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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앙에도 화내지 않는 일본인? 천만에!"

[수정일본사회운동 탐방]<2> 가와사키 아키라 <피스보트> 공동대표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키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쯔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호사카 노부포 구청장 인터뷰에 이어 두번 째로 카와사키 아키라 <피스보트> 대표를 만났다.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 <편집자>


카와사키 아키라(川崎哲) : 피스보트(Peace Boat) 공동대표. 반핵 및 평화운동의 활동가. 도쿄 동경대 법대를 졸업한 후 사회운동에 투신, NPO법인 <피스데포(Peace Depot, 군축 및 평화운동 싱크탱크)>에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활동한 후 현재 <피스보트>에서 활동하고 있다. <피스보트>는 대형여객선에 많은 활동가, 시민, 전문 과학자를 태우고 아시아 및 전 세계를 항해하며 국경을 넘는 평화의식 공유와 평화운동 간 연대교류를 진작시키고 있다.

▲ 가와사키 아키라 <피스보트> 공동대표 ⓒ조희연, 이영채

2007년 남북평화협력지대 구상은 동북아 평화를 위한 경제적 프로젝트, '핵의 평화적 이용' 인식을 넘어서야

조+이 : 먼저 가와사키 선생을 독자들이 모를 테니, 간단하게 스스로를 소개해주시고, 평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사회운동가로의 삶의 궤적을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십시오.

카와사키 : 저는 1987년에 대학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평화운동에 관여했습니다. 계기는 아마도 당시의 시대 상황이었다고 하겠습니다. 1988년 당시는 쇼와천황(昭和天皇, 1901∼1989년. 1926년부터 재위)이 병상에 누우면서 헤이세이 천황(坪城天皇)으로 바뀌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쇼와천황의 근황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가 일으킨 전쟁책임의 문제도 사회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그때는 서울올림픽 개최 시기였습니다. 당시 일본 전쟁 책임 문제, 아시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자제 또는 절제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진보진영에서 쇼와천황에게 전쟁의 책임이 (일본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천황제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지요. 그러자 일본 당국의 강한 탄압이 시작됐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활동가는 아니었지만 운동과 삶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동료에게 배우면서 평화운동의 길을 선택해 운동적 삶으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제1차 이라크 전쟁(걸프만전쟁)이 일어납니다. 일본 정부는 국제 공헌의 일환으로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위대를 파견합니다. 국제평화유지군(PKO)이란 목적으로 자위대를 파견하고자 한 것이지요. 결국 해상자위대가 일부 파견됐고, 일본정부는 자위대가 해외에 나가도 된다는 식으로 국민의 인식을 변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실제 1992년부터 자위대의 해외파견이 시작됩니다.(1992년 일본 국회에서 PKO법 개정안 처리되면서 자위대 앙골라 파견. 1995년 1월 고베대지진 때 자위대의 재해복구 참여 후 인지도가 상승해 2001년 국제연합평화유지군(PKF)으로 법 개정 후 캄보디아 파견. 2001년 9.11 이후 테러대책특별법 제정으로 2010년까지 인도양에서 자위대가 미군 후방 지원, 2003년 이라크복구특별법을 제정해 이라크에 자위대 파병). 저는 이러한 자위대의 해외 파견 문제에 대항하는 학생운동 투쟁 속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는 버블 경제기였죠. 학생들은 자기의 취업을 별로 걱정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꿈이 있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지요. 취직문제로 고민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저는 사회운동이나 NGO운동을 생각했습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일정하게 일을 했습니다.

1989년부터 외무성이 NGO, 연구기관 등의 소규모 프로젝트에 예산을 지원하게 됩니다.(1998년 비영리단체인 'NPO 촉진법안' 제정) 즉 기존의 좌익적 사회운동과는 다른, 평화운동에 관심을 갖으면서 국제적 이슈에도 헌신하고자 하는 새로운 운동이 전개된 것이지요. 말하자면 저는 일본의 NGO 운동 1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60년대 이어 70년대 당시에 사회운동의 안보투쟁(1959년∼60년, 70년 두 번에 걸쳐 일본에서 전개된 미일(美日)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한 반미(反美) 대중운동)이 실패한 이후, 국민들과 학생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 소수파로서의 운동을 시작한 셈입니다. 물론 2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소수파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조+이 : 아무래도 일본의 평화운동의 특성에 대해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카와사키 : 한국과 상황이 다른데요. 일본에서 평화라고 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피해자로서의 의식이 강합니다. 도쿄대공습(1944년 11월 이후 106차례 전개된 도쿄에 대한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 특히 가장 규모가 컸던 1945년 3월 10일을 의미함), 고베공습(오사카 및 고베 지역에 대한 공습으로 특히 1945년 3월 17일과 6월 5일 전개된 대규모 공습) 등의 기억과 연관되죠. 또는 히로시마(8월 6일), 나카사키(8월 9일)를 기억하는 사람이 다수입니다.(히로시마 인구 42만 명 중 12만 2338명, 나가사키 인구 24만 명 중 7만 3884명이 피폭. 5년간 피폭자는 히로시마 20만 명, 나가사키 14만 명) 일본에서는 그만큼 피해자라는 인식이 강하지요. 물론 저는 이 피해자 의식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에 대한 경각심이자 감수성이기도 하니까요. 전쟁이 일본인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교육 현장에서의 교과서 및 영화, 만화(1988년 공개된 <반딧불의 무덤(火垂るの墓)>은 고베 공습으로 부모가 사망하고 남은 남매의 이야기를 다뤘다)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될 정도로 전쟁에 대한 감수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고통 중 소개령(疏開令, 일본 정부가 2차 세계대전 중 피해를 축소하기 위해 관청, 군수공장, 민간기업 등에 실시한 강제적 분산정책)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평화운동이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이, 매년 8월 전통적으로 반복되는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고 종전된 날로 매년 종전 기념행사(일본은 8월 15일을 '종전의 날'로 기념. 1963년 8월 15일 전국 전몰자 추도식 거행 이후 1965년부터 일본 무도관에서 실시. 1982년 '전몰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날'을 법으로 제정해 시행 중)를 합니다. 그것의 의미는 다시는 전쟁의 고통을 반복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활동가와 지식인들은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와 아시아 침략의 지배를 기억하지만, 대중은 피해자로만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속에서 진행되어 온 일본의 평화운동은 먼저, 반핵운동과 핵 무기 근절운동이 주요 운동입니다. 1950년대 미국의 수폭 실험운동을 통해서 일본의 어선이 피해를 본 유명한 사건(1954년 3월 1일 미국의 태평양 비키니섬 핵 실험으로 일본의 어선 제5 후쿠류마루선 등 많은 외양선이 피폭을 당함)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모든 핵무기를 거부하자는 대중적 반핵운동이 전개되었지요. 여름에는 매년 1만 명이 히로시마에 모이는 반핵행사가 있습니다. 이 행사에는 물론 비핵단체가 참여하지만, 생활협동조합이 조직하기도 하고,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 행정기관들이 연계하기도 합니다.

핵 무기 폐기라는 목표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많은 반핵단체들이 생협 운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생협 운동이 중요한 영역이 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이런 일이 시와 연합해서 (진행)되기도 합니다. 지자체에 따라서 광범위한 생협 운동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시민사회와 도 지방 행정부의 의견이 정부와도 일치하고 있기에 이 운동은 대중운동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큰 운동이 되지요.

셋째,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문제가 있습니다. 오키나와는 물론이고, 요코스카(橫須賀, 미 해군사령부 및 극동 해군시설부대가 상주 중), 나가사키(佐世保, 미군 제7함대기지) 등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많은 미군기지 지역 주민들이 지역의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핵무기의 근절운동에 비해서는 소수의 운동인 셈입니다. 왜냐하면 기지라는 것은 일부 소수지역에 일부 소수주민에게 강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키나와의 반(反)기지운동은 오키나와 현과 주민이 공동으로 전개하고 있는, 함께 하는 대중적인 거대한 운동입니다. 물론 입장 차이도 있지만, 현의 도(道) 행정부와 도 주민들의 기지반대라는 최종 목표는 민중도 일치합니다.

마지막으로, 일본 전쟁에 대해서 가해자로서의 전쟁 책임을 묻는 운동이 있습니다. 전후 보상 운동, 피해자 권리 쟁취 운동 등이 있습니다. 이것도 물론 대중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소수가 참여하는 운동입니다. 지식인 중심 운동이 됐죠.

이 운동에 대해서 우익세력은 일본 국가에 반대하는 반일(反日)적 운동이라는 비판을 합니다. 역사 교과서 파동도 이런 것이죠.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치열한 대립이 존재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것들이 평화운동의 중요한 영역이라고 하겠습니다.

▲ ⓒ조희연, 이영채

조+이 :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피스데포>의 대표로 활동하다가 <피스보트>로 옮겼는데.

카와사키 : <피스데포>(평화자료협동조,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평화 싱크탱크를 표방. 1984년 토마호크 미사일의 태평양 배치 반대를 위한 글로벌 네트워크 활동을 계기로 시작. 미국의 정보 공개 제도를 활용한 조사주체의 시민운동)활동을 한 후 <피스보트>로 옮겼습니다. 저는 대학 때 홈리스 지원 활동을 했습니다. 도쿄에는 여전히 홈리스(2003년 1월 일본 후생성 발표 전국에 2만5296명의 홈리스가 있음. 2002년 일본 정부가 자립을 위한 특별법안을 제정하여 책임을 인정)가 많지요. 20년 전에는 이주노동자 홈리스가 많았습니다. 도쿄 신주꾸나 시부야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도 있었고요. 당시 임금체납 문제 및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그분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지요. 임금 부(不)지급에 대해서 지원활동을 하고, 함께 농성도 하고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홈리스 할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있기에, 제가 따뜻한 밥과 국물을 드리고 집에 갔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명함을 드렸는데, 그 명함이 할아버지의 유일한 연고자 연락처가 된 셈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홈리스 지원활동은 거의 매일 24시간, 365일간 힘든 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체력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죠.

대기업 거대 노조가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몸이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고민을 많이 했지요. 솔직히 편한 운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운동하는 사람이 밤도 낮도 없는 그런 활동을 할 수 없구나, 더구나 지원운동의 대상이 금방 죽어서 없어져 버리는 그런 운동을 넘어서 지속적인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피스데포>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피스데포>는 조사연구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우메바야시 히로미치(梅林宏道, 1937년생. 1980년에 태평양 군비철폐운동 네트워크결성 등 대표적인 반핵군축연구자) 씨가 창립한 조직입니다. 취지서를 보면, 여러 활동이 있었는데 조사 및 정책 제언, 대안 마련 운동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안이 없으면 운동이 지속될 수 없다. 몸을 사용하는데 지쳐 있어서 인지, 이것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만 소비하는 식이 아니라면요.

우메바야시 씨에게서 연락이 왔더군요. 만나서 이야기했지요. 거리 활동에서 연구소 활동인 사무소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거기서 이라크 전쟁을 연구하기도 하고, 대량살상무기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컴퓨터 조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지적운동과 현장운동을 연결해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피스보트>로 옮기게 된 이유이지요.

조+이 : <피스보트>는 생활공간을 일시적으로 떠나 바다 위 배라는 공간 속에서 진행되는 평화교육기관이라고 인식됩니다. <피스보트>가 글로벌 평화운동 및 동아시아 평화운동과 맺는 관계나 활동상황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카와사키 : <피스보트>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처음 홈리스 현장 활동을 하면서 피곤했는데, <피스데포>에서 5년간 지적 활동을 했습니다. 양 극단의 경험을 했는데, 그것을 결합하는 중간적인 운동을 하고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피스보트> 운동이었지요. <피스보트>(1983년 전두환-나카소네 정권 당시 독도문제 등 역사교과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쯔지모토 키요미 전 사회당의원 등 와세다 대학 학생을 중심으로 아시아를 방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NGO, 일본의 대표적인 평화운동단체. 현재는 창립 멤버 요시오카 다츠야(吉岡達也)를 중심으로 카와사키 아키라 등이 주도)는 다음 세대의 학생들을 만나는 현장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스데포>는 전문가 운동인데, <피스보트>는 몇천 명, 몇만 명의 일반인들에게 정보 발신을 하는 현장 활동입니다. <피스보트>는 제가 학생일 때 시작됐습니다. 일본에서는 보수적인 우익 교과서의 영향으로 젊은 층이 전쟁책임 등의 과거 역사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성장했습니다. <피스보트>는 80년대 (침략자) 일본의 젊은 층들이 (침략당한)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만나야 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과거에서 배워 미래를 만든다는 취지였죠. 지금도 이 정신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처음 <피스보트>는 아시아권 일주(一週)를 주로 했는데, 나중에는 지구 일주로 확대했습니다.지구 시민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여객선은 배는 생각하게 됩니다. 글로벌 시티즌을 만들어내기 위한 큰 캠퍼스와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피스보트>는 엄밀히 말하면 절반은 비즈니스이기도 합니다. 매번 지구 일주를 할 때 1000명이 탑니다. 50%는 관광이 목적입니다. 가격이 싼 관광 크루즈배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세계 일주를 하는 큰 관광 선박에 비하면 저렴하죠. 대환영을 받았습니다. 물론 관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광도 제공하지만, 관광 속에서도 평화, 인권, 환경을 생각하는 관광이지요. 소수 지식인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더구나 거대한 여객선이 움직이는 운동체의 중심이기도 하지요. 예컨대 올해 3·11 대지진 이후 재해지역인 이시노마키(石巻)에서 <피스보트>를 탔던 사람 중 몇백 명이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이 : 일본의 평화운동은 헌법을 더욱 진보적으로 바꾸기 위한 운동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재의 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해 운동의 중요한 위상을 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피스보트>가 중요한 역할을 한 '평화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세계 회의 대회'(2008년 5월 4일부터 6일까지 치바 국제전시장에서 개최. 3일 만에 약 3만 명 참가)가 상징적인 사건 같은데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네요.

카와사키 : 2008년에 열린 '평화헌법 9조 세계 대회'는 평화헌법(1946년 11월 3일 공포. 영구평화를 명시하고, 상징 천황제와 일체의 무력행사를 포기한 제9조가 특징. 9조 및 장애조항을 개악하려는 보수진영과 현행법을 유지, 또는 9조 이외의 일부조항의 개정을 주장하는 진보진영 간의 대립을 둘러싼 오랜 논쟁이 존재)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전 지구적 평화를 지키는데 있어서도 중요하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부각시키고, 또 일본 국내적으로도 평화헌법 수호의 중요성을 일본 국민들에게 확산시키고자 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피스보트>에서는 몇 개의 중요한 테마를 정해서 정기적으로 캠페인을 합니다. 먼저 헌법 9조를 지키는 것도 하나이고요, 아시아 3개국 공통의 역사교과서 운동, 이라크 전(戰) 반대, 야스쿠니 신사참배 반대 등 입니다.

몇 가지 테마를 정해서 캠페인을 합니다. '평화헌법 9조 세계대회'는 9조를 세계에 알리자는 것이지요. 2008년에 치바에서 했는데 <피스보트>는 대중적 규모가 있는 단체이므로 <피스보트>가 정해서 하는 이런 특별기획은 대중적 규모의 행사를 치룰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투여하고 있습니다. <피스보트>에는 현재 약 100명의 상근 간사가 일하고 있으며, 그중 배를 타는 스텝은 약 20명입니다.

▲ 2008년 평화헌법 9조 세계대회와 평화행진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평화헌법

'평화헌법'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이 미국의 주도에 의해서 1946년 11월 3일 공포한 헌법 9조의 별칭이다. 그 내용은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치 않는다." 이는 일본이 독자적인 전투 병력을 보유하는 것은 금지함은 물론 국가 간의 교전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일본의 진보혁신세력들은 이를 사수하려고 하고, 일본의 우익들은 이를 폐지, 개정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군대를 보유한 헌법이 존치된 상황에서, 일본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1950년에 미 점령군의 명령에 의해 경찰 예비대를 창설하였다. 일본 국내 치안유지가 목적이었다. 이후 1952년 보안대로 개편되었고 보안대를 바탕으로 1954년 자위대가 발족되었다. 자위대는 사실상 군대이지만 '평화헌법' 때문에 자위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조+이 : 얼마 전 쓰신 글을 보니까, 일본운동가들의 세대 구분을 한 구절이 있더군요. 예컨대 50년대 원폭-수소폭탄금지운동 세대, 60년대 안보투쟁 세대, 70년대 베트남 반전운동대투쟁과 전공투운동 세대, 90년대 걸프만전쟁 세대(중동전쟁, 이라크-이란전쟁 등), 2001년 이래 이라크전 반전운동 세대대투쟁 세대라는 구분이 가능합니까? 스스로를 안보투쟁 세대, 전공투 세대와 구별되는 걸프만전쟁을 계기로 운동에 투신한 세대라고 표현했는데, 일본의 사회운동 분야에서 이러한 세대구분이 가능합니까? 자신의 경험과 함께 이야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카와사키 : 1945년부터 이야기하면, 전후 부흥을 해보자고 하는 전후 복구운동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한국전쟁을 계기로 1951년 미국 및 연합군 측과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 7월에서 9월에 걸친 일본의 주권 회복을 위한 강화회의, 중국과 한국 및 북한은 초정되지 않음. 연합국은 미국의 압력으로 청구권을 포기하였으며, 아시아의 전쟁 피해 국가와는 2국 간 교섭을 제안. 독도가 명시되지 않아 영토 문제가 대두됨. 1952년 4월 이 조약이 발효된 직후 일본은 재일조선인들의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해 전후 보상 시 국적 배제 문제가 발생하는 등 전후 일본국가의 대내외 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조약)을 맺는데, 이 당시 일본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강했습니다.

제국주의적 구(舊) 지배질서가 비판과 도전을 받았고 또한 일본 신(新) 헌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헌법에서는 아시다시피 민주주의, 평화 및 인권이 규정되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가치관이 생각이 180도 바뀌는 경험이었습니다. 민중 속에는 당시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커져가고 있었죠. 그래서 새로운 헌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전쟁 반대 교육을 하자는 생각이 강화되었고, 그때부터 일본 교직원 노조인 전교조 운동이 시작됩니다. 일본 전교조 운동은 사회주의, 좌파운동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전후(戰後) '평화헌법'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자는 분위기가 강하게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사회당이나 공산당과의 연계가 크므로, 그런 정당들과 강한 연관을 가지면서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런 관계는 당연히 보수적인 자민당과 대립의 축이 됐고, 강력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일본 전교조를 중심으로 한 이런 운동은 국내적으로는 반(反) 정부운동이며, 동시에 평화와 민주주의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일본 전후 운동의 기본구조였습니다. 평화운동 첫 세대인 셈이지요.

1960년대에는 안보투쟁이 일어납니다. 베트남전(戰)이 확대되면서, 1960년대 후반에는 이를 배경으로 하면서 각 대학에서 소위 전공투운동이 일어납니다.이처럼 중요한 시기마다 다양한 저항운동이 활성화되어 가는 시기입니다. 포인트를 가지고 운동이 활성화됩니다. 하지만 70년대 초부터 학생운동 분야에서는 적군파의 등장으로 운동이 점점 과격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안보투쟁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회저변에 뿌리내리게 하자는 목적 운동의 성격이 강했고, 당연히 '반(反)자민당—친(親)사회당-친(親)공산당'의 성격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회당과 공산당의 관계가 안 좋았죠. '소련과 중국을 각각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냉전 시기의 세계적인 사회주의의 대립과 국내의 좌익 내부의 대립이 착종(錯綜)되는 시기입니다.

전후 일본의 초기 사회운동은 공산당이나 사회당과 각각 특별한 관계를 맺고 활동하게 됩니다. 사회당과 공산당은 각각 전노협(사회당계열), 전노련(공산당계열)의 전국적인 노조 연합체 센터가 있었고 이 전국조직이 각 정당에게 있었는데, 노조 센터에서 정당의 자금을 제공했지요. 교직원 노조인 전교조의 경우 공산당계의 전교(전 일본 교직원조합, 1991년 결성, 1989년 일본 교조의 렌고 가입에 반대하여 탈당한 비(非)주류파)와 비공산당 및 사회당의 경우 일본 교직원 노조(일본 교직원 노조, 1947년 3개의 조직이 통합해서 결성. 1989년 렌고 결성으로 공산당 계열이 탈퇴하여 전교를 결성 분열)가 주된 중심 조직입니다. 자치단체 공공부문 노조에서는 자치노련로(일본자치체 노동조합 총연합, 1989년 결성)이라는 공산당 계열이 있고, 자치로(전 일본자치단체 노동조합, 1954년 설립, 2008년 현재 조합원 약 90만 명)라는 사회당 계열이 중심입니다.

사회운동이 정당중심으로 계열화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냉전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70년대까지 이러한 구조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中曽根康弘, 1918년생. 1982년∼87년 재임, 전두환-레이건 정권과 신 냉전시대를 주도. 야스쿠니 참배, 역사교과서 파동 등 일본 보수 주류의 대표적 정치인, 국철 노조의 분할 민영화를 주도하여 1955년 체제의 축인 사회당 지지기반을 붕괴시킴)이 등장한 것이지요. 나카소네는 노동운동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사회당의 토대였던 총평(일본노동조합 총평의회, 1950년 7월에 결성된 일본 최대의 전국적 노동조합 중앙조직. 초기에는 반공 색채가 강했으나, 51년부터 반미 및 좌익성향이 강화. 53년 이후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을 명확히 하는 등 노조의 반전평화운동의 상징이 됨. 정치적으로는 사회당 우파계열. 1989년 연합 결성으로 해산)을 약화, 해체시키면서 이를 통해 사회당의 대중적 기반을 붕괴시키고자 합니다. 여기서 렌고(Rengo, 일본 노동조합 총연합회, 일명 연합. 1989년 11월 결성, 2010년 11월 현재 54단산 680만 명의 조합원)라는 일본의 좌익계열의 노조를 제외한 우파와 중간, 일부 좌파 노동조합의 총연합 같은 단체가 출현하게 됩니다.

이 렌고는 사회당 시기 총평에 비교해도 우파적이고 보수적인 조직입니다. 예를 들어 파업과 정치 데모를 하지 않고 자본가와 노사 협조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노조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당이 붕괴된 이후 2008년 민주당(1993년 자민당을 탈당한 오자와 이치로 세력과, 자민당을 탈당하여 칸나오토와 사키가케가 당을 만든 하토야마 유키오 세력, 이후 사회당의 우파계열이 탈당하여 1996년에 결성한 당. 2009년 이후 정권교체를 실현하여 하토야마 유키오와 칸나오토 수상을 배출하였으나, 당의 실세는 오자와 이치로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수상 출마가 어려운 가운데, 3.11 대지진 이후 집권당의 통치 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결국 공산당계의 노동운동과 민주당계의 노동운동이 대립하는 형국이 됩니다. 현재 일본의 노조운동 내부에서는 '공산당계인가, 아닌가'라는 냉전시대 산물의 대립구조가 그대로 남은 채 작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공투(全共闘)

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는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 시기에 1968년에서 1969년에 걸쳐 각 대학에 결성된 주요각파의 전학련이나, 학생이 공동 투쟁한 조직이나 운동체를 말한다. 일본 공산당을 보수정당으로 규정하고 동경대를 중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학생운동이다. 전공투와 같은 1960년대 말 일련의 학생운동은 통틀어 전공투 운동이라고 부른다.

조+이 : 원수폭금지협의회(原水爆禁止協議会, 원수협, 1955년 결성)과 원수폭금지국민회의(原水爆禁止國民会議, 원수금, 1965년 결성)의 운동 대립 문제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카와사키 : 1954년 3월, 미국의 비키니 섬에서 수폭실험이 이루어지고, 일본의 제5 후쿠류마루선(船) 외 다수 원양어선이 피폭을 받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대중적인 원폭 금지운동이 시작됩니다. 이 운동을 계기로 '원수협'이 만들어지지요. (1955년 8월, 원수협의 주도로 제 1차 원폭, 수폭금지 세계대회 개최)

이 운동에는 사회당과 공산당을 포함한 좌익운동이 모두 참여하고 있었는데, 1961년 8월 30 무렵 소련이 핵실험을 재개하면서 '소련의 핵실험은 인정해야 하는가, 반대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공산당계열과 사회당계열의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냉전 시대라는 조건 속에서 존재하는 좌익운동이 중국과 소련 대립의 영향을 받으면서 분열하는 것이지요.

원수협 내에서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당 그룹은 이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일본 공산당계열은 사회주의국의 핵무기는 미 제국주의 침략방지를 위한 것이기에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 지하 핵실험도 조건에 따라서는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 한편, 사회당계열은 소련과 중국의 핵 실험도과 예외로 인정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기게 되고, 그래서 소련의 핵 실험을 포함해서 모든 나라의 부분적 핵 실험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며 원수협에서 갖는 그룹이 이탈해서 1965년 '원수금'을 만들게 됩니다. 원수금은 모든 나라의 핵실험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 원자력발전에도 반대했습니다. 반면에 원수협은 핵무기는 반대했지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까지는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원수금이 분리되어 나오는 1965년까지도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은 원자력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점은 일정하게 전제하고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조+이 : 원수협과 원수금의 대립은, 북핵에 대한 한국의 남한 운동진영권의 분열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북한이 미국에 의해서 봉쇄되고 체제가 위협받는 조건에서 핵무기는 북한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불가피한 수단일 수도 있다는 입장도 있는 반면에, 반핵이라는 원칙을 예외 없이 주장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원수협은 어떤 입장의 변화를 보이게 되었습니까?

카와사키 : 소련 붕괴 이후 사실 큰 변화는 사실 없습니다. 원수협과 원수금의 분열은 소련을 옹호하는 것 보다는 분열의 명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는 소련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었고요.(1960년대 후반 일본 공산당은 소련 및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양국의 핵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명확히 하는 반면, 일본 사회당은 이후 소련 및 중국 공산당과 친밀해지면서 핵문제에 대해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변화도 보임. 일본 국내의 공산당과 사회당의 대립이 원수협과 원수금 운동에 영향을 끼침)

북한 핵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이야기하셨는데, '북핵 문제 뿐만 아니라, 이란의 핵 실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정확히 동일합니다. 미국에 반대하는 체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미국은 허용하면서 왜 이란에 대해서는 핵 무기를 금지하라고 하느냐'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죠. 진보세력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면이 있지요. 불평등한 힘의 관계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기는 하지만, 저는 미국의 패권체제 하에서의 불평등한 국제관계구조의 문제와 핵 무기의 인정 문제는 별개의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차원을 구분하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테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도 같은 문제입니다. 심정적으로는 탈레반이나 오사마 빈 라덴도 약자 집단의 전투적인 무장조직 투쟁이라는 식으로 정당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테러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면 안 되겠지요. 이런 문제를 볼 때, 원수금이나 원수협의 분열을 성찰하면서 보면 좋겠습니다. 일본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겠지요.

▲ 일본 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후 일본에서는 원자력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AP=연합뉴스

조+이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의 경험과 강렬한 피해자의 인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도록 방치 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만.

카와사키 : 일본인들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을 진정으로 고통스럽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3.11 원전사고는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됩니다. '소련의 핵이 옳다'는 입장은 공산당의 입장 운운과는 관계없이, 국민의 다수 생각은 절대 될 수 없는 것이 일본사회의 특성입니다. 그 잔혹성과 비인간성을 일본 국민이 체험하고 인식했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나쁘기 때문에 나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핵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일반 시민들의 민간 인식에 깊게 정착돼 있습니다. 문제는 '핵이 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터졌는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역사적 통찰이 없는 체험인 셈이지요. 조그만 지식이 있어도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가해(加害)를 알 수 있는데, 전환이 안 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비참하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그것이 역사적 지혜로는 활용되지 않습니다. 역사, 정치와 분리된 단순한 체험과 상식으로 머무르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소련 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소련의 핵은 좋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적으로 보더라도요. '소련 핵이 잘못됐다, 안 좋다'는 대중적인 인식의 힘은 상식으로 존재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해서도 깊은 인간적 고통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권력이나 역사적 구조에 대한 이해, 즉 정치적-역사적 지식으로는 승화되지는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생각이 이런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지난주 마치다시의 후쿠시마 원전 관련 강연에서도 언급했지만, 매년 8월이 되면 일본에서는 오키나와(오키나와 전쟁)와 나가사키(원폭)를 반복하지 말자고 TV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사용된 연료보다 더 많은 원자력 발전의 핵이 지금 후쿠시마를 포함해 일본 전국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만약 어느 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면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와는 비교할 수 없는 피해를 불러온다는 또 하나의 현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해 경험이 오늘날의 정치적 태도로 전환되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매년 8월에 부르는 평화노래의 후렴구 정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리얼(real)하지 않은 후렴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3.11의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토쿄 전력의 초기대응부족 및 준비부족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노우 모어 히로시마, 노우 모어 나가사키(No more Hiroshima, No more Nagasaki)'라고 외치면서도, 그 외침에 만족하면서 후쿠시마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던 우리 자신 속에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개인의 직접적인 문제는 아닐 지라도, 저 자신도 이렇게 심각한 상황을 만든 원인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운동이 실질적으로 이런 발생을 전제하고, 예견하고, 대응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이 : 3.11 이후 일본에서의 여론 흐름을 보면, 단적으로 '왜 일본 국민은 분노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사히신문 조사(2011년 7월 12일, 조간)에 의하면 77%의 일본 국민들이 탈(脫) 원전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왜 특별한 행동은 없는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6월 11일에 원전사고에 즈음한 '6.11 반원발(反原發) 100만인 행동'이 있었습니다. 저희도 신주쿠 중앙공원에서 신주쿠 역까지 데모 행진에 동참해서, 저녁 늦게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약 2000∼3000명 정도밖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카와사키 : 질문과는 정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왜 화를 내지 않는가, 일본인은 왜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왜 싸우지 않는가'라고 물었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자라고 태어나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일본인이 이 정도로 모이고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일본 사회 저변에서는 움직이고 있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일본인으로 보면 대단히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한국처럼 서울 시청에서 100만 명이 모이는 나라는 결코 아닙니다. 겉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문화가 아니죠.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 때도 뉴욕에서는 100만 명이 모인 반면, 동경에서는 4만 명이 모였습니다. '왜 1/25밖에 모이지 않았는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도 많이 모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운동의 토양이 다르니까요.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참는 문화'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2차 대전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기기 전까지 국민들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먹을 것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길 때까지는 원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도덕적인 태도로 비치기도 하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물론 천황제의 역할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천황제 유지에는 미국의 의도도 작용했고요. 어쨌든 일본의 국민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참는 문화', 그것을 통한 단결의 문화입니다. 이는 전전(戰前, 1945년 8월 이전)부터 이어지는 문화이고,전후(戦後) 고도성장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단지 제가 문제로 염려하는 것은, 전후 부흥 속에서 전전의 의식이 유지된 것과 유사하게, 3·11 이후에도 '힘내라, 일본!(がんばれ 日本!, 간바레 니폰!)' 식으로, '이길 때까지 원하지 않는다'라는 일본식 태도가 다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것이 시민이 자발적으로 하는 행위인지, 매스미디어와 국가정책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이 : 그런데 그런 참는 문화, 단결의 문화가 지배세력이나 기득권세력의 입장에서는 통치하기에 얼마나 좋은 토양인가, 그러니 오히려 그러한 문화에 도전하고 그것을 깨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전투적으로 투쟁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카와사키 :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는 참는 문화 속에서도 이전에 비해 일본 시민사회는 많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후쿠시마의 어머니들이 새로운 움직임의 주체이고, 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알다시피 원전사고 이후 후쿠시마에서 방사능 수치는 대단히 높습니다. 어느 수준에서 피난시킬 것인가가 쟁점이 되었는데, 일본 정부는 연간 민간인 피폭 허용량을 20밀리시벨트(2011년 9월 14일 현재 매시간 신주쿠 방사능수치는 0.05마이크로시벨트-3.11 이전의 생활 방사능 0.079마이크로시벨트, 1밀리시벨트는 1000마이크로 시벨트-)로 설정했습니다. 그것까지는 참으라는 것이죠. 연간 허용량뿐 아니라, 매시간의 허용치도 있습니다. 정부는 그것을 넘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학교에서 아동들의 수업을 계속해도 좋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허용치 기준, 즉 20밀리시벨트의 설정기준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죠.

아이들에게 이 수치는 매우 큰 위험이 있는 기준입니다.(일본 법률에 의하면 일반인이 1년간 노출되는 방사능의 한계는 1밀리시벨트. 국제 방사선 방호 위원회(ICRP)의 권고치) 그런데 정부는 한번 정하면 잘 바꾸지 않습니다. 이에 엄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죠. 엄마들이 이 수치를 걱정하고, 그래서 학부모를 중심으로 한 엄마 주민들이 나서서, 학교 운동장 표면 같은 데에 있는 흙을 제거만 해도 방사능 수치가 현저히 낮아진다는 것을 발견해내고 모든 학교에서 자발적으로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됩니다. 후쿠시마의 작은 학교에서 이런 대응행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후쿠시마의 작은 학교 학부모가 선생님에게 요구하고, 작은 시(市)가 그것을 받아들여 전 주민의 의견이 되면서, 결국 일본 정부가 이 방안을 수용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매우 흥미 있는 엄마들의 한 저항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국가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라는 인식이 태어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변화라고 봅니다. 도쿄에서는 큰 데모가 일어나지는 않으나, 스스로 땅을 파고 덮고 하는 식으로 20밀리시벨트라는 기준을 스스로 무력화해 변화시킨 엄마들의 태도가 큰 변화의 동력이 될 것입니다.

▲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21세기 들어서 인류가 맞은 최악의 참사 중 하나다. 바로 한국의 이웃 국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뉴시스

탈(脫) 원전과 정경유착구조의 변화의 방향은 기득권 산업-정치 유착구조

조+이 : 일본 사회 운동권에서는 탈 원전이 중요한 과제로 추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자력발전은 대체 재생에너지의 개발, 관련 산업인구의 실업문제, 원자력 수출의 중단, 원자력발전에 의한 CO2 배출 제한의 논리가 관련되어 있어 원전의 중단은 기존의 거대한 산업 경제순환 구조의 중단인 셈인데, 과연 이런 거대권력과 대항하면서 일본에서 탈 원전을 향한 흐름이 강화될 것인지 의구심이 듭니다. 원자력발전을 중지시키기 위한 과정은 거대한 기득권세력—경제 산업의 이해관계 세력, 이들의 후원을 받았던 정치세력들과의 거대한 싸움이라고 보이는데,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원자력 발전은 산업적-정치적 기득권과의 싸움이다. 그리고 산업적으로 대체 재생에너지 개발, 실업문제, 수출 중단, CO2배출 문제 등이 해결되어야 하고 대중들의 에너지를 적게 쓰는 삶의 패턴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는 기득권과의 싸움에서도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탈 원전이 가능할 것인가?

▲ 카와사키 아키라 <피스보트> 대표 ⓒ조희연, 이영채
카와사키
: 저는 일본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칸 나오토 전 수상이 탈 원전을 하겠다고 선언했는데(지난 7월13일 기자회견), 경제인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습니다. 칸 나오토 수상이 당장 탈 원전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단계적이라고 했는데도, 비판과 저항을 받은 것이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탈 원전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대다수 국민이 동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문제는 3.11 이후 재난 대처에 대해 칸 나오토 내각의 능력에 실망하는 국민이 많았습니다. 리더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니까요. 재계가 이를 활용해서, 반대여론을 강화한 것이죠. '칸 나오토 내각은 탈 원전을 이야기 할 자격이 없다, 앞으로 칸 내각은 안 된다'는 식입니다. 물론 이후 총리가 바뀌면 탈 원전 방향성 자체가 더욱 약화될 것입니다. 소멸될 수도 있겠죠.

탈 원전의 논쟁에는 두 가지 쟁점이 있습니다. 에너지가 충족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산업과 고용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번 여름은 대단히 더웠습니다. 아주 더운 데도 현재 일본에는 54개 원전 가운데 30여 개가 정지되어 있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습니다.(정기검진 및 정지요청에 의해 8월 5일 기준 39기, 전체 72%가 정지. 연말까지 90%가 정지될 예정) 더워서 전기를 많이 쓰는데도 실제 정전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지속되면, 전력사용량이 가용용량의 85% 정도에 머무릅니다. 정전 없이도 간다면, 적어도 원전 30개는 없어도 생활이 지속된다는 논리입니다.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세력도 점차 그 반대 태도가 변화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초 전력이 부족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전력부족의 논리가 더는 설득력이 없어진 것이지요. 그들은 이제 원전가동의 반대논리의 초점을 고용문제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원자력발전의 옹호 논리를 전력 부족이 아니라, 원전이 폐쇄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고용문제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탈원전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현재의 산업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대기업 및 원전기업 등에 한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현상은 일부 대기업들 중에서 탈원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확대되고 있다는 된다는 것입니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투자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고, 지역의 조난신용금고(城南信用金庫)도 그렇습니다. 경제계에서도 이렇게 탈 원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제계 내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면, 탈 원전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원전이 없는 산업구조를 지향하는 방향으로의 경제변화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이 : 앞서 잠깐 이야기가 나왔는데, 원자력(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원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현행 핵확산금지조약(NPT)질서 자체의 근간이기도 한데. 앞으로 새로운 변화가 가능할까요?

카와사키 : 그나마 NPT가 유일하게 핵무기의 축소를 강제하는 국제조약입니다. 각국 시민운동들이 그래서 NPT 국제회의에 참여하고 있고, 핵 군축을 주장하며 NPT조약을 운동에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NPT조약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조약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 대해서 국제시민운동은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꼭 좋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평화적 이용의 문제에 대해서 깊게 논의하지 않고 방치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고 문제제기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원자력 핵의 평화적 이용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NPT를 당연히 수용하는 운동이 아니라, NPT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를 요구하는 운동이 필요한 것이죠. NPT 논리로는 북한 핵도 막을 수 없습니다. NPT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대체해 가는 확장된 체제를 요구하는 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NPT는 수단이지 목표는 아닙니다. 더구나 완전한 수단도 아니고요.

조+이 : 그렇다면 NPT를 대체하는 확장된 체제의 내용은 어떤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카와사키 : 하나는 핵무기를 원자력의 이용문제와 구별해서 핵무기 금지조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즉 대인지뢰금지조약, 클라스터 폭탄 사용을 금지하는 조약과 같은 체제를 만들자는 것이지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약을 만들자는 운동이 일어나면 북한, 인도 등 NPT에 들어가 있지 않은 나라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들은 NPT가 불평등하다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 나라들은 핵무기를 개발하는 논리로 '미국을 봐라, 자기들은 거대한 핵무기를 갖고 약한 나라들은 (핵무기를) 금지하는 식으로 불평등하고 얌체 같지 않은가'라고 말합니다. 핵무기 금지조약이 만들어지게 되면 이들 나라들의 불평등 문제제기도 수용되는 것이니, '당신들도 찬성해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중간 목표로, 핵분열 물질에 대한 관리체제 문제, 즉 민생용과 군수용 모두 관리를 엄격히 하자는 관리 체제를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사고가 나면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니까요.

▲ 케이센대학교 이영채 교수 ⓒ조희연, 이영채
조+이
: 앞서 일본평화운동의 주요 이슈의 하나로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일본 평화운동에 오키나와 문제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카와사키 : 오키나와는 그 자체가 지역문제이기도 하고, 지방-토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미일안전보상조약(美日安全保障條約, 1951년 미국과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규정한 조약)및 미일 지배세력 결탁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반핵평화운동과 함께 미일안보조약 반대운동이 미일평화운동과 결합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방-토쿄의 관계로 보면, 오키나와 주민은 도쿄를 중심으로 한 본토에 의해서 버림받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토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키나와에서 운동하는 분들이 더욱 정확한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도쿄에 거점을 두고 이루어지는 <피스보트>의 관계자가 오키나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번 원전사고를 경험한 후쿠시마 문제도 그런 지역적 차별 문제와 유사합니다. 즉 도쿄에 의해 원전을 강요받은 지역주민들의 불만이 있는 것이지요. 도쿄와 탈원전 운동을 함께 하자는 연대의 노력이 있는 반면에, 도쿄에 대한 불만 의식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원전사고에 대한 대응 과정도 '결국 후쿠시마의 희생을 전제로 지역을 포기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는가'하는 불만을 토로하는 주민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도쿄를 기반으로 도쿄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입장이라, 때로는 지역의 평화운동을 이야기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일본의 평화운동은 지역과는 동지이면서도 긴장 관계로 서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문제란?

오키나와는 근대 이전 까지 류큐[琉球]왕국이 존재해서 독자적으로 일본국과 중국, 조선 등과 교역하기도 했던 지역이다. 그러나 1879년 메이지(-セ治)정부에 의해 현(縣)으로 무력, 편입되었다. 1945년 2차 대전 때에는 연합군의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최후의 군사적 저항을 하는 투쟁과정에서 민간인 14만 명을 포함해 24만 명이 희생당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대신 오키나와를 미국에 떼어주는 형세가 되기도 했다. 1972년 일본 본토에 반환될 때까지 오키나와는 실질적으로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는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으로 토지수용 반대, 미군에 대한 불처벌 반대, 여성에 대한 폭력 및 환경 파괴 등에 대한 반대운동 등 다양한 반미운동들이 전개되었다.

1995년 미군에 의한 12세 소녀의 성폭행 강간 사건이 발생해 대중적인 폭발로 거대한 반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에서 결국 'the Japan-U.S. Speical Action Committee on Okinawa(SACO)'라고 하는 기구가 만들어져 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시작됐다. 이 기구 보고서가 1996년에 제출되었는데, 여기서 미군기지 반환도 권고됐다. 이 보고서에서는 후텐마 공군기지를 동부해안지역의 헤노코포(Henoko)부근의 해상시설로 이전하는 제안도 있었다. 주민들은 새로운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반기지 투쟁을 격렬히 전개하였다. 2009년 자민당을 대체해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오키나와 현 밖으로의 이전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가 높았으나, 하토야마 총리는 결국 미국 및 국내 보수세력의 압력에 굴복, 후텐마 미군기지의 현 밖 이전을 포기하고 헤노코 지역 안을 승인하여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후텐마 탈 원전 및 미군기지 이전 문제-한일 친미관료들의 유착문제와 미국기지와 일본평화운동

조+이 : 오카나와의 숙원이었던 후텐마 기지 이전문제가 민주당이 자민당에 비해 3배의 의석을 갖고 있는 현재 민주당 중심의 국회에서 좌절하고만 것은 어디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민주당의 내재적 한계입니까, 아니면 미국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까? 일본 우익과 미군의 동맹이 그만큼 강고하다는 것입니까?

카와사키 : 제가 오늘 인터뷰에 오면서, 일본을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했었습니다. 단순하게 설명하면, 미일안보조약의 체제 속에서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를 오키나와 현 외(縣外)로 이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좌절되었습니다. 이번 원전사고 이후에 칸 나오토 수상의 경우 새롭게 탈원전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결국 강한 저항을 만났습니다. 저항의 주체는 누구인가. 미국과 결탁한 일본의 친미 전통적인 관료세력입니다. 탈원전을 중단시키고자 했던 것은 미국만이 아니라, 미국과 결탁한 일본의 관료들, 하토야마 수상으로 하여금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를 중단시켰던 것도 바로 그 일본의 관료집단입니다. 이런 사실이 위키리스크에 의해서 폭로됐었지요.

미국이 하토야마 내각을 붕괴시킨 것은 일부 외적 요인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관료 및 지배층이 강력히 저항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전통적인 친미 지배세력이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에서 하토야마를 좌절시켰고, 탈원전 문제에서도 칸 나오토 총리도 좌절시킨 것이죠. 원자력과 관련된 영역은 소수 전문가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안보 영역입니다. 일종의 미국과 일본의 안보유착세력이 강력하게 활동하는 영역이기도 하죠.

천안함 사건 및 연평도 포격사건에 대한 당시 일본의 평화운동 <피스보트>의 대응활동

조+이 :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것이 한반도에서의 무력충돌로 발전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한 것으로 압니다. 예컨대 <피스보트>가 동북아시아 지역사무국을 담당하고 있는 '무력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글로벌 파트너쉽'(GPPAC, Global Partnership for the Prevention of Armed Conflict. 2001년 코피 아난이 분쟁예방을 위한 유엔과 NGO의 협력을 호소, 이에 호응하여 2003년 만들어진 NGO의 국제네트워크)에서 성명서도 내고 한반도의 분쟁화를 예방하기 위한 지역 활동을 한 것으로 압니다. 연평도 사건 당시 이것이 군사적 긴장의 격화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본 평화운동의 외부노력에 대해서 한국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연평도 사건에 대한 정부발표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국제화시킨 서재정-이승헌 교수의 기자회견도 도쿄에서 있었네요. 이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 한국 독자들이 흥미로워 할 것 같습니다.

카와사키 : GPPAC는 무력 방지를 위한 글로벌 파트너쉽입니다. 2003년 탄생한 세계 NGO 네트워크이지요. 분쟁 예방을 위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피스보트>가 현재 동북아시아 지역사무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국 단체도 참여하고 있고, 북한단체도 참여하고 싶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한 가지 한국에서 인식해야 할 것은 일본 여론은 북한의 핵실험이 이루어졌을 때의 심각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심각한 사건으로 자극적인 보도를 했습니다. 일반적인 일본 국민들은 '북한이 한국 남한에도 연평도 사건을 일으킬 정도니까, 일본에게는 더욱 위험한 행위를 할것이다'라는 강한 위기의식을 가졌습니다. 실제 전쟁의 위기를 느낀다는 여론조사도 많았지요. 연평도 포격 그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보수언론뿐 아니라, 일반 언론들도 북한을 호전적인 군사공격의 주체라는 기존 인식을 불러내 더욱 강화시켰지요.

조+이 : GPPAC 성명서에서는 2007년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평화협력지대'(서해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고, 이 사건이 전황(軍擴)의 계기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지역적인 협력적 군축조치를 혹은 안정보장협정)을 주문한 것으로 압니다.

카와사키 : 연평도는 아시는 것처럼 남과 북의 전후 미(未) 처리지역입니다. 긴장이 있게 마련이고 이에 대한 적절한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협력지대 구상이 발표되었는데, 이 남북한의 새로운 구상은 동북아 평화정착을 위한 중요한 경제적 프로젝트라고 생각했고 나아가 일본 정부의 대북한정책 및 국민의 반북의식을 바꾸는 좋은 안(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평화번영지역 구상이 있었다는 것을 일본사회에 한다고 생각했죠. 당시 발표한 성명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안함 사태에 대해서는 일본의 평화운동도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한국의 다수 국민들이 한국 정부의 일방적인 발표를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일본 사회는 잘 몰랐습니다. 한국 사회가 천안함 사태를 북한이 일으켰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일본 사회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피스보트>도 2010년 천안함 사건 당시에는 이를 충분히 일본 사회에 알리지 못했습니다. 평화운동의 관점에서는 많은 젊은 군인들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천안함 침몰 수역에서 발견됐다는 어뢰추진체의 모습 ⓒ연합

조+이 : 일본에서는 한국보다도 더 북한이 악마로 형상화되어 가고 있다는 인상을 갖습니다. 과잉 악마화에 따른 과잉 위기의식 같은 것이 있다고 할까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일본 사회가 정상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냉전 시대에 일본의 우익지배세력이 만들어낸 것을 일본 국민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일본의 지배 질서 성격이 드러난다고도 생각됩니다. 북한 문제를 보면 일본의 헤게모니적 우익 지배질서가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국력이나 제반 여건을 볼 때, 북한이 자기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하는 핵개발 행위를 일본을 실제 공격할 수 있는 행위로 보는 것은 과잉 인식이 아닐까요?

카와사키 : 일종의 만들어진 과잉 위기의식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일본 사회에서는 식민지 지배 시기만이 아니라, 한국전쟁이 왜 발생하고 그 전쟁의 성격이 무엇인가도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역사인식이 부재한 상태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이 대두됐을 때에도 '악마 김정일이 선량한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논리로 전개되었습니다. 사실 일본의 지배세력이 대북한 과잉 위기의식이라는 비판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일반 국민들의 의식 속에 형상화되지는 않았었는데, 2002년 북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본인 납치사건이 전면적으로 거론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강화된 것 같습니다. 대중적으로 더욱 강고해졌죠. 대책 없이 무서워만 하고 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동북아지역의 평화 메카니즘의 형성 방안

조+이 : 동북아지역은 지금까지도 군비확장 경향이 강하게 존재합니다. 중국이 미국과 군비경쟁을 하면서 군비 확장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북한 문제를 군비확장에 활용하려는 각국 우익세력의 흐름이 아직도 존재합니다. 이런 점에서 6자회담을 지역안보체계와 군비확장 억제를 위한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합니다. 동아시아의 평화지역, 평화질서 구축에 대해서 많은 것을 제안하는 것으로 아는데, 지역의 안전보장 질서 및 평화 메카니즘의 형성에 대한 견해는 어떠합니까? 동북아 지역에서의 지역적 안전보장 질서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카와사키 : GPPAC가 그런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안전보장'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 시민 공동의 안전보장을 실현하자는 제안입니다. 일본의 3.11 대지진을 예로 보면, 인간의 안전보장의 필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3. 11 대지진은 일본에서는 전후 최대의 국가 위기라고도 표현됩니다. 이것은 몇만 명의 외국군대가 침략해 생긴 위기가 아닙니다. 지진, 원전으로 인한 국가 위기이죠. 그렇다면 '국가의 안보방어(national security)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 사고 전환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군사력을 가지고 외부의 침입에 대항하는 것이 안보가 아니고, 국민의 생활을 지키는 것, 인간의 안보(human security)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대지진을 둘러싸고, 일본은 동아시아의 많은 시민에게서 지원을 받았습니다. 중국 사천성 지진 때 일본 또한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이런 지원은 중국 정부만이 아니라 중국 시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중일 재해지원 센터'와 같은 기구를 를 공동으로 설치한다면 동아시아 인간의 안전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협력모델이 될 것입니다.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요구

조+이 : 한반도 남북 긴장의 지속 속에는 북한의 역할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아시아의 평화구축을 위해 북한에 주문하고 싶은 바는 무엇입니까?

카와사키 : 저는 <피스보트>로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에는 자폐적 인식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남한의 내부 동향과 북한의 내부 동향이 다른 것 같기도 하구요. 북한은 북한 내부의 시각으로만 사안을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경우 북한 문제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국내 경쟁구도 속에서 만들어진 특이한 관계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일본 공산당은 60년대 후반 북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바뀌었고, 이후 사회당이 북한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일본인 납치문제가 그동안 거론됐었지만, 실제 여론화 되지 못했고 그 자체를 일본 국민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면서 일본인 납치문제가 공론화돼 우익들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납치문제로 북한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을 했고, 동시에 일본 사회당을 일본인 납치의 공범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이 우익캠페인이 사회당의 해체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심지어 침묵하는 자에게까지 '너는 왜 그런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가'라는 식으로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조+이 : 한국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100% 북한은 남한 진보진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처럼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로 인해 독재 권력은 남한의 진보 세력을 빨갱이, 친북 추종세력이라고 매도했고, 일정 부분 이것이 국민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운동이 발전하면서 북한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어느 정도 일정하게 극복해가게 됩니다. 북한의 행위가 남한 사회에 미치는 정치적 효과를 둘러싼 각축도 등장하게 됐다고 생각됩니다.

예컨대 천안함 사건은 객관적 사실 자체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과거 한국 사회 관례에 비추어보면 명백히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될 수 있는 사안입니다. 하지만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한국 사회가 그럴 경우(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고 할 경우) 남한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가 극심할 사안의 진실여부 자체를 쟁점화 할 수 있는 사회적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천안함 사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공론장이 여전히 우익들에게 장악되어 있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준으로 공론장이 좌우 각축의 장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왜 일본에서는 공론장이 완벽할 정도로 100% 우익에게 독점되어 있는가. 왜 논쟁이 사상투쟁의 왜 그것이 쟁점화 되어 투쟁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을 보더라도 일본 내 여론을 끌고 가는 능력이 좌익보다는 우익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카와사키 : 그것은 역시 일본의 시민운동, 평화운동의 기반이 약한 데서 오는 것이겠죠. 한국 참여연대에서 UN 안보리에 천안함 진실 보고서를 냈을 때 이 조사에 참여한 학자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이 보고서에 항의해 참여연대 주변에서 우익들이 과격한 데모를 했다는 기사도 봤습니다. 그럼에도 참여연대는 건재하고, 역으로 기부금이 늘어났다고도 하더군요. 그러나 일본에서 이런 사건이 나면 그 단체는 기부금이 줄어 붕괴해 버릴 것입니다. UN에 참여연대가 제출한 보고서는 나름대로 평가도 받았고, 상당한 영향도 끼쳤다고 봅니다. 종합적인 힘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요.

북한 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일본에도 객관적인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단체도 있으나, 그것이 힘이 되어 보수적인 주류나 우익에 대항하는 세력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반핵평화운동의 그래도 나은 환경입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운동도 있고 미군기지 반대운동의 오키나와 같은 거점도 있으니까요. 미군기지 반대운동도 오키나와와 같은 거점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를 지속적으로 다루는 일본 내 사회운동 거점이 거의 없습니다. 대항 담론은 개별 지식인의 비판적 의견에 불과합니다. 재일조선인 및 한국인 운동이 북한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지만, 선거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서(2011년 현재 일본은 비(非)일본 국적 외국인 거주자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음. 자민당의 강한 반발이 있으나 집권 여당인 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대 여론이 많음) 하나의 정치 세력이 되지는 못합니다. 결국 북한 문제에 대해서 우익의 왜곡에 대응하는 평화운동의 능력이 매우 약한 상황입니다.

환경&피스보트 경험이 주는 한일 시민연대의 교훈

조+이 : 한국의 '환경재단'과 협력해서 '환경&피스보트'를 띄운 적이 있는데, 이 운동에 대해 설명을 해주십시오.

카와사키 : 그것은 2005년 해방 60년을 기념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배에 각각 300명씩 태우고 '동아시아 지역에서 출발하는 우호와 화해의 배가 되자, 나아가 공동으로 미래를 열자'는 취지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최열 총장의 '환경재단'이 파트너였습니다. 그래서 '그린(green)&피스보트'가 된 것이죠. 환경재단과 같은 큰 재단이 한국에 있다는 것을 전에는 전혀 몰랐습니다. <피스보트>와 대등한 일을 할 수 있는 단체가 한국에도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이후 최열 총장이 탄압을 받으면서 결국 중단되었습니다. 원래 10년을 기획한 행사였기에 언젠가는 다시 재개하고자 합니다.

조+이 : 한국의 환경평화운동에 대해 일본 평화운동의 입장에서 제언이나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주시지요.

카와사키 : 80년대부터 한국에서 유학생들이 많이 옵니다. 그들과 토론하면서 느끼는 것은 영원한 과제이기도 한데,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벽이 있다는 것 입니다. 한국 운동에는 민족주의가 중요한 동력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본 평화운동은 먼저 일본의 제국주의 및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우익이 민족주의를 독점합니다. 평화운동은 반민족주의는 아니지만, 비(非)민족주의적 경향을 가집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독재나 반독재운동 모두 민족주의적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친한 친구도, 이를 못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한일운동에는 그런 점에서 연대에 장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한국의 평화운동이 민족주의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기를 바랍니다.

▲ 2007년 그린&피스보프 ⓒ환경재단

*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의 후원으로 진행됐으며 시민사회신문에도 요약본이 실릴 예정입니다.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 『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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