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대회에 모인 시민들은 국정원 대선 개입을 규탄하면서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지난 2008년 촛불 집회처럼 국정원 대선 개입 규탄 외에도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의료·가스·전기·철도 민영화 등 보수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지난 15일 서울 도심에서 1년 8개월 만에 등장했던 물대포, 그리고 방패를 든 전경들이 시청 뒤편에 대기하는 등 긴장감도 흘렀다.
▲ 17일 열린 제8차 국민 촛불 대회에 운집한 시민들. ⓒ프레시안(최형락) |
국정원 대선 개입 성토와 '이명박근혜' 민영화 정책 비판 목소리 어우러져
이날 오후 5시 경부터 모여든 시민들은 7시부터 본격적인 '촛불 문화제'를 열었다. '박근혜가 책임져라' 구호에 맞춰 촛불을 든 시민들의 '파도타기'도 다시 등장했다.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 책임져라'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을 들고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발언대에 가장 먼저 올라온 장주영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은 "이번 기회에 사건 관련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국정원은 또다시 국민들을 우습게볼 수밖에 없다"며 "이 사건은 특검 수사에 맡겨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 양승조 최고위원,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이 그 뒤를 이어 발언한 후 단상에 오른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이우학교(고등학교) 학생들은 직접 제작한 UCC 영상을 통해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비판했다.
발언대에 오른 이우학교의 한 학생은 "고등학생들이 촛불 집회에 나오면 '공부나 하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배웠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배웠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과연 정의로운 일인가"라고 반문해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들은 "국정조사 똑바로 해"라고 정치권에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촛불 집회를 소극적으로 다뤄온 언론인들의 '반성'도 나왔다. 김현석 전국언론노조 KBS지부장은 "지난주 토요일(10일) '9시 뉴스'는 촛불 집회를 제대로 보도했고, 국정원에서 댓글을 달았다는 기사도 내보냈다"며 "촛불 시민들이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KBS 보도가 미약하나마 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국정원 사태와 관련해 공정 보도를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발언대에 선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은 "어제 원·판(원세훈김용판) 청문회는 '철판 청문회'였다"고 말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김 위원장은 이어 "국정원의 대선 개입으로 민주주의가 실종됐다"고 말한 후 "국정원 문제뿐만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수서발 KTX 회사를 만들어 철도를 민영화해, 재벌과 미국 자본에 내주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여러분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공공 철도가 재벌에 넘어가도록 하고, 외국 자본에 넘어갔을 때 이를 되돌리지 못하게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철도를 멈춰서라도 민영화 재앙을 막아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촉발됐던 촛불 집회에서는 의료·철도·가스 등에 대한 민영화 정책, 친재벌 정책, 한반도 대운하 등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도 강하게 나왔었다. 그러나 촛불 집회가 사그라진 후 이명박 정부는 그간 주춤했던 각종 'MB표' 정책들을 다시 밀어붙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새누리당 정부로 '바통 터치'를 했다. 그 과정에서 국정원의 댓글 공작이 있었던 게 드러났다. 불법이 개입된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한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됐던 각종 정책들이 그대로 승계되는 모양새다.
▲ 30도를 넘나드는 더운 날 서울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성토하며 한목소리로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 전날 열린 '원세훈·김용판' 청문회를 지켜본 시민들은 이날 광장에 모여 "원·판 청문회는 철판 청문회였다"고 성토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한홍구 "친노·비노가 아니라 분노와 격노가 모였다"
촛불 집회에 참여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이날 <프레시안> 촛불 집회 생중계 인터뷰를 통해 "친노·비노가 아니라 분노와 격노가 모였다. 검찰, 국정원, 군대, 언론, 재벌 등 5대 개혁을 화두로 다음 선거들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국정원 과거사 진상조사위원을 지냈는데, 그에 대한 부채 의식도 느낀다. 당시 진상 조사를 제대로 해서 국정원 개혁이 됐다면 이런 국헌 문란도 없었을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날 집회에서도 가족 단위 참가자들이 눈에 자주 띄었다. 촛불을 들고 있는 연인들도 보였다. <프레시안> 인터뷰에 응한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큰 촛불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촛불 집회 참가자 박인수(가명) 씨는 "벌써 제8차 촛불 집회다.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참석한 이 촛불 집회가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이 사태와 관련된 모든 인사는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빠른 시일 안에 국민 앞에 나와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훈(가명) 씨는 "박근혜 대통령은 현재의 촛불 집회가 대다수의 국민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며 "국민들이 준 표로 당선됐는데 '나는 알지 못한다', '상관없다'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서 대단히 실망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침묵할수록 촛불은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정용(가명) 씨는 "얼마 전 광복절이었는데 지금의 나라를 만들어 주신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죄송스러웠다"며 "앞으로 자녀들에게 이런 나라를 남겨주지 않기 위해 국정원 대선 개입 사태가 바로잡힐 때까지 끝까지 촛불 집회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환(가명) 씨는 "촛불 집회가 계속될수록 걱정되는 것은 사람들이 긴 투쟁 속에서 본래의 목적을 잃지 않을까 하는 것"이라고 우려하며 "단순히 퍼포먼스로 그치지 말고 촛불을 켜게 된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에서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서울광장 한쪽에 부스를 차리고 촛불 집회를 생중계했다. <프레시안> 외에도 <오마이뉴스>, <고발뉴스>, <국민TV>, <팩트TV>, <미디어오늘> 등도 현장 편집국을 차려 이른바 '주류 언론'이 외면하는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중계했다.
한편, 이날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울산, 제주 등 전국 곳곳에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촛불 문화제가 열렸다.
▲ '박근혜 대통령 책임져라'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을 들어 보이는 퍼포먼스도 벌어졌다. ⓒ프레시안(최형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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