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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보면서도 '비즈니스 프렌들리' 고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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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무현 보면서도 '비즈니스 프렌들리' 고집하나?

[건망증 한국경제⑤] 기업인과 정치인, 악어와 악어새

"기업들이 로비를 해오는 유형을 보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현대그룹이나 한진그룹처럼 대번에 청와대를 구워 삶아서 위에서 찍어 누르는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대우그룹이나 삼성그룹처럼 정부의 실무자급에서부터 시작해 올라가는 식이 있었습니다.

특히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수법은 알아줘야 했습니다. 어느 날 내 방에 찾아온 그는 대뜸 내게 하는 말이 청와대에 정치자금을 갖다 내고 오는 길이라는 것이었어요. 액수도 30억 원이라고 밝혔어요. 그러더니 훌쩍 가버리더군요. 기가 막혔습니다. 이 정도의 거액을 갖다 바쳤으니 장관도 공연히 더 이상 트집 잡지 말고 협조하라는, 일종의 시위가 아니고 뭐겠습니까."(이장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에서 인용)

전두환 정권 당시 장관으로 일했던 이의 증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벌들로부터 수천억 원 대의 비자금을 조성해 지난 96년 대법원으로부터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은 바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 씨가 검찰 조사를 받는 등 검찰의 '칼끝'이 자신을 향해오자 12일 "도덕적 책임을 지고 비난을 받는 것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일이라는 것"이라며 '정면돌파' 의지를 밝혔다. ⓒ뉴시스
새삼 전직 대통령들 주변의 권력형 비리 문제가 주목받는 이유는 '노무현 쇼크'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10억 원 이상의 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노 전 대통령도 권력형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지금 세간의 관심은 권양숙 여사가 받았다는 10억 원, 조카사위 연철호 씨가 받았다는 500만 달러(50억 원)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연관성에 쏠려 있다.

어떤 이들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또 된 이후에도 '도덕성'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앞선 대통령들과 똑같은 행태를 보였다고 맹비난한다. 또 다른 이들은 거론되는 돈의 '액수'가 이전에 비해 훨씬 적다는 점을 들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을 펴기도 한다.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은 4월 재보선을 앞둔 현 시점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노무현 쇼크'는 '정치적' 차원에서만 바라볼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기업인의 정치인에 대한 상납 구조'가 여전함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아니, 정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상납한 뒤 이들이 받는 대가를 따져보면 '기업인과 정치인의 공생 구조'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기업인들은 정치자금을 대가로 사업허가권을 따내거나, (정상적인 루트로는 받을 수 없는) 은행 대출을 받거나, 다른 기업을 인수하거나,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는 등 '특혜'를 얻어냈다.

이런 특혜는 공정한 경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들의 '공생관계'는 건전한 시장질서 확립을 방해하고 경제력 집중 현상을 낳아 한국경제 구조를 오랫동안 왜곡시켜왔고, 그 부담은 결국 국민들에게 돌아갔다.

전두환 정권의 부실기업 정리와 비자금

전두환 정권은 81년 12월 대통령령으로 부실기업 처리를 위한 비상설기구로 산업정책심의회를 설치하고 부실기업정리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이 정통성 등 정치적 문제를 가리지 위해 고속성장 전략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적잖은 '거품'이 발생했고, 후임인 전두환 정권에 와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됐다. 전두환 정권은 85년 부실기업 정리를 본격화하면서 78개의 기업을 합리화 대상으로 지정하거나 3자 인수방식으로 정리했다.

특히 건설업과 해운업의 부실 문제가 심각했다. 74년 '1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사실상 외환위기에 처했던 한국경제를 회생시킨 게 해외건설업이었다. 정부는 해외건설촉진법 등을 통해 은행들이 해외건설업체에 무조건 지급보증을 해주도록 하는 등 특혜를 줬다.

해운업도 70년대 후반 신흥 유망업종으로 지목되면서 급성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직접 '자국선 적취율'을 높이라고 지시하는 등 해운업체의 선박 소유를 독려했고, 은행들도 뱃값의 90%나 되는 거액의 보증을 남발했다. 그 당시 해운업자들은 운임수입이 늘어나서가 아니라 뱃값이 뛰어 부동산 투기처럼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또 해운업자들은 배를 사는 과정에서 뱃값을 부풀려 거짓 계약서를 써서 비자금을 조성했다. 이 비자금의 상당 부분이 정치권의 로비자금으로 쓰였다.

부실기업 정리는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과정. 시장 원칙에 맞게 부실 규모가 커 회생이 불가능한 기업은 정리하고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은 퇴출시키는 게 아니라 정권과 관계가 퇴출 여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퇴출된 기업의 인수 주체를 결정하는 과정도 의혹이 제기됐다. 이처럼 정부가 기업의 생사를 쥐고 흔들다 보니 기업들 입장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정치자금을 갖다 바칠 수 밖에 없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수천억 원대 비자금은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셈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의 3번의 외환위기

80년대 엄청난 기업 부실의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보면 3번의 외환위기가 찾아진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경험한 것은 1997년만이 아니다. 차관에 의존하고 높은 대외의존도를 보이던 한국경제는 특히 외환위기에 매우 취약한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에는 경제규모가 작아 '표'가 덜 났을 뿐이다. 세계경제의 큰 변화에 맞물려 재수 좋게 넘어가기도 했다.

한국은 74년 '1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국가부도 일보 직전까지 갔다. 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면서 원유값이 급등했다. 당시 원유값은 배럴당 3달러에서 73년 12월 배럴당 11.7달러로 4배 가까이 폭등했다. 이에 따라 무역적자는 73년 10억 달러에서 74년 24억 달러로 급증했다. 당시 가발, 신발, 의류 등을 수출해 푼푼이 모은 외환보유액으로 '오일쇼크'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74-78년)은 2006년 12월 <한국경제>와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한국은 진짜 부도가 났다. 국민들이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넘어갔을 뿐이다. 그때는 산업구조 자체가 총체적 위기에 봉착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74년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은 한 마디로 '처절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며 "그때는 유동성 위기 뿐 아니라 제조업이 전체적으로 붕괴 직전이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붕괴 직전의 한국경제를 되살린 게 건설업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70년대 '중동 건설 붐' 덕분에 74년 외환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정부도 이를 지원하기 위해 75년 해외건설촉진법을 만들었다. 76년 현대건설이 따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항 건설은 계약 금액만 9억4400만 달러로 단일업체가 수주한 단일 공사로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다.

1차 오일쇼크 이후 더 가속화된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은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과잉 투자를 야기했다. 이런 가운데 79년 2차 오일쇼크는 석유 수요가 높은 중확학 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전환된 한국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79년 배럴당 17.3달러였던 유가가 80년 28.6달러로 치솟았다. 경제성장률은 사상 첫 마이너스(-1.5%)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물가상승률은 79년 18.3%, 80년 28.7%를 기록했다. 당시 서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는 수치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 신군부 쿠테타 등 정치 격변의 배경에는 이같은 경제위기가 깔려 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후 중복과잉 투자된 중화학공업의 구조조정을 실시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실패한 '국가주도 계획경제' 노선을 그대로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대외부채도 늘어만 갔다. 총외채가 79년 203억 달러에서 85년 468억 달러로, 순외채가 같은 기간 140억 달러에서 355억 달러로 늘어났다. 당시 국제금리 또한 매우 높아 수출로 번 돈으로 외채의 이자를 갚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외채망국론'이 제기됐다.

이같은 외채위기는 그해 9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G5의 '플라자합의'로 운 좋게 넘길 수 있었다. 플라자합의는 미국의 재정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달러의 가치를 내리고 엔화의 가치를 올리자는 합의다. 발표 다음날 달러화 환율은 1달러에 235엔에서 20엔 하락했다. 1년 뒤 달러 가치는 거의 절반 가량 떨어져 1달러 당 120엔 대에 거래됐다.

달러가치는 떨어졌는데, 엔화 가치는 올라갔으니 한국 입장에서는 무역수지를 맞추는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 마련된 셈이었다. 86년부터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이라는 '3저 호황' 국면이 펼쳐지면서 한국경제는 호전됐다.

국제그룹은 왜 공중분해 됐나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기업들로부터 수천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해, 퇴임 뒤 사법 처리된 첫 사례를 남겼다. 두 사람은 대법원으로부터 각각 2205억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으나 아직도 대부분 미납상태다. ⓒ연합
전두환 정권의 특정 기업에 대한 '정치적 타살'의 대표적인 사례가 국제그룹이다.

국제그룹은 1948년 왕자표 고무신으로 신발사업을 시작해 1980년대 '프로스펙스', '아티스' 운동화로 전성기를 누렸던 국제상사가 모체인 그룹이다. 국제그룹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 육성정책에 발맞춰 중화학 공업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해 연합철강, 국제종합기계, 풍국화학, 국제방직, 국제종합건설, 국제통운, 동서증권 등 21개 계열사를 거느렸었다. 재계순위 7위였던 국제그룹은 1985년 2월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됐다.

국제그룹 도산의 1차적 원인은 높은 부채비율이었다. 무리한 기업 확장, 특히 80년대 초반 경험과 지식이 없는 건설업에 뛰어 들어 막대한 적자를 냈다. 당시 국제그룹의 부채비율은 964%에 달했고, 단자회사 빚은 5500억 원이나 됐다.

하지만 양정모 전 회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국제그룹의 도산을 '정치적 타살'로 본다. 양 전 회장은 88년 국제그룹 해체와 관련해 헌법소원을 냈고, 93년 헌법재판소는 "5공 정부의 국제그룹 해체는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엄격한 시장원리로 따지면 마땅히 퇴출됐어야할 기업이지만 전두환 정권의 부실기업정리가 명확한 원칙 없이 진행됐기 때문에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양 전 회장이 83년 새마을성금 과정에서 그룹 규모에 비해 돈을 적게 내서 그렇다(당시 양 전 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3개월 짜리 어음으로 10억 원을 전달하는 등 10억여 원을 상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84년 12월 폭설로 청와대 만찬에 늦게 참석해 밉보였다, 양 전 회장이 부산지역 상공인 대표로 있던 85년 2.12 총선에서 부산 지역 선거 결과가 좋지 못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등 다양한 해석이 쏟아졌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국제그룹 해체 결정을 내린 사람이 전두환 전 대통령임이 밝혀지면서 의혹은 더 커졌다.

또 무너뜨린 국제그룹을 제3자에게 인수시키는 과정도 문제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국제그룹의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연합철강 인수 주체를 바꿔 버렸다. 당시 김용환 재무부 장관은 연합철강을 전 사주인 권철현 씨에게 인수시키려 했으나 청와대 보고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이 동국제강으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동국제강의 장상태 회장은 이즈음에 이순자 여사가 설립한 새세대심장재단 등 67억 원이라는 거액의 성금을 냈다. (이장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이순자 여사가 설립, 운영했던 새세대 육성회, 새세대심장재단 등은 기업 비자금 창구로도 활용됐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권의 끝은?

전직 대통령들은 주로 재벌 총수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 초 재벌 총수와 독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런 부패의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앞서 2002년 대선 과정에서도 '희망돼지'를 통한 일반 유권자들의 소액 후원금을 강조했다. 97년 대선에서 재벌들로부터 '차떼기'로 거액의 대선자금을 받았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고, 이 전략은 정치개혁을 바라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흔들었다.

한나라당에서 노 전 대통령을 '완쇼남(완전 쇼하는 남자)'라며 강도 높게 비난하고 나선 것도 이런 전력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의 실제 주인인지, 이를 대가로 박 회장에게 돌아간 것이 무엇인지 아직 밝혀진 바는 없다. 하지만 '정권과 재벌의 공생관계'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나라당은 4월 재보선을 앞두고 노 전 대통령의 뇌물 수수 의혹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지만, 당 일각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 친박근혜계 의원은 "4년 후가 걱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정치적 발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보면 흠집내기성 발언이라고만 해석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부터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면서 노골적인 친기업 정책을 펴왔다. 이 대통령은 재벌 총수들과 언제든 연락이 가능한 핫라인까지 개설했다. 실제 얼마나 전화가 오가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재벌 총수들이 대통령에게 언제든지 민원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게다가 경제위기 상황은 상대적으로 재벌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어렵게 한다. '일단 경제부터 살려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는 노조나 시민단체의 활동을 위축시킨다. 기업들은 정부에게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각종 규제완화를 요구하고 있고, 정부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이를 수용하고 있다.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월 대한상공회의소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재계 인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코오롱, 효성, 롯데…

이명박 정권은 대통령이 대기업 CEO 출신으로 태생적으로 대기업 친화적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대통령 본인 만이 아니라 국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형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도 코오롱 사장 출신이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전경련 회장)과는 사돈관계다.

이처럼 두루두루 재계와 얽혀있다보니 여러가지 의혹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는 최근 한국경제정책연구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정부가 지난해 건설경기가 어려우니까 중소기업의 지방 미분양 아파트를 매입한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실제로 어느 건설사의 아파트를 샀는지 따져보니까, 난데 없이 코오롱건설과 두산건설의 아파트를 수백채 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방 중소건설사의 아파트를 산 게 아니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또 신격호 롯데 회장의 '숙원'으로 알려진 '제2롯데월드' 신축 허가도 숱한 의혹을 낳고 있다. '제2롯데월드'는 서울공항 비행안전 문제로 지난 15년간 공군이 반대해왔던 사업이다. 112층 초고층 제2롯데월드는 허가가 난 반면 성남시는 45m 고도 제한으로 묶여 있어 '형평성' 논란도 일고 있다. 이 대통령 당선 직후 이 대통령과 고려대 경영학과 61학번 동기인 장경작 씨가 롯데 총괄사장으로 승진한 것도 의혹이 쏟아지는 대목이다. 민주당은 "제2롯데월드는 대통령 친구를 매개로 한 신정경유착이자 친구 게이트"라고 비난했다.

경제위기 때문에 주춤하고 있지만, 이명박 정부가 여전히 고집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도 말썽이 생길 소지가 많다. 이명박 정부는 '효율성'을 내세워 공기업의 '주인'을 찾아주다고 하지만, 공기업을 특정 기업에 넘기는 과정에서 권력형 비리가 발생한 가능성이 크다. 실제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구상의 일단을 공개한 후 이 대통령의 친인척과 지인이 연관된 코오롱, 맥쿼리 등과 관련된 의혹이 일기도 했었다.(관련기사 : 공기업 민영화에도 '형님 권력'이?, 이상하다 했더니…인천공항 매각, 조카 선물?)

많은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 의혹에 충격을 받은 이유는 노 전 대통령의 부도덕함 때문만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구조화된 부패시스템이 여전히 강력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한 것에 대한 실망감이 더 크다고 보여진다.

현재 준엄하게 노무현 정권의 '도덕성'을 심판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가 '4년 후'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피하려면?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포기하고 시장을 규율하는 공정한 심판으로서 정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는 쪽으로 정책 노선을 틀어야할 것이다. 대통령 본인의 의지나 엄격한 친인척 관리로는 안 된다는 것을 노무현 정권이 이미 보여주지 않았나.

'노무현 쇼크'로 이명박 정부가 챙겨야할 가장 큰 성과는 4.29 재보선 등 정치적 반사이익이 아니다. 이번 사건으로 이 대통령에겐 '부패의 고리'를 끊을 강력한 명분이 주어졌다. 재계도, 검찰도 '죽은 권력'에겐 더 이상 충성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전적으로 이 대통령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

[건망증 한국경제] 연재 바로 보기

①이명박 "stupid" 모하메드 "crazy"…노무현 "기죽어"

② '7%의 추억'…대박 쫓다 쪽박 찰라

③이재용의 삼성 VS 삼성의 이재용 …최종 결론은?

④동시다발 FTA 추진, OECD 조기가입…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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