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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기자가 '자기표절' 유혹에 빠진 이유

[기자의 눈] MB정부, 의료정책 프레임도 '다양성'

'자기표절'이라는 표현이 있다. 자신이 과거에 글로 쓴 내용을 인용 표시 없이 반복 사용하는 행위를 뜻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낯선 표현이었는데, 교수 출신 장관 몇몇이 이런 의혹에 걸려 낙마하면서 익숙한 표현이 됐다.

기사를 쓰면서도 가끔 '자기표절' 유혹에 부딪힌다. 대개는 취재를 게을리한 탓이다. 하지만, 핑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과거에 겪은 것과 너무 닮은 상황에 자꾸 부딪히면, 부풀어 오르는 '자기표절' 유혹을 피하기 어렵다.

영리병원 도입 토론회에 쏠린 뜨거운 관심

최근, 다시 자기표절 유혹이 엄습했다. 지난 13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보건사회연구원 대회의실에서 "의료서비스산업선진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를 지켜본 직후였다. 보건복지가족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마련하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사회자로 나선 이 토론회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주최 측이 허겁지겁 임시의자를 마련했지만, 장소를 가득 메운 청중이 앉기에는 자리가 부족했다. 결국, 많은 이들이 입구 뒤에까지 줄지어 서서 토론을 지켜봐야 했다. (☞관련 기사: MB정부, 영리병원 허용 여론몰이 본격화, "원정출산 줄이려고 영리병원 세우겠다고?")

이처럼 뜨거운 관심에 비해, 토론 내용은 새로울 게 없었다. 대형 병원과 의료계 상층부, 재벌 계열 보험회사와 보수 언론 등이 주도한 영리병원 허용 움직임은 지난 정부에서부터 가속화돼 왔던 탓이다. 나올만한 이야기는 이미 다 나왔던 것.

찬성 5명, 반대 2명으로 구성된 토론회

▲ ⓒ프레시안
게다가 이날 토론회의 핵심 의제인 "의료기관의 자본 참여 다양화 방안"을 둘러싼 토론은 정부 측 토론자 한명을 제외한 나머지 토론자 여섯 명 가운데 2명만이 반대 입장이었다. 정부 측 역시 사실상 찬성 쪽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토론자 7명 가운데 찬성 입장 5명, 반대 입장 2명으로 구성된 토론인 셈이다. 공정한 토론이 애당초 불가능한 구조다.

하긴, 이런 자리에서 찬성과 반대의 기계적 균형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수 있다. 찬반 여론에 관계없이, 기획재정부는 '서비스 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영리병원 도입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태세다. <중앙일보>는 최근 경제부문 에디터의 칼럼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병원 영리화에) 힘을 실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은 이제 촛불시위 탓에 잃은 '실용'을 되찾아 국가 경제를 위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욕을 먹더라도 과감히 추진해야 한다. 현 정부는 이런 방향과 맞는 정부 아닌가"라고 마무리되는 칼럼이다.

현행 제도와 양립할 수 없는 새 제도 도입하며, 현행 제도 유지하겠다?

욕 먹더라도 추진하라는 당부 앞에서, 비판 한 줄을 덧붙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영리병원 도입이 낳을 위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돈벌이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투자할 수 있는 게 영리병원이다. 이윤을 노리고 자본을 투자한 이들 입장에서는 현행 건강보험체제가 거슬리는 게 당연하다. 당연지정제 폐지 등 현행 건강보험체제를 허물어뜨리려는 움직임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건강보험이 무너지고, 민간보험이 그 자리를 메우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도 대개는 알고 있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에 담긴 풍경이 멀지 않다.

물론, 보건복지부는 현행 건강보험체제를 계속 유지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행 제도와 양립할 수 없는 새 제도를 도입하면서, 현행 제도를 유지하겠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경제위기에도 의료비 늘리려는 정부의 역설

더구나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경제 상황을 떠올리면, 영리병원 도입을 추진해야 할 이유가 더 궁색해진다. 영리병원이 도입되면, 의료비가 올라가리라는 것은 영리병원 찬성 측도 인정한다. 의료비 상승의 정도에 대한 생각에서 찬성 측과 반대 측 사이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경제 전문가들의 우려대로 빈곤층이 대폭 늘어나면, 의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는 게 옳다. 의료 소외지역에 보건소를 확충하고,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지금보다 대폭 강화하는 정책이 그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오히려 의료비를 높이는 정책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주요 언론은 여기에 호응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쉽게 납득이 안 된다. 여기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책이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다. 이 책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사람들은 진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프레임(생각의 틀)에 따라 왜곡해서 받아들인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프레임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어'다.

부시 대통령을 당선시켰던 미국 공화당은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했다. 이런 용어를 쓰는 순간, 세금은 '사회악'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회악에서 사람들을 '구제'하는 감세 정책은 마치 각종 구호 및 복지 정책이 풍기는 것과 같은 선한 느낌을 주게 된다. 그 결과, 공화당의 감세 정책에 따른 복지 축소의 피해자인 빈민, 소수자들이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진다. '세금 구제'와 같은 독특한 언어 사용 전략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생각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힘을 발휘한다.

한국 정부와 언론도 이런 수법을 종종 쓴다. 누군가 한국의 획일적인 교육에 대해 비판하면, 보수 언론은 고교 평준화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왜곡해서 해석한다. 고교 평준화 정책을 '획일성'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평등과 획일성은 다른 개념이다.

따라서 획일적이지만 서열화된 교육, 획일적이면서 평등한 교육, 다양하면서 서열화된 교육, 다양하면서 평등한 교육 등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 물론, 이 가운데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다양하면서 평등한 교육이다. 그러나 평등을 획일성으로 이해하는 보수 언론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 이런 점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의료에서도 '다양화' 프레임 동원한 MB정부

경제 위기 속에서 의료비를 높이는 정책을 추진하는 이명박 정부 역시 독특한 프레임을 동원했다. 13일 토론회에서 영리병원 찬성 측이 자주 꺼낸 단어는 '독점'이었다. 왜 의사만 병원에 투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의사들이 병원 투자 기회를 독점하는 구조를 깨서, 돈만 있으면 누구나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토론회 주최 측이 사용한 표현 역시 "의료기관의 자본 참여 다양화 방안"이었다. 기회 독점 구조 대신 자본 참여 다양화를 꾀한다는 뜻이니까, 찬성 측 토론자들과 주최 측이 비슷한 프레임을 동원한 셈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다.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독점'을 허물고, 기회를 개방하자는 이야기로 들리니까. 여기에 '다양화'와 같은 표현이 곁들여지면 긍정적인 느낌은 더 고조된다.

중요한 것은 의료 이용자의 병원 접근성이다

하지만, 차근차근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세금 구제'와 같은 말장난일 뿐이다. 병원의 목적이 오직 돈벌이뿐이라면, 병원 투자에 대한 규제를 줄이는 게 옳다. 하지만, 병원의 목적이 꼭 돈벌이만이 아니라면, 다양한 의료 이용자가 병원에 쉽게 접근하도록 하는 게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 누가 병원에 투자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리고 누구도 병원의 목적이 오직 돈벌이뿐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문제는 병원 접근성이다.

부차적인 문제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외면당한다면, 오히려 그게 진짜 문제다. 따라서 영리병원 도입을 찬성하는 측이라면, 돈만 있으면 누구나 병원에 투자할 수 있는 방식이 다양한 의료 이용자의 병원 접근성을 높인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지방 거주자 및 서민에게는 너무 먼 영리병원

의료 이용자의 경제 수준과 지리적 조건이 모두 제각각이다. 돈이 많고, 서울에 사는 사람만 의료 이용자가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영리병원이 도입되면, 이처럼 다양한 조건을 가진 의료 이용자들이 더 쉽고 편안하게 병원을 이용하게 될까. 적어도 13일 토론회에 참석한 찬성 측 토론자들은 여기에 대해 그렇다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찬성 측 토론자가 반대 측보다 두 배 이상 많이 배치된, 독특한 토론회였음에도 그랬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높은 수익을 노린 대형 자본이 투입된 병원이 대도시가 아닌 곳에 세워질 가능성은 없다. 또,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일 리도 없다. 다수 의료 이용자의 접근성은 떨어진다는 뜻이다.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정부가 추진할만한 정책이 못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정부가 국민 다수에게 욕을 먹더라도, 영리병원을 도입하라고 주문한다. 중요 논점을 흐리는 '프레임'의 힘을 믿는 걸까. 그래서 반발도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그런 모양이다.

영리병원 허용과 의료정보 공개, 별개의 사안을 한데 묶은 이유

13일 토론회는 크게 2부로 나뉘었다. 핵심 쟁점인 영리병원 문제를 다룬 것은 2부 토론이었다. 1부 토론은 의료 정보 공개에 관한 것이었다. 1부 토론 발표를 맡은 이상일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병원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에 자세히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활성화돼 있는 제도라고 했다. 의료비용, 의료사고 횟수, 진료 효과 등에 관한 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되면, 의료 이용자가 더 높은 권리를 누리게 된다는 지적이다. 2부 토론과 달리, 1부 토론에서는 찬반 의견 차이가 크지 않았다. 정보 공개의 폭과 추진 속도, 강제성 여부, 의료계의 담합에 따른 부작용 등에 대해서 작은 이견이 있었지만, 큰 틀에서는 대체로 찬성 의견이었다. 오히려 이런 제도가 제대로만 실현되면, 대형병원으로의 지나친 쏠림 현상도 개선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작은 병원이 의외로 내실 있는 치료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알려지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의료 정보 공개와 영리 병원 허용 문제가 왜 같은 자리에서 논의될까. 토론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서 만난 변혜진 보건의료단체연합 기획국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병원과 의사가 독점해 왔던 의료 정보를 공개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의료 공공성에 부합한다. 또, 다수 국민도 찬성하는 정책이다. 반면, 영리 병원 허용 문제는 그렇지 않다. 성격이 서로 다른 정책을 묶어서 공론화하는 배경에는 '전문가의 기회 독점을 해소하고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의료 정보 공개와 영리 병원 허용을 한데 아우르려는 의도가 있다는 게 변 국장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의료 정보 공개로 이용자의 선택권이 넓어지는 것과 자본의 투자 기회가 넓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실제로 의료 정보 공개에 관한 발표를 맡은 이상일 교수 역시 이 문제가 의료 민영화 쟁점과는 전혀 별개라면서, 공공의료가 발달한 영국에서나 민간의료 중심인 미국에서나 모두 의료 정보 공개가 활발하다고 말했다. 요컨대 의료 정보 공개와 영리 병원 허용은 굳이 함께 논의할 필요가 없다. 영리 병원 허용에 반대하는 이들이 마치 의료 정보 공개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것인양 몰아가기 위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다양한 선택권'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결국, 문제는 다시 '프레임'이다. '다양성', '선택권' 등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를 내세운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더 중요한 문제를 놓치게 된다. 선택권을 다양하게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한 소수에 불과하며 나머지 다수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문제다. 정부가 이런 식의 '프레임' 전략으로 논점을 흐리는 일은 주로 교육 부문에서 잦았다. 그런데, 의료 부문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게으른 기자가 교육 담당 시절 썼던 기사를 '자기 표절'하는 유혹에 노출된 이유다.
(☞관련 기사: 이명박식 '교육자율화', 부메랑은 시간문제, "획일적인 교육통제 반대가 꼭 평준화 해체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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