어. 왜 돈을 모으냐고. 왜 저축을 하냐고. 되레 반문을 하더라 이거야. 우리는 휴식이 주어지는 주말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과 함께 춤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 행복을 누릴 만큼의 돈을 벌 회사가 있고 이곳의 노동을 통해 삶을 꾸려갈 권리가 있다고. 거기는 우리나라만큼 잘 살지는 않아도 여기만큼 비정규직이 만연한 나라도 아니거든. 암튼 그러는 거야. 돈이라는 게 행복하게 살려고 버는 건데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왜 돈을 모으며 아등바등 사느냐는 거지. 돌아오는 한주의 월요일 아침이면 또 새롭게 일할 맛이 난다는 거야. 행복한 삶을 뒷받침해줄 노동의 한 주가 온다는. 뭐 그런 식의 이야기였지.
그게 어떤 거냐면 말이야. 마치 그 애들은 삶을 하나의 원을 그리듯 산다는 느낌이었어. 비록 더 나은 내일은 없지만, 늘 둥글고도 풍요로운 원처럼 반복되는 오늘을 맘껏 누리다 죽는. 그런데 우리는 뭐냐는 생각이, 그 어릴 적에 막연히 들었던 것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깊어지는 거야. 보라고. 우리가 사는 게 이게 사는 건가? 죽으라고 머리 쥐어짜면서 공부해서 나나 당신들이나 그럴 듯한 대학 나왔지만, 지금 하는 게 뭐야? 우리는 정반대로 살지 않냐 이거야.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고 근거 없는 희망을 갖고, 이 빌어먹게도 끔찍하게 치고받는 전쟁터에서 오늘을 모두 유예시키고 차압당하지 않느냔 말이지. 자네들. 우리는 그저 저 욕망과 자본이 만든 허울뿐인 교육 시스템에 묶인,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사교육 노동자들일 뿐이야. 착각하지 말자고. 난 그동안 무력했고 늘 불안했어. 이제 다 끝나가는 것 같네. 훨훨 떠날 거야. 비정규직이,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노동이 왜 비참한 지 알아? 그건 사람이 자신의 존엄을 저 돈과 신기루 같은 '내일'에 팔아버리기 때문이지. 아, 내가 너무 말이 많았구먼…. 원, 이거 참.
… 그런데, 한 가지는 기억하라고. 나처럼 떠나는 게 상책은 아닐 거 아냐. 희망은 막연한 게 아니야. 늘 구체적이지. 구체적으로 희망을 꿈꿔 보자고.
분노와 저항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내게 빠진 것은…
선배 P의 장광설에 모두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고기를 집어먹기 일쑤였다. P는 내게만 알아듣겠냐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이킨다.
나는 P를 비난할 마음도, 이 이야기를 외면하는 동료 강사들을 경멸할 마음은 없다. 다만 희망은 늘 구체적이라는, 그 마지막 전언만은 기억하고 싶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 언제나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거리에서, 가슴에서, 외쳐왔다. 불안정노동을 만든 자본과 권력에 대한 분노와 저항으로 세상을, 나의 현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작 결여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구체성'이었던 것이다. 모든 구체의 다양한 결을 쓰다듬고 이해하며 온몸으로 호흡하는. 비정규 노동자의 문제는 저 뉴스와 집회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바로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들이라는 것을. 푸념과 불합리한 노무에 대한 쓴웃음 주고받는 술자리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P처럼 훨훨 저 그만의 낙원으로 날아가는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담론이 아닌, 생활의 이야기를. 생활의 비루함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동료 강사들의 빈 술잔을 하나하나 채워가면서, 희망의 서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알 수 없으면서도 분명한 '구체적 약속'을 다짐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 글의 원제는 <월급 받던 날>입니다.
2012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 수상작 ① "시민들에게 욕먹는 우리는 다산콜센터 상담원입니다" ② 사랑하는 나의 여인들과 반드시 돌아가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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