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와 반도체는 '카지노형 산업'
실물 경제에서 기업의 특성이나 방식에 따라서 업종별 분류나 지배구조상의 차이점 같은 분석수단들을 종종 사용하게 되는데, 단기적인 수익률 추이의 분석이나 종목별 주가 변동보다는 보다 장기적인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에 상당히 유용한 결과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유사한 시각에서 조직 분석을 하기도 한다.
산업별 특성이라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카지노형 산업'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데, 워낙 산업 주기의 변동폭이 큰 데다가, 한번만 장세가 잘 맞으면 지난 동안에 누적된 적자를 한 번에 만회하고 순식간에 경영을 호전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특정 자동차 모델의 성공 여부가 기업의 시장 기반 자체를 결정하는 자동차가 대표적인 카지노형 산업인데, 요즘은 오히려 신규 반도체 출시 주기에 따른 가격 등락폭이 큰 반도체 산업이 오히려 더 카지노형 산업에 가까운 편이다.
지난 4년 동안 수출 위주로 구성된 한국 경제가 극도로 허약해진 내수 기반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국민경제를 지탱해 온 큰 축이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라는 두 기업군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특별히 이견이 없다.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언제, 어떻게 터질 것인가?
물론 성장률과 고용이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 현 상황에서 국민경제의 국면조정에 실패한 것은 기업이 책임질 일은 아니다.
흔히 실리콘 자본주의라 불리는 이런 양상을 전형적으로 보이고 있는 한국 경제는 지금 거의 자본주의의 '장기 파동'에 해당할 정도의 구조적 위기로 깊게 들어가는 중이다.
오랫동안 실물경제를 지켜본 경제학자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가 언제 터질 것인가"라는 시기의 문제, 그리고 그것은 일본식 '버블 공황'의 형태가 될 것인가 아니면 1997년과 같은 '외환위기'의 형태가 될 것인가라는 형태의 문제를 놓고 조심스럽게 논의하는 중이다.
이 상황에서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현재 맞고 있는 위기가 구조적이고 심각한 것인가, 아니면 우연한 것이고 일시적인 조정국면에 의한 것인가? 물론 예언자만이 대답할 수 있는 형태의 질문이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는 이 두 업체에 대한 위기의 전개과정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고, 조금 자세한 요소분석도 가능할 수 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 가능케한 '높은 보너스', '주주 자본주의'에서도 유지될까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위기는 한국 자본주의 전체의 변화만큼이나 해당 산업의 특정한 사이클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만 잘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닌 세계적 경쟁 상황이라는 객관적 조건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외부적 조건은, 아주 안 좋은 상황이다.
삼성전자의 경우는 기업 조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우선적이다. 물론 기업을 분석하는 여러가지 방식들이 있기는 하지만, 삼성전자의 가장 큰 특징은 조직 구조에 있다. 후발업체들의 지난 2~3년 동안의 공격적인 반도체 생산공정에 대한 공격적 투자들과 신규 반도체 수요의 지체 현상 같은 것은 이미 주어진 조건이라고 간주하자.
삼성전자는 삼성이 그렇듯이 무노조 경영이 조직의 특징인데, 이 시스템은 내부 조직에서 발생하는 협동의 문제를 '높은 보너스'로 버텨내는 방식에 의해서 작동하게 된다.
우연이지만 가장 강력한 노조를 가지고 있는 현대자동차와는 전혀 다른 삼성식 경영방식의 특징 중의 하나다.
90년대 중반 이후로 세계 선도기업이 된 삼성전자는 이렇게 발생한 기업 수익의 상당 부분을 직원들에 대한 보상 차원의 보너스로 돌렸는데, 이 방식은 매우 효율적으로 움직여왔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삼성의 이런 조직 운용방식은 여전히 효율적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여기에 위기가 던져졌는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주가 지키기'를 위해 이윤을 소진하느라, 노동자에 대해 과거와 같은 보상을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우선 외국인 주주가 늘어나게 되면서 우리나라 기업 중에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주주자본주의의 전형을 따라간 것이 삼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 2~3년간 주식가격을 지탱하기 위해서 8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자사주 소각에 이윤의 상당 부분을 사용하게 되었다.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로 흔히 지적되는 '주가 지키기'의 전형적인 부작용이다.
무너진 '종신 고용제', 내부 협력과 숙련도를 높일 대안이 없다
이런 어려움에 결정적으로 가중시킨 것이 최근의 반도체 시장에서의 수요 경직 현상이다.
삼성은 선발업체로서 조기에 제품을 출시하고 개발비 회수가 끝난 제품의 가격을 하락시켜 후발업체의 추적을 뿌리치는 소위 '매몰비용 전략'을 주로 써 왔다. 그런데 2~3년 전부터 이런 전략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게 되면서 삼성의 흑자 폭이 조금씩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조직 내부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됐다.
물론 진짜 위기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앞으로가 큰 일인 셈이다.
또 하나는 삼성이 갖고 있는 몇 가지 조직적 약점이다. 내부적으로는 최근 지나치게 '귀공자 자본주의'를 추구했던 삼성의 경우, 노동자의 '숙련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할 수 있다.
여기에 오랫동안 삼성의 협력업체들이 가지고 있는 수직적 협력관계에서의 문제점이 조직론으로 지적할 수 있는 외부적 문제이다.
그렇다고 지금 삼성에서 대부분의 기업조직에서 경영진과 대화 파트너 관계에 있는 노조를 갑자기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기존의 문화가 정착된 상황에서 내부 협력을 갑자기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직론의 관점에서 삼성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삼성 역시 '직업 안정성'을 더 이상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오랫동안 우리나라 대기업을 지탱해왔던 일본식 종신고용제가 무너진 이후에 새로운 조직 모델을 통해서 내부 협력과 숙련도를 높이는 방식에 대해서 별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이 결국 외부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될까? 기업의 존폐의 위기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규모효과에 의한 선도기업의 자리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진지하게 내부 조직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순간이다.
"굳이 '현대차'를 사야할 이유가 없다"는 국내 소비자들
현대자동차의 위기는 삼성보다 근원이 훨씬 크고 깊다. 지난 3년간 자동차 분야에서 현대는 적절한 기술개발 모델에서 인상 깊은 성과를 올린 것이 아니라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지금까지 국산차를 어떻게든 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국내 소비자들이 한미 FTA 협상과정을 보면서 '최대 수혜기업'이 된 현대자동차에게 애국적인 구매를 더 이상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소위 소비자 구매패턴의 변화가 미묘하게 발생하고 있다.
물론 잘 만들고,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면 상관없지만, 미국상표를 달고 들어오게 될 BMW나 렉서스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현대자동차를 구매하게 될 비경제적 요인은 많이 사라진 편이다.
여기에 저가 시장에서 중국산 자동차들이 수입되면 일단은 내수에서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은 객관적인 상황 변화일 뿐이다. 모든 기업이 외부적 도전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창조 절차'를 만들게 되기 때문에 이건 순전히 현대자동차가 앞으로 극복할 과제인 셈이다.
지급보증 관계로 얽힌 현대제철, 현대차 불안의 뇌관
물론 기업에 대한 실제 대규모 투자자들은 이런 미묘한 변화보다는 기본적인 현금 흐름을 더 많이 참고한다. 외부에서 현대자동차에 대해서 주목하는 객관적인 가장 큰 위기는 당진에서 진행되는 현대제철에 대한 현대자동차의 지급보증 관계다.
예전 IMF 환란의 격발지가 되었던 한보철강 바로 그 자리에 진행되는 이 일관제철에 대한 투자는 5조 원 이상의 장기투자인 셈인데, 성공하면 현대자동차가 기대하듯이 자기 입맛에 맞는 특수강철을 공급해서 원가 절감에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기간 동안에 현대자동차 그룹의 현금흐름에 중요한 위기 요소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 시점에서 투자자들은 이런 장기적 내부투자 과정에서 충분한 자금 흐름을 현대자동차가 확보할 수 있을지, 아니면 중간에 또 다른 국민경제 내에 혹은 현대자동차 내부에 중대한 위기가 생겨 이렇게 한 묶음으로 엉켜있는 대규모 투자가 어떤 자금 흐름에 변화를 만들어낼지에 대해서 주목하게 된다.
결국 1차년도 투자가 시작된 현대제철이 성공하는 수밖에 없는데, 사업기간 내내 중대한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셈이다.
기술적인 문제도 있다. 과연 과연 전기로 업체였던 현대제철이 포스코나 신일본제철처럼 오랫동안 철강업에 종사한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특수강 제조기술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산업정책은 어디에 있는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모두 지금은 내재했던 위기 요소들이 조금씩 밖으로 드러나는 국면이지, IMF 환란 때처럼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순간은 아니다.
주가도 적정한 범위 내에서 유지되고 있고, 아직은 생산공정이나 현금 유동성에서 결정적인 위기를 진단할 순간은 아니다. 그러나 내재적 위기가 없는, "지금 한참 잘 나가는 중"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지금의 한국 국민경제에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지나치게 높아진 외부경제에 대한 의존도이다. 90%에 육박하는 외부경제 의존도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존재한 적이 없었던 기이한 구조인데, 산업구조와 경상수지 구조 같은 것들이 단기에 변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좋든 싫든 이 구조를 끌고 가면서 연차적인 전환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는 지나치게 '모양내기' 정책들에 치중하는 편인데, 사실 국민경제는 그렇게 단숨에 개혁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닌 데다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정책 기조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면서 한국 경제 구조가 더욱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점 하나만 고르라면 산업정책의 실종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노조를 부정하는 삼성전자나 한미 FTA의 홍보대사를 자처했던 현대자동차나 '사회적 책임투자(SR: Social Responsibility)'나 사회적 신뢰도의 관점에서의 모범기업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워낙 이 두 덩치 큰 회사에 대한 국민경제의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국민들도 싫으나 좋으나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셈이다.
불행히도 올해는 대선이 있는 해다. 그래서인지 산업정책이나 국민경제의 위기관리 같은 것들은 이미 몇 달 전부터 레임덕 상태인 것으로 알고 있다.
경제총괄부처나 산업실무부처들이 한미 FTA에 대한 그럴듯한 후속 조치를 만든다고 넋이 나가있는 상태이고, 그렇다고 지금 대선놀음에 푹 빠져있는 예비 후보들이 이런 골 아픈 문제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망하고 흥하는 것은 기업이 책임질 일이라고 하지만, 이미 충분한 복잡성을 안고 있는 한국의 국민경제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시장논리에만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제 위기 감당할 사람은 결국 국민이다"…밀실 정책은 이제 그만
'당진발 경제위기'나 '반도체형 경제 위기'니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거시경제가 위기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은 상당히 명확한데, 이 과정에서 기업 조직내부의 문제가 되었든, 혹은 외부적 자금 흐름에 문제가 되었든, 안 좋은 상황에서는 누적적이고 폭발적으로 위기가 발현하는 것이 바로 경제 공황의 메카니즘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민들이 '패닉'한다고 IMF 경제위기 때처럼 감추고 뒤에서 해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기에는 이미 국민경제의 개방도도 크고, 쓸 수 있는 경제정책도 별로 없다는 점이다.
세밀하고 사려 깊은 산업정책과 함께 어차피 그에 필요한 재원지출을 감당해야 할 국민들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과정들이 없이 지금의 위기를 과거와 같이 밀실에서 처리하는 방식으로 헤쳐 나가기는 어렵다.
어차피 앞으로도 수없이 발생할 수많은 경제위기를 직접적으로 감당할 사람들은 국민들이고, 아무리 정권이 자화자찬 한다고 해도 책임질 사람도 국민들이다.
경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한미FTA 홍보에 들인 노력 1%만 쏟아도
노무현 대통령은 이데올로기 싸움에는 아주 능했다. 하지만 경제는 그렇게 이데올로기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차분한 위기관리 장치가 지금은 필요할 것 같은데, 현재 그런 게 보이지는 않는다.
한미 FTA 홍보와 대책마련에 들이는 힘과 열정의 1/100만 들여도 한국의 산업은 지금의 위기 국면을 무난히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지금, 누가 이 일을 담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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