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은 자신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보고된 3일, "철저한 사상 검증이자 마녀사냥"이라고 반발하며 "21세기 대한민국 국회가 3세기 전만도 못하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3세기 전만도 못한 것"은 '이석기 녹취록'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다. 이날 국회에 제출된 체포동의안에 담긴 RO(Revolution Organization) 조직원들의 '공모' 내용을 보면, 이들의 '전쟁 대비 시나리오'는 시대착오적이다 못해 다소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석기 의원을 비롯해 130여 명의 조직원이 참석한 문제의 '5월 회합'에선 장난감 총의 개조, 압력밥솥을 이용한 사제폭탄 제조나 철도·유류 등 국가기간시설 타격 등의 논의가 구체적으로 이뤄졌다. 이 의원은 이 자리에서 북한이 무력혁명 투쟁의 상징으로 선전하는 '한 자루 권총 사상'과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을 예로 들며 "(철탑 등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폭파시키면 그야말로 쟤들(국가기관)이 보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의원의 수 차례에 걸친 언급처럼, 당시 통합진보당 수뇌부가 제 아무리 '혁명적 결정적 시기(전쟁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하더라도, 압력밥솥 개조 따위의 방법으로 '남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비현실적 발상이다. 그러나 "자신의 하나 뿐인 목숨도 걸어야 하고 동지들하고 함께 생사를 걸어야 한다"는 이들의 논의는 비현실적이다 못해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이날 <프레시안>이 입수한 법무부의 체포동의안에는 문제의 지하혁명조직 'RO'의 '5월 회합' 이전의 행적들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RO'의 가입 절차 및 조직 체계, 강령과 보안 수칙의 내용 역시 상세하게 드러났다.
▲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자신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보고된 3일 국회 본회의에 출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
이석기, 왜 '3대 전쟁 지침' 하달했나?
풀리지 않는 의문은 문제의 '5월 회합'에서 왜 국가 기간시설 타격 등의 전쟁 대비 시나리오가 논의됐느냐는 것이다. 체포동의안에 따르면, RO 조직원들은 '총책'인 이석기 의원의 지휘 아래 국회 등에 침투해 '혁명의 결정적 시기', 즉 전쟁 시기를 기다려왔고, 한반도 정세가 얼어 붙던 지난 상반기를 그 '결정적 시기'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광명성 3호' 발사를 시작으로 올해 1월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포기 선언, 2월 3차 핵 실험을 거쳐 3월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을 통한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까지 나오자, 당시 한반도 정세를 '전쟁 상황'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체포동의안에 따르면, 이 의원은 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직후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홍순석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등 지역책을 통해 "현 정세는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이라며 세포 단위 조직원들에게 '전쟁 대비 3대 지침'을 하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하달한 지침은 △비상시국에 연대 조직을 빨리 꾸릴 것 △대중을 동원해 광우병 사태처럼 선전전을 실시할 것 △미군기지, 특히 레이더 기지나 전기 시설 등 주요 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것 등이었다.
공안당국은 이후 이 의원이 현 정세가 '전쟁 상황'이라는 인식을 조직원들이 공유했다고 판단, 북한의 전쟁 상황 조성 시 이에 호응하는 사회주의 혁명은 남한에서 수행할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지난 5월8일경 지역책들에게 전체 조직원 소집령을 발령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틀 후인 10일 경기도 광주시 소재의 한 청소년수련원에서 전체 조직원이 비밀회합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이석기 의원은 "현 정세는 혁명과 반혁명을 가르는 매우 중요한 시기"라며 "3월5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서 정전 협정을 무효화했다. 정전협정을 무효화한다는 것은 전쟁인 거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이 의원은 10여 분간 연설을 하다가 이번 사건의 공동 피의자인 김근래 경기도당 부위원장이 술에 취해 회합에 참석한 모습 등을 보고 격노, 기강해이와 보안 문제를 질타한 뒤 조직원들을 곧바로 해산시켰다.
이 의원은 조직원들을 해산시키면서 "소집령이 떨어지면 바람처럼 와서 순식간에 오시라. 그게 현 정세가 요구하는 우리의 생활 태도이자 사업 작풍이고, 당내 전쟁 기풍을 준비하는데 대한 현실 문제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회동이 10분 만에 종료되자, 이틀 후인 5월12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종교 시설에서 문제의 '2차 회합'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 연설을 한 이 의원은 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이 "혁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위기가 아니라 강력한 혁명적 계기"라고 밝혔고, 이어 "현 정세가 대격변기와 대전환기라는 흐름은 분명하다. 그런데 남녘에 있는 우리는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 고난을 각오하라. 제2의 고난의 행군을 각오하라"고 선동했다.
또 "조선 인민라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선 민족이라는 자주적 관점에 서서 남쪽의 혁명을 책임진다는 자주적, 주체적 입장에서 현 정세를 바라보면 옳다"고 지시했다.
"준전시 아니라 전쟁이다"…이석기, '선전·선동', '물질·기술' 투트랙 지시
결국 이 의원을 비롯한 RO 조직원들이 당시 한반도 정세를 전시 상황으로 인식해 조직 차원의 전쟁 준비를 논의했다는 것인데, 이 의원은 당시 임박한 전쟁이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비정규전'이 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선전선동과 같은 심리전·사상전을 전개하는 한편 주요 시설 타격을 위한 기술·물질적 준비도 차질없이 해나갈 것을 조직원들에게 결의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이 의원은 당시 "(북한이) 핵 보유 강국이 되면 전면전은 없다. 북미 간의 전면적 대결을 못할 거라고. 그렇게 전투가 나면 천만 이상이 죽어버린다. 거의 조선시대로 회귀하는 거다. 그것을 미국놈들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전개되는 것이다.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것은 현대전의 영역이 심리전이고 사상전이라는 것이다. 선전선동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이 의원은 '물질·기술적 준비체계'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전쟁을 진행하는 데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한 뒤 "구체적으로 하면 물질, 기술적 준비 체계를 반드시 구축해야 한다. 힘과 힘이 충돌하는 시기에 저놈들이 우리를 방해시켜서 우리가 역량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물질, 기술적 준비를 갖춰야 한다. 이게 현 정세에 우리가 저들과 싸우는 이기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의원의 연설이 끝난 뒤 RO 조직원들은 한 시간 가량 지역별·권역별 토론을 통해 전시에 대비한 '물질적·기술적' 준비 사항 등을 논의했고, 특히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이상호 경기진보연대 고문과 한동근 전 수원시위원장 등 경기 남부권역 조직원들은 △유류저장고·철도·통신시설 등 국가기간시설 타격 △주요 보안시설의 위치 사전 파악 △장난감 총기를 인명 살상용으로 개조하는 방법 및 사제폭탄 제조법 습득 △무기고나 화학약품 저장고 등의 소재 파악 등을 논의했다고 공안당국은 밝혔다.
경기중서부 지역 조직원들의 토론에선 "저격을 위해 총을 준비해야 한다", "주요 시설을 마비시키려면 첨단 기술이나 해킹 기술 등이 필요하다"는 등의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토론이 끝나고 이 의원은 마무리 발언에서 지난 4월 발생한 보스턴 테러에서 쓰였던 압력밥솥을 이용한 사제폭탄 제조 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보스턴 테러에 쓰였던 이른바 압력밥솥에 의한 사제폭탄 매뉴얼도 공식도 (인터넷에) 떴다고. 관심 있으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관심 없으면 주먹만 지른다"며 조직원들에게 구체적인 준비를 지시했다.
또 북한이 무력 혁명 투쟁의 상징으로 선전하는 '한자루 권총 사상'과 사회주의 혁명인 '볼셰비키 혁명'을 예로 들면서 "(철탑 등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폭파시키면 그야말로 쟤들(국가기관 등 지칭) 입장에선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도처에서 동시다발로 전국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자"라고 선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의 首는 누구인가?"-"비서 동지(김정일)입니다"
이밖에도 체포동의안에는 국가정보원이 내란 음모 활동의 근거지로 지목한 RO의 실체와 조직원들의 행동 강령 등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동의안에 따르면, RO는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삼아 이석기 의원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두고, 그 산하에 경기동부·경기남부·경기중서부·경기북부 등 4개 지역별 권역과 '중앙팀', '청년팀' 등의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다.
또 RO는 조직원 가입식에서 신규 조직원에게 △조직 보위의 의무 △사상 학습의 의무 △재정 방조의 의무 △분공 수행의 의무 △조직 생활의 의무 등 '5대 의무'를 부여하고, 신규 조직원이 '결의 발표'를 통해 조직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결의토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구체적으로 가입식에서 '지도성원'(상부 조직원)이 신규가입 조직원에게 "우리의 수(首)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면 신규 조직원이 "비서 동지(김정일 지칭)입니다"라고 답하고,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R(혁명가)이다"라고 답하는 절차를 거치는 등 결의를 다진 것으로 전해졌다. 또 신규 조직원에게 조직명(가명)을 부여하고 북한의 혁명 가요인 <동지애의 노래>를 제창하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3~5명으로 구성된 세포단위 조직을 단계별로 배치해 총책→상급세포책→하급세포책→최하급 세포원으로 이어지는 지휘 통솔 체계를 갖추었으며, 총책을 정점으로 상부조직원이 하부 조직원의 사상과 활동을 지도하는 등 철저한 상명하복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공안당국은 밝혔다.
이밖에도 공안당국은 체포동의안에 첨부한 범죄 사실에서 "RO는 북한의 대남혁명론에 입각한 '남한 사회주의 혁명'을 단체의 활동 목적으로 설정하고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과 북한 식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밝혔다.
"긴급 상황 발생하면 USB 부셔서 삼켜라"…기밀 수칙 철저
이들이 수사 당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철저한 보안 수칙을 생활화한 점도 드러났다. 조직 관련 사항에 대해선 반드시 공중전화나 '비폰'(비밀 휴대전화)을 사용하고, 회합 시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반 휴대전화는 전원을 끄도록 했다.
노트북이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는 6개월 단위로 교체토록 했다. 특히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홍순석 경기도당 부위원장은 조직원들에게 압수수색 등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USB(이동식디스크) 조그만 것 같은 경우는 깨서 먹거나 어떻게 해도 되니까"라며 조직원들에게 저장매체 파손 방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도 했다.
회합 시 수사기관의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이동하거나, 버스로 이동할 때는 목적지 전 정류장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하는 등 이른바 '꼬리 따기'를 행동지침으로 삼은 점도 드러났다.
조직과 관련한 내용은 되도록 암기해 근거를 남기지 않도록 했고, 유사 시를 대비해 경기도 인근에 자신만 알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게 했다. 또 유사 시를 대비해 10만 원 정도의 현금을 항상 소지해야 하고, 이른바 '잠수(도피)'를 탄 뒤 조직원끼리 재접촉할 시에는 서로 암호를 교환해 안전을 확인한 뒤 접촉토록 했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지난 5월12일 회합에서 "보위에는 바늘 틈 하나도 흥정할 겨를이 없는 거야"라며 "개인이 책임진다? 책임질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보위 문제에 대해서는 타협할 권리도 없고, 단지 지켜야 할 숭고한 의무만 있다"고 보위(보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밖에도 공안당국은 RO가 국회를 대남 혁명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 투쟁의 교두보'로 규정해 통합진보당을 건설하고 지난해 총선에서 이석기 의원을 비례대표 2번으로 입성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고 밝혔다. 체포동의안에 따르면, 이 의원은 5월12일 회동에서 조직원들에게 직장이나 활동 장소를 '제국주의 상대 전쟁의 최전방의 초소'라 지칭하며 RO가 통합진보당의 당권을 장악해 정치적인 합법 공간을 확보한 것을 '혁명의 진출'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공안당국은 이 의원 외에도 RO의 조직원 중 2명이 지난해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와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각각 당선됐다고 밝혀, 현역 의원 중 추가적인 RO 조직원이 누구인지를 놓고 정치적 후폭풍이 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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