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경제론'이라는 틀로 한국의 20대 문제를 처음으로 조망해 책 제목 자체가 개념어로 굳어진 <88만원 세대>를 둘러싼 논란이 최근 다시 일고 있다. 젊은 보수논객을 자처하는 변희재 씨가 '실크세대론'을 주창하면서 끼어들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됐다. 공저자인 박권일 씨는 <88만원 세대>가 세대내 '계급'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 했다는 일종의 자기 비판을 하면서 함께 책을 쓴 우석훈 씨를 비판하고 나섰다. 변희재 씨의 글은 논외로 치더라도, 박권일 씨가 제기한 '세대론'과 '계급론'의 문제는 진보진영 내에서 충분히 고민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20대 논객 중 한 명인 한윤형(yhhan.tistory.com) 씨가 이번 논란과 관련해 보내온 기고 중 뒷부분을 게재한다. <편집자> (첫번째 글 바로가기 : "우석훈, 말의 덫에 빠졌다") |
우석훈은 세대론에 대해서는 좌파적 접근도 가능하고 우파적 접근도 가능하며 중도적 접근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문맥상으로 보자면 좌파적 접근은 희망청, 우파적 접근은 변희재의 실크로드 포럼인 것 같다. 우석훈이 변희재에게 '잘 해보라'고 덕담을 하게 된 건 그런 인식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인식이 당치 않다고 본다.
▲ 변희재 씨ⓒ조선닷컴 |
그런데 여기서 우석훈이 세대론에 대한 좌파적 접근이라 언급하는 희망청을 돌이켜보자. 희망청은 "비정규직 철폐와 사회 안전망 확보라는 기존의 진보좌파의 주장"을 충실히 대변하는가? 내가 보기에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당사자 운동을 희망하는 희망청이 그런 주장을 하려면 그것에 동의하는 일군의 20대들을 설득해내야 할 텐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일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희망청이 그나마 지금 하고 있는 일 역시 20대 창업 지원 프로그램 쪽에 가깝다. 말하자면 희망청은 20대 당사자 운동의 좌파적 버전이 아니라, 좌우를 막론하고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보려고 하고 있지만, 딱히 성과를 못 내고 있는 쪽에 가깝다. 변희재가 정말로 20대 창업운동이 답이라고 생각했다면 새로운 단체를 만들 것이 아니라 희망청의 활동을 지원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실제로 실크로드 포럼이란 것이 출범할 때에 내가 알던 모 희망청 상근자의 반응도 "뭐야. 우리가 하겠다는 것과 똑같잖아?"였다.
그렇다면 실크로드 포럼은 희망청과 어떤 방식의 차별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이것은 좌우익의 문제라기 보단 차라리 비판 대상의 문제다. 희망청은 적어도 창업지원프로그램을 돌리면서 누군가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창업이란 건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해야 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희재와 실크로드 포럼은 이삼십대 CEO를 만들겠다면서 이삼십대를 방해하는 원흉으로 '무능한 386 세대'를 지목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일까? 창업을 하고 거기에 지원을 하겠다면서 왜 누군가를 비난해야 하는 것일까? 변희재가 비판하는 386세대의 대표가 진중권이다. 황당하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무슨 수로 이삼십대의 창업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일까?
이유는 대충 이렇다. 변희재는 비정규직 철폐나 사회안전망 확보가 대안이 아니라고 말한다. 끼워 맞춰보자면 시장주의가 그의 신념일 것이고, 그게 그가 <조선일보>에 글을 끼적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시장주의가 답이라면 20대들이 취업을 하지 못하거나 창업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시장이 그렇게 굴러가는 것을 어쩔 것인가. 그래서 그는 시장을 교란하는 어떤 불순분자들을 상정하게 된다. 시장원리의 바깥에서 저희들끼리의 패거리를 형성하고 '유능한 이삼십대'를 탄압하는 386세대가 있기 때문에 시장이 왜곡된 것이 '88만원 세대' 문제의 본질이란 것이다.
따라서 변희재는 '88만원 세대' 담론을 비판함에 있어 언제나 "유능한 이삼십대!!"를 외쳐댄다. 우석훈 등이 오류인 이유는 이삼십대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삼십대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빠른 시일내에 무능한 386세대를 캐발라 버릴 것이다. (물론 반석같은 믿음으로 사도 변듣보님을 모신다면 말이다.)
이건 우파 버전 어쩌구 들어줄 일이 아니다. 실크로드 포럼에서 20대의 유능함의 증거로 들이민 것 중 하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에서 놀라운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대 빈곤 문제에 대한 그들의 대안은 1) 해외 취업 2) 인터넷 문화 관련된 창업인 것이다.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해외에 나가는 현실이 놀라운가? 참으로 순진하기도 하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해외에 진출하는 방식마저도 지극히 계급적인데 말이다. 상류층과 중산층은 자녀를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되고, 서민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자녀를 단기 어학연수라도 보내려고 애쓴다. 그것도 안 되는 젊은이들은 해외 봉사활동이라도 나가서 영어를 배워오려고 한다. 이게 변희재가 찬탄하는 우리 젊은이들의 놀라운 해외진출의 실상이다. 뭐가 그리 놀랍고, 뭐가 그리 자랑스럽단 말인가?
유럽의 우파 정치지도자들도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 "해외에 나가 취업하면 되지!"라고 얘기해 왔다는데, 최근엔 각국의 청년실업률이 모두 높아져서 전혀 쓸모있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들었다. 특수한 예외를 제외한다면, 해외에 일자리는 없다. 봉사활동 자리는 있을지 몰라도. 나는 한국 학생들의 해외 봉사활동에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해 준다면 젊은이들이 경험도 쌓고 약간의 소득도 챙기면서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변희재식으로 본다면 이런 것도 재정을 축내는 '좌파적 대안'일 게 아닌가. 그리고 만일 그가 그런 대안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도대체 사회 안전망 확보에는 왜 반대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인터넷 문화 관련한 창업은 젊은 세대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인가? 몇 명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 희망청이 창업 프로젝트를 붙들고 있는 이유도 그게 몇 명에게는 도움이 될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대 전체를 두고 볼 때 그 한계는 명백하다. 대한민국은 안 그래도 자영업자 비율이 엄청나게 많은 나라다. 이 시점에서 자영업자를 늘리는 것은 서민들에게 서로가 지닌 '벼룩의 간'을 뜯어먹고 살라는 얘기밖에 안 된다. 20대들의 경우엔 문제가 더 심각하다. 기본적으로 현재 한국 사회의 20대는 소득이 없는 집단이다. 인터넷 문화 어쩌구 창업을 하면 그걸 기성세대가 소비할 것 같진 않고 결국 20대들의 문화가 되어야 할 텐데,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자기 돈으로 소비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무작정 창업을 한다고 해서 '시장'이 형성될 수 있을까?
4. '20대 자질론'은 어째서 오류인가?
지금까지 한 얘기를 돌이켜보면 변희재는 시장주의자라야 한다. 그런데 그는 시장원리에 따라 사고하지 않는다. 20대가 돈이 있어야 20대에 의한 20대를 위한 문화상품을 소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도 없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오직 '실력' 뿐이다. 실력 좋아하시네. 실력이 밥먹여 주나? 시장주의의 엄정한 시각으로 보자면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책정되는 가격이 문제다. 여기서 수요(demand)는 필요(need)와는 다른, 그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적인 구매력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20대들의 수요가 없는데 실컷 창업해서 공급을 해봤자 뭐할 것인가?
변희재의 해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의 허황된 말장난에 기초해 있다. 그는 젊은이들은 실력이 있으니 앞으로 잘해나갈 것이고, 386세대는 무능할 것이니 곧 퇴출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틀렸다. 386세대는 퇴출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그들이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생물학적 연령상 지금의 대한민국의 중추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전후 1세대 베이비붐 세대가 차례차례 퇴직을 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386세대는 곧바로 사회적인 실권을 잡게 된다. 이건 좋고 싫고를 떠나서 그냥 그런 것이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이 실력이 있으므로 앞으로 잘해나갈 수 있다는 변희재의 말은, 뒤집어 말한다면 앞으로 그들이 잘 되지 않는다면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말도 된다. 이것도 한심한 소리다. 현재의 20대들이 취직이 안 되는 이유는 그들이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력 공급은 많은데 노동력 수요는 적으니 당연히 가격(임금과 일자리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특정한 세대의 젊은이가 능력은 없더라도, 노동력 공급은 적은데 노동력 수요가 많은 시대에 일자리를 구한다면 당연히 그는 쉽게 취직할 수 있다. 이건 애초에 능력이 어쩌구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운이 없는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자구책은 마련해 주지 않아야 하겠냐는 것이 '88만원 세대'의 문제의식이었다.
능력이 문제라고 친다면, 도대체 그 능력이란 것은 어떻게 잴 것인가? 각 세대별로 투입된 사회적 자원의 양도 다르고, 요구되는 역할도 다르다. 당대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처한 위치도 다르다.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해서 각 세대의 '능력'이란 것을 재고 비교할 방법이 있는가? 변희재는 무슨 잣대로 "386세대는 무능하며, 지금의 이삼십대는 유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는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진중권이 전문성이 없다는 얘기뿐이다. 그 얘기랑 이 얘기랑 무슨 상관이 있나?
다시 한번 말하자면 '능력'은 이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다. 상관이 있다 한들 그걸 잴 방법도 없고 말이다. 변희재의 말만 놓고 본다면 386세대가 무능하다는 증거는 그들이 패거리를 만든다는 것밖에 없는데, 패거리는 386세대 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몇몇 386세대를 퇴출시키는 것이 도대체 이삼십대의 창업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386세대 퇴출과 이삼십대의 일자리 사이의 상관관계를 억지로라도 만들기 위해, 한번 '386세대 퇴출'이란 말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고 쳐보자. 모든 386세대를 쫓아내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치잔 말이다. 그러면 그들이 떠난 만큼 20대들에게 일자리는 생길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변희재의 주장은 나치스의 인종주의 주장과 닮은데가 있다. 1) 시장주의를 신봉한다. 2) 그러나 시장을 교란하는 무능한 불순분자들이 있다. 3) 이들을 타도해야 유능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일치하지 않는가? 그 불순불자가 유태인에서 386세대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다. 세대의 능력 운운하는 것도 인종주의의 자질론과 무척이나 닮았다.
나는 지금 인종주의와 동형의 논리구조를 지녔다는 이유로 변희재를 파시스트로 몰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의 논리라는 것이 파시스트의 정서적 선동처럼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가 극우파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극우파라는 칭호는 그에게 아깝다. 만일 그가 말하는 것들이 실제로 실행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크나큰 우려를 해야 할 것이고, 그를 극우파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그는 극우파라기보단 어릿광대에 가깝다.
만일 변희재가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386세대를 척살하는 공로를 세울 수 있다면 그는 국제적으로는 나치 친위대, 국내적으로는 해방 후 우익 청년단체의 계보를 이을 수 있게 된다. '사이버 서북청년단장'이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안겨줄 용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식의 순수한 의미의 '세대투쟁'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식의 세대투쟁이 가능하다면, 나는 변희재에게 이렇게 요구할 것이다. "오케이, 콜!! 당신 말대로 갑시다. 일단 이한우 기자 등 조선일보 안의 386세대 기자들한테 모두 사직서 내라고 하세요. 그리고 그 빈 자리를 당신 말을 빌리자면 '유능한' 이삼십대 기자들로 채워 보라고 하세요. 그렇게 가면 되는 거죠?" 택도 없는 소리다. 변희재가 이한우에게 무슨 수로 훈계를 한단 말인가. 또한 그렇다고 치면, 지금의 20대는 이제 대기업의 인사담당자의 레벨로 승진한 386세대에게 무슨 수로 세대적인 저항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인사담당자에게 너희들은 무능하니 회사 때려치고 날 고용하라고 소리치라니, 이거야 원 토익책 덮고 짱돌 던지라는 소리보다도 1만배 쯤 더 황당하다. 우파라는 작자가 이렇게 현실성이 없어야 쓰겠나?
변희재는 우물쭈물 이런 식으로 변명을 할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말하는 386세대는 그런 식의 세대개념이 아니라 좌파 이념을 앞세우고 계급투쟁을 조장하는 무능한 어쩌구 저쩌구..." 그러면 나는 "386세대 비판이 세대론이 아니라 이념투쟁임을 실토한 변희재"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수 있겠지. 하여간 제 얼굴에 침뱉는 재주 하나는 타고난 인간이다.
한없이 양보하여 또 그의 말을 옳다 쳐주자. 그러면 문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그런 386세대 몇 명 쫓아내는 것이 이삼십대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 것인지를 묻게 된다. 진중권 등 386 좌파 평론가들을 몰아내면 일자리가 더 생기고 창업이 수월할 거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느 나라 시장주의자의 발상인가?
굳이 누구를 몰아내서 일자리를 만들고 싶다면 진중권이 아니라 이한우를 몰아내도록 하자. 진중권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의 포지션을 자동적으로 누군가가 승계할 리는 없겠지만, 이한우가 퇴직할 경우 조선일보가 기자 한 명을 더 채용할 가능성은 있으니 말이다. 386 숙청론은 이처럼 현실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기업가의 시각으로 봐도 굳이 누군가의 일자리를 뺏어서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면 한창 일하는 386세대가 아니라 정년퇴임이 가까운 20대의 부모님 세대가 그 대상이 되어야 할 게다. 부모들로부터 용돈을 타 쓰는 대부분의 20대들에게 그런 식의 해법이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변희재의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로 가득차 있다. 덧붙여 나는 20대 당사자의 입장에서 '20대 자질론'을 내용적인 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술적인 면에서도 패착이라고 생각한다. 20대들은 앞으로 계속해서 능력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어른들은 20대가 취직을 못하는 현실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말할 것이고, 실제로도 지금의 20대가 가장 능력이 없는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능력이 없어서 취업을 못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취업을 못하고 취업시장을 서성이다 보면 아무런 능력도 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능력이란 것도 대개는 회사에서 갈굼먹으면서 길러진 것이다. 그런 기회를 잡지 못한 대부분의 우리 세대는, 나이를 먹어도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이 세대의 슬픔이요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겠는데, 그런 현실을 두고 "사실 우리 세대는 남다른 능력이 있어. 그걸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희들의 농간 때문이지."라는 식으로 대꾸했다가는 몰매를 맞게 될 것이다. 자질이나 능력이란 말을 해체하고, 노동력의 질을 향상시키고 취업준비자나 실업자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등의 사회적인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대안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20대들의 품성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모든 종류의 지식인들에 대해 비판적이다. 우파 뿐만이 아니라 좌파, 이를테면 이어령 뿐만이 아니라 고미숙에게도 말이다. 그들의 비판이 합당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변희재의 궤변의 유일한 의미는 이런 종류의 쓸모있는 고민을 가로막는 일에 이 한몸 불사르겠다는 것이다. 만일 이 비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변희재가 할 일은 간단하다. 젊은이들의 창업과 상관없는 진중권은 잊어버리고, 실질적으로 이삼십대의 창업을 가로막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한국 우파'가 된 처지에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며 신규기업 창업을 가로막는 기업생태계까지 규탄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창업의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돌파할 수 있는 사회적인 지원책이나 제도적인 개선에 대해서 고민하기 바란다. 그런 고민들이 쌓일 때에야 그의 단체는 "건설업체 사장만 끼어 있으면 어디 '지역토호' 모임"으로 보이겠다는 박권일의 비판에 해당하지 않는 단체임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좌파 때리기'에 골몰하는 창업 지원 단체라는 건, 창업 지원을 명분으로 한 저열한 정치집단일 뿐이다. 우파라는 것이 그토록 쉬운 것인가. 지금의 그는 우파가 아니라 '사이버 우익 테러리스트 지망생'에 불과할 뿐이다. 말이 되지 않는 대의들을 얼기설기 엮어 사적인 원한을 품은 이(=진중권)를 단죄하는 꼴도 어찌나 닮았는지. 이런 이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허용하는 것 자체가 한국 우익의 수준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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