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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 '홍길동'이 나타났다

[기고] 오사카부(大阪府)의 보조금 정지 문제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한다

홍길동, 오사카에 나타나다

지난 6월16일, 오사카 시내에서 '오사카 조선학원를 지원하는 오사카 부민기금' (별칭 홍길동기금)의 발족집회가 열렸다. 조선시대 민중의 영웅인 홍길동이 위기에 직면한 조선학교 아이들을 돕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현대의 일본 오사카에 나타난 것이다.

홍길동기금의 설립 배경에는 일본정부·오사카부·오사카시의 차별적 정책으로 오사카 지역의 조선학교가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직면한 사정이 있다.
▲ 일러스트레이터 노신부 씨가 그린 홍길동기금의 캐릭터. ⓒ후지나가 다케시
조선고급학교가 일본정부의 '고교무상화' 제도의 적용에서 제외된 상태로 2년 이상이 지났다. '무상화' 적용의 필요조건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심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어 조선고급학교만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오사카부에서는 일본정부의 '고교무상화' 정책에 맞춰 사립고등학교 학생에 대한 수업료 보조를 확충시켰기 때문에, 공립·사립을 막론하고 일본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은 수업료가 면제되게 되었다.

조선학교에 다니고 싶어도 학비가 부담되어―조선고급학교는 수업료를 내야 하지만 일본의 고등학교는 수업료 무상화로 내지 않는다―일본의 고등학교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재일교포 학생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오사카부에서는 약 20년간 조선학교에 교부해 온 '사립외국인학교 진흥보조금"을 조선고급학교에 대해서는 2011년3월에 정지하고, 올 3월에는 초·중급학교까지 포함시켜 전면 정지했다. 그 이유는 하시모토 도오루(橋下徹) 전 오사카부지사(현 오사카시장)가 조선학교의 교육 내용에 간섭하면서 일방적으로 보조금 교부 조건으로 제시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를 교실에서 뗄 것(이후 직원실까지 범위를 확대함)", "일본의 학습지도요령에 준한 교육활동을 행할 것" 등 소위 '4요건'을 채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오사카시도 오사카부의 방침에 따라 올 3월, 오사카 시내의 조선초·중급학교에 대해 보조금을 정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고교무상화'가 실시되기 한 해 전인 2009년도에는 오사카부로부터 총액 1억2099만 엔, 오사카시로부터 2,700만 엔의 보조금이 조선학교의 운영 모체인 '오사카 조선학원'에 교부되었는데, 이러한 보조금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 (상세한 경위는 졸고 "조선학교에 대한 오사카부(大阪府) 보조금 정지 문제" <프레시안> 2012년 4월 3일자 참조.)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 맞서 오사카 조선학원의 관계자와 변호사,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시민그룹이 중심이 되어 지난 3월1일에 '조선고급학교 무상화를 추구하는 연락회·오사카'(이하 '연락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연락회에서는 '무상화' 적용과 오사카부·오사카시 보조금의 교부를 요구하면서 행정당국, 지방의회 의원들과 교섭하는 한편, 매주 화요일 오사카부청 앞에서 가두시위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오사카 조선학원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홍길동기금을 발족시킨 것이다. 홍길동기금에는 발족 시에 당시 오사카를 방문 중이던 '전쟁과 여성의 인권박물관' 관장이자 정대협 상임대표인 윤미향 씨가 가장 먼저 기부금을 내 주셨다. 기금은 8월 23일 현재, 310여 개인과 단체로부터709만 엔의 기부금이 모여 예상을 뛰어넘은 반향을 보이고 있다.


▲ 2012년6월16일, 오사카 시내에서 '오사카 조선학원지원 오사카 부민기금(홍길동기금)'의 발족 집회가 개최되었다. 긴급한 개최로, 게다가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불구하고 약 250명이 참가해 회장은 열기에 휩싸였다. ⓒ후지나가 다케시

오사카부에 의한 조선학교 공적 보조의 역사

이번의 '고교무상화' 정책에서 조선학교를 배제하고 보조금을 정지한 일련의 조치는 재일한국인의 민족교육을 둘러싼 상황에 어떤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그 의미를 보다 깊이 생각하기 위해 오사카부에 의한 조선학교에 대한 공적 보조의 역사를 되짚어 보자.

국제인권법의 규정(국제인권 B규약, 어린이권리조약, 마이너리티 권리선언 등)에는 국가가 마이너리티의 교육의 실현과 촉진을 꾀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국가는 재일한국인에 의한 민족교육의 실현과 촉진에 노력하기는 커녕 항상 이를 위험시하고 억압해 왔다. 이에 대해 일본국가를 대신해 일본 각지의 지방자치단체가 지금까지 민족교육을 지원해 왔다.

일본의 지방자치단체가 조선학교에 대한 공적 보조를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이다. 1970년도에 도쿄도(東京都)에서 보조금이 교부되기 시작해, 1974년도에는 오사카부에서도 공적 보조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점차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로 확대되어 1990년대 후반에는 조선학교가 소재하는 29도도부현(都道府縣)에서 전부 보조금이 지급되게 되었다.

또 오사카부의 보조금 교부에 촉발되어 1980년대에 들어 오사카부에 속한 각 시에서도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가 시작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1984년도 사카이(堺)시가 가장 이르며, 1988년도에는 오사카시에서 보조금 교부가 시작되어 이후 다른 시로 확대되어 갔다.

1989년6월에 오사카 조선학원이 학교법인으로 인가되자 조선학교에 대한 공적 보조가 본격화되었고, 1991년도에는 이번에 문제가 된 '사립외국인학교 진흥보조금'이 교부되기 시작했다. 또 이와 동시에 조선고급학교의 학생에게는 오사카부의 다른 사립고등학교와 똑같이 수업료의 일부를 보조하는 '수업료 경감보조금'도 지급되게 되었다. 1991년도의 진흥보조금이 창설될 당시 학생1인당 17,800엔이던 보조금 액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에 걸쳐 대폭 증액되어 2000년도에는 1인당 77,800엔이 되었다.

한편, 1990년대에 보조금제도의 확충과 더불어 조선학교에 대한 여러 차별적인 대우도 서서히 해소되어 갔다. 오사카의 조선학교에서는 일반 공개수업을 실시해 일본인에게 조선학교의 교육내용을 널리 알리는 한편, 1993년11월부터는 보조금 증액 등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전개되어, 약 21만 명의 서명이 모아졌다.

이렇게 해서 가령 전에는 출전할 수 없었던 일본 전국고등학교종합체육대회에도 조선고급학교 학생이 참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려, 1994년에는 처음으로 예선을 통과한 조선고급학교 권투선수 12명이 그 대회에 출전했다. 또 할인율이 일본의 학교보다 낮았던 JR(일본여객철도회사)의 통학정기권도 1994년4월에는 차별 운임이 해소되어 일본의 학교와 같게 되었다. 그 즈음 조선학교 학부모를 중심으로 전개된 착실하고 끈질긴 청원운동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제도가 확충되었다고 해도 일본의 공립·사립학교에 비하면 그 보조액수는 상당히 낮다고 하겠다. 오사카부의 조선학교에 대한 진흥보조금은 그 후에 재정난을 이유로 감액되어, 2009년도에는 1인당 69,300엔이 교부되었다. 학교 종류에 따라 공적 보조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오사카시의 조선초·중급학교의 경우 학생 1인당 보조금액은 일본의 공립 소·중학교의 10분의 1, 사립 소·중학교의 3분의 1정도로 추산된다.

이렇듯 불충분한 액수이지만 조선학교에 대한 공적 보조는 학부모와 관계자의 헌신적인 운동이 쟁취한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어느 조선학교 관계자의 말)이었다. 그러나 최근 2년간 그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렸다.

재생산되는 조선학교에 대한 편견, 적의, 몰이해

조선학교가 '고교무상화'로부터 배제되고 오사카부·오사카시의 보조금이 정지된 배경에는 일본사회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조선학교에 대한 편견, 적의, 몰이해가 존재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고교무상화' 실시에 즈음해 자민당의 납치문제대책특별위원회 등에서는 조선학교는 "북한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학교 혹은 대일 공작기관"의 의혹이 있기 때문에 '무상화'의 대상에 포함되어서는 안된다며 조선학교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표명하고 있다("조선학교를 '무상화'의 대상에 포함시켜서는 안 됨을 강하게 표명하는 결의" http://www.jimin.jp/policy/pdf/seisaku-002.pdf).


그러나 이러한 보수정치세력의 조선학교에 대한 적의는 특별히 새로운 일이 아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에 즈음해 일본정부는 조선총련에서는 "민족주의, 공산주의교육'을 철저히 하고 있으므로 조선학교 문제는 '어떻게 실력으로 폐쇄할 것인지 치안문제로서 처리"를 고려해야 한다고 경계심을 드러낸 바 있다("재일 조선인에 관한 제문제", 내각 관방내각조사실 <조사월보>115, 1965).

이러한 적대의식은 조선학교 교육의 실태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에 기인하는 것이다. 오사카부의 보조금 문제와 관련해 하시모토 전 오사카부지사는 조선학교가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면 "나는 아이들을 되찾아 올바르게 정상적인 학교에서 배우도록 하겠다"(<아사히신문> 2010년 3월10일자 석간)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일본의 학교교육 쪽이 조선학교보다 '정상'이기 때문에, 조선학교의 "아이들을 되찾아" 일본의 학교에서 배우게 하자는 편견에 찬 망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현재 재일한국인 아이들의 압도적 다수는 일본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는 학부모 개인의 선택 문제이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본사회에서 민족교육을 받는데 얼마나 장애물이 높은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걸핏하면 유린되기 일쑤인 민족교육을 받을 권리를 확실히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행정의 책임일 터이다.

그리고 "재일한국인 아이들도 일본의 학교에 가면 어떠냐"는 논리는 말할 필요도 없이 동화주의적 발상의 산물이다. 한일협정 체제 아래서 조선학교의 취급을 검토한 자민당 보고서(1965년)에서는 "적극적으로 일본의 학교교육 안에 넣어 스스로 조화롭게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긴요하다"며, "가능한 한 일본인과 같이 취급하도록 고려하고, 작은 차별로 편협한 배일적 민족교육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자민당 정책조사문교조사회(1965), <외국인교육 소위원회중간보고(안)>, 한일회담 관련 문서 <조선인 교육 개요>(문서번호 565) 수록, http://www.f8.wx301.smilestart.ne.jp/6ji-all/6ji-1/00847/2006-00588-0565-01-01-IMG.xdw). 재일한국인 학생을 "편협한 배일적 민족교육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본의 학교교육 안에 넣어 동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인데, 하시모토 전 지사의 발상도 이러한 논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하겠다.

식민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 조선고급학교 무상화를 추구하는 연락회·오사카'에서는, 조선학교에 대한 '고교무상화'적용과 오사카부·오사카시 보조금의 부활을 요구하면서 매주 화요일에 오사카부청 앞에서 가두선전 활동을 벌이고 있다.ⓒ후지나가 다케시

그런데 이러한 발상의 원류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령, 1935년에 아이치현(愛知縣)에서, 재일조선인의 학교에 대해 그 설립 동기가 "불순"하고 "교사 등도 민족적 색채가 상당히 농후한 자"가 있으므로 이를 전폐하고 일본 학교에 취학시키며, 특히 조선어교육은 절대 실시하지 못하게 한다는 방침을 표방했다 (<쇼와10년 중에 있어서 사회운동의 상황>). 차별의식에 근거해 조선인 학교를 위험시하는 발상과 조선 아이들을 일본 학교에 다니게 한다는 동화주의의 발상이 여기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차별과 동화는―엄밀히 말하면 모순되는 측면이 있지만―식민지주의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오늘날 조선학교에 대한 일련의 조치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대로 말하면, 민족교육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일본사회에 내재하는 식민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작업인 것이다. 오늘날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운동은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오사카에 나타난 홍길동은 분신술을 사용해 몇천 명, 몇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다. 한국에서도 조선학교 아이들을 돕자고 하는 홍길동이 차례차례로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수많은 홍길동들이 국경과 분단의 벽을 뛰어넘어 힘을 모으는 것만이 조선학교가 처한 암운을 날려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참고 사이트】
'오사카 조선학원지원 부민기금(홍길동기금)'의 홈페이지
http://www.osakahuminkikin.net/
'조선고급학교무상화를 추구하는 연락회•오사카'의 홈페이지
http://www.renrakukai-o.net/



후지나가 다케시(藤永壯, 일본 오사카산업대 교수) 교수는 일본 내 한국학 연구에 있어서 대표적인 중진학자이다. 서울대 연구생 시절 "1932년 제주도 해녀투쟁" 논문을 발표했고, 1980년대 말 역사문제연구소 주최 세미나 등에 참가하면서 한국 연구자들과 교류를 넓혀 나갔다. 일본에 돌아간 후 많은 한국 현대사 관련 연구를 발표하였고, 대표적인 저서로는 <日本の植民地支配 : 肯定·贊美論を檢證する>(공저, 東京 : 岩波書店, 2001)가 있다.

▲한 조선 초급학교 공개 수업 현장. 오사카부 내에 현재 10개 조선 초·중·고급학교에 1600명의 학생이 있다. ⓒ후지나가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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