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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대안은 '성장친화형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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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대안은 '성장친화형 진보'"

[의제27 '시선'] 얼치기 진보의 위기 경제학

얼치기 진보의 변명

필자는 이념에 관한 한 색맹으로 살아왔다. 은사님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분들이다. 함께 공부한 경제학자들도 대부분 보수적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필자를 진보경제학자로 부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배경으로 보면 매우 보수적이어야 하는데, 보수적 경제학자들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게 된 것이다.

물론 경제학 전공자이면서 진보적인 경제학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자신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해 오긴 했다. 호기심 많은 성격 탓에 현실 경제의 변화에 휩쓸려 다니다 보니, 고전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탓이다. 그런 필자가 진보라고 불리고 있으니 선배 진보 학자들에게 죄송스럽다.

그런데 재벌 공부를 하다가 미국에도 재벌과 같은 형태의 대기업집단이 있었는지가 궁금해졌고, 그래서 여기저기 뒤지다가 아주 오래전 미국에서 필자와 같은 유형의 진보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100년 전 미국에서 아직 이념이 첨예하게 갈라지지 않았을 때, 공화당도 민주당도 진보를 부르짖던 희한한 시기를 진보시대(Progressive Era, 1890-1920)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를 살펴보던 중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30여년 진보를 부르짖던 미국인들이 갑자기 보수로 돌변했다. (한국에서 87년 이후 줄곧 진보를 떠들다 갑자기 어느 순간 돌변해 압도적인 지지율로 보수정부가 들어선 것과 같지 않은가? 한국과 비교하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도 하기로 하자.) 그리고 아주 오래 호황을 누리다 1929년 말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미국 진보 진영이 추앙하는 루즈벨트의 뉴딜 시대가 열렸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필자는 루즈벨트의 정책에 대해 많은 공감대를 느꼈고, 필자가 주장하는 많은 경제정책은 이 루즈벨트의 정신을 계승한 크루그먼(Paul Krugman) 류의 진보, 미국에서 이른바 리버럴(liberal)로 불리는 진영의 정책과 상통한다. 그러니까 굳이 분리하자면 필자는 미국식 진보 정도 될 것이다. 필자가 진보 운운할 때는 유럽의 사민주의를 지향하는 이런 미국식 리버럴 진보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선배 진보 학자들께서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덜 송구스러울 것 같다. 혹시 끝자락에라도 끼어주시면 영광이다.

성장친화형 진보

필자는 요즘 두 가지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다. 모두 진보적 경제정책의 청사진을 만들어 보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퍼즐 맞추기를 위해 필자는 최근 '성장친화형 진보'(Pro-Growth Preogressive)라는 책을 번역했다. 앞서 '한국경제 새판짜기'(곽정수, 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공저)를 내면서, 고민했던 숙제를 풀기 위한 과정이다. 필자에게 숙제를 내 주신 다른 저자분들도 열심히 이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다. '위기의 경제'(유종일)는 최근 상황을 시의적절하게 분석한 책이다. 다른 저자들의 열성적 활동에 감명받아 필자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서 번역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책은 클린턴 시절 경제보좌관이었던 진 스펄링(Gene Sperling)이 민주당의 재집권을 위한 경제정책의 청사진으로 제시한 책이다. 2005년에 나왔는데 지난 여름 미국의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정확하게는 중고서적을 매매하는 일본서점인데 일본 전역에 많은 지점을 가지고 있고, 최근 미국에 지점을 여러 곳 냈고 심지어 우리나라의 서울역 근처에도 하나 있다고 한다. 놀라운 일본의 부러운 한 단면이다.)

국내에 아직 번역이 안되어 있을 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한 이 책의 의미를 필자가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최근 김윤태, 김호기 두 분 교수님으로부터 제3의 길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분 덕분에 필자가 경제정책에만 한정해서 고민하던 것을 정치, 사회적 영역과 연계해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 클린턴이 막강한 보수에 대항하기 위해, 그동안의 전통적 민주당 노선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고민의 맥락에 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래서 이 책을 보자마자 흥분하고 말았다. 필자는 클린턴 구상을 '보수의 칼을 들고 보수진영에 들어가 보수와 정면 대결을 벌이는 전략'으로 생각해 왔는데, 이 책에서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세세한 정책의 배경과 원리, 효과를 설명하고 있다.

필자가 이 책을 번역한 의도는 담대하다. 함께 진보적 경제정책을 위한 퍼즐 맞추기를 통해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정책을 만들어내고 싶다. 사실 우리에게 더 이상 실패가 용납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경제는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성장친화형 진보'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논해야 하는데, 사실 이 부분은 필자가 꺼리는 부분이다. 기존에 국내에서 논의된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온 필자가 보는 신자유주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논의해야 한다. 성장친화형 진보는 보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를 배격해 온 진보진영에 새로운 화두 또는 비난거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쪽이든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마침 이번 주말 책이 출시된다고 한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케인스의 위기 경제학

단기과제로 하고 있는 또 다른 퍼즐 맞추기는 위기의 경제학이다. 최근 세계경제위기가 다시 발발했기에 대공황 이전의 1920년대와 2000년대를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필자는 지난 10여년간 필자의 시각으로 위기의 징후들을 포착해 왔다. 최근 경제위기를 맞아 국내외적으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어, 필자의 생각을 평가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케인스(John M. Keynes)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의 접근 방식은 간단하다. 먼저 상당 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현재의 경제위기에 필적할 만한 위기는 대공황뿐이라고 받아들여 보자. 만약 이 두 위기의 성격이 유사한 것이라면, 우리는 1920년대와 2000년대에만 두드러지는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 ⓒ경항신문

이 그림은 최상위 10%의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추이를 1917년부터 재구성하여 작성한 것이다. 버클리 대학의 사에즈(Emmanuel Saez)교수가 최근 몇 년간 전 세계 자료를 수집하여 소득분배의 역사적 추이를 밝힌 결과이다. (우리 국세청도 이런 자료를 발표했으면 좋겠는데, 국세청이 힘자랑만 했지, 통계처리에는 관심이 없는 덕분에 이런 자료를 조만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최상위 10%의 소득이 전체 소득의 50%에 육박하면서 대공황이 발발했고, 2006년 다시 이 비율이 50%에 달하면서 세계적 경제위기가 시작되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 자료와 경제위기의 연관성은 케인스(John M. Keynes)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케인스의 소비함수를 이용하면 간단하다. 저소득층은 전반적으로 소비성향(소득 중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의미하는데, 전체 소득에 대한 소비를 의미하는 평균소비성향과 소득의 증가분에 대한 소비의 증가분을 의미하는 한계소비성향이 있는데, 저소득층은 평균소비성향과 한계소비성향이 고소득층에 비해 높다.)이 높고 고소득층은 소비성향이 낮은데, 소득분배 상황이 악화되면 소득이 대폭 증가한 고소득층의 소비는 별로 늘지 않는 반면에 소득이 없는 저소득층의 소비가 줄어들어, 경제전반의 수요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소득분배 상황이 최악의 상황에 도달하면 저소득층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되고, 경제 스스로 이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게 된다. 따라서 정부가 재정지출을 통해 저소득층의 소득을 보전하면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보탬이 될 뿐 아니라, 경제의 선순환을 촉진하여 경기회복을 앞당긴다. 요즘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케인스의 한계

그런데 이 논리 구조 속에 필자의 선입견과 맞지 않는 구석이 못내 필자를 괴롭히고 있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그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찔리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지난 10여년간 재경부와 한국은행이 국민경제를 위해 정책을 편다고 믿지 않았다. 결정적인 것은 신용카드 사태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재경부 관료들은 마치 강 건너 불구경했다. 그러던 그들이 카드회사가 흔들리자 즉각 지원책을 발표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채무자에게 유리한 파산법을 제정하는데 반대했었다. 또 그때 한국은행은 무엇을 했었나?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쳐다보지도 않았다.

필자의 의심은 부동산 파동을 보면서 굳어졌다. 재경부나 한국은행은 부동산 가격을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재벌이나 전경련이 이자율 내리고 규제완화해 달라면 어떻게 더 잘 해줄까를 고민하는 모습은 역력했지만, 부동산 가격 폭등에 아우성하는 서민들의 외침은 그들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과연 재경부와 한국은행이 케인스가 주장하는 재정정책, 금융정책을 펼까? 그보다도 먼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재경부와 한국은행 때문에 발생한 것 아닌가?

필자는 케인스식 설명에 만족할 수 없다. 이건 어쩌면 케인스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케인스는 스스로 소수자였기에 개방된 정신의 소유자였고, 그야말로 서민에 대한 뜨거운 가슴을 가진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였다. 그런 그의 성향 때문에 그는 과감히 고전학파의 틀을 깨고 새로운 경제학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고의 엘리트였던 케인스였기에 엘리트집단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다. 그러니까 그는 서슴없이 정부의 적극적 정책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재경부와 한국은행은 신뢰하기 어렵다. 마치 우리가 미국에서 발생한 위기로 인한 간접 피해를 입고 있다는 듯이 주장하는 그들을 보면 정말 꼴불견이다. 만약 지금 우리가 부동산 거품이 없었다면, 만약 지금 가계부채가 800조원에 달하지 않았다면, 만약 은행의 단기외채가 외환보유고에 육박할 정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미국의 어떤 회사를 인수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세계 5대 강국에 들어갈 기회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부시 행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린스펀(Alan Greenspan)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미국 경제의 건전성을 망친 것 아닌가?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이론은 없을까?

다음 번에 이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혹시 마음 급한 독자는 17일(금) 연세대(신상경관 별관 303호)에서 개최하는 사회경제학회 정기학술대회에 오시면 된다. 필자의 이야기는 별 것 없지만, 이 학술대회에서는 진보의 기라성같은 학자들이 '위기의 경제와 위기의 경제학'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발표하니 참석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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