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주택가나 거리를 지나다 보면 조촐한 옷차림에 팔짱을 끼고 한가히 산책하는 노인부부와 자주 마주치게 된다. 인생의 황혼기에 삶의 여유가 있고 느긋해 보여서 좋다. 우리식으로 치면 자식 성공시켜 놓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 많지 않은 복 받은 노인네들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선택받은 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65세 이상의 스웨덴 노령인구 전체가 향유하는 인생의 느지막 삶의 모습이다. 국가의 노인복지 혜택을 논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일생동안 몸담았던 그 사회의 발전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대가로서 누리는 당연한 시민권의 행사라고 보는 것이 그들의 시각이다.
우리 헌법 10조의 '국민행복권 추구'를 국가가 보편적 복지제도의 이름으로 노인층에게까지 실현시켜준 셈이다. 덕분에 스웨덴의 젊은이들은 경제적으로나 도의적으로 노부모에 대한 봉양 의무가 없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필요도 없고, 불쌍한 우리 부모 때문에 마음 편한 날이 없는 자식이 있을 리도 없다. 자식 교육비와 노부모 부양비가 서로 얽혀서 힘들어하는 부모 자식 간의 경제적 의존관계와 속박을 나라가 제도적으로 풀어준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서로 부담 없이 각자 자기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가족관계에서는 우리네의 끈끈하고 살가운 정이 솟아날 수 없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이런 제도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핵가족 사회로 바뀌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한 정치 지도자들의 혜안과 인간의 존엄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사회정의가 바탕이 되어 1918년의 빈민구호법을 발전시켜 1935년에 세계 최초로 국민기본연금제(folkpension)를 실시하였다. 1957년에는 빈민구호를 사회구제로 전환하였고 1959년에는 생애소득액과 담세액을 고려하여 좀 더 공정한 노령연금 배분을 위한 추가연금(ATP)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초 고령사회 진입에 따른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로 비용 지불집단과 수혜집단 간의 불균형에서 오는 연금재정 문제, 사무직과 육체노동자 간의 연금수급액 불균형 등을 시정하고자 1990년대 초반부터 공적연금개혁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후 5개 정당대표와 경제전문가, 법률전문가, 국가사회보험청 전문가가 참여하여 개혁 법안을 만들었고, 1994년에 의회의 85% 지지로 개혁의 기본방향이 설정되었다. 드디어 1998년 구체적인 새 연금개혁법이 법제화되고 1년 간의 시험기간을 거쳐 2000년부터 시행되었다. 10여 년 간의 철저한 연구와 심의 끝에 합의된 결과로 채택된 새 제도의 핵심은 소득에 비례한 소득연금(Inkomst-pension, IP)과 일부 주식저축 형식의 프리미엄연금(Premiepension, PP)이다. 이처럼 사회∙경제적 상황 변화에 따른 예측 가능한 장기 전망에 기초한 제도 개혁 덕분에 스웨덴 국민들은 정치인들을 신뢰하고 일상적인 자기 직분에만 충실할 수 있다. 수년째 OECD 회원국 중 최저 출산율을 보여도 속수무책으로 성장만 부르짖고 장기적인 연구와 기획 없이 뜬금없는 4대강 살리기, 세종시 수정안 등으로 온 나라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우리네 정치풍토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노인이 권리 지키는 길은 단결뿐
스웨덴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에 대한 식견과 관심이 높은데, 노인층도 예외가 아니다. 정치계에는 현재 7개의 정당이 공존하면서 각각 색깔이 다른 이념과 정책을 가지고 국민 앞에 다가선다. 제1당은 1899년에 창당된 사회민주당으로 120년 역사를 자랑한다. 유권자들은 어느 정당이 자신이 속한 계층의 이익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지 평소 각 당의 정강과 정책을 검토하여 지지 정당을 결정한 다음, 그 당의 핵심 노선이 바뀌지 않는 한 계속해서 같은 정당을 지지한다. 필자가 유학하던 1970년대 초 웁살라(Uppsala) 시내에 자주 들리던 자전거포가 하나 있었다. 철거대상 건물 헛간에 자리 잡은 주인 할아버지(Gustav Harrå) 는 동양 학생인 나에게 특별히 친절하여 간단한 수리비는 받지도 않았다. 한번은 자전거 수리 차 그 곳을 방문했는데, 마침 총선거를 며칠 앞둔 시점이라서 "할아버님은 이번 선거에 어느 당을 찍을 거냐"라고 물어보니 보통 스웨덴 사람들의 유보적 자세와는 달리 선뜻 자기의 지지 정당을 알려줬다. 자기 집은 원래 노동자 집안이라서 조부 시절부터 3대째 사회민주당을 지지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 시절 학교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서민층 노인이 총선에 대해 뚜렷한 자기 입장을 가진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필자의 집에서 식사 후 방명록에 그려준 자전거와 감사의 인사말. 아래는 하로(Harrå) 할아버지 내외 서명. |
이처럼 노동자는 사민당(S), 농민은 농민연합당(현재 중앙당 C), 기업인은 온건보수당(M), 공무원과 자유업종은 자유주의 이념을 기본으로 하는 국민당(Fp), 종교 성향은 기독민주당(Kd), 보다 철저한 진보주의자들은 좌익당(V), 환경 친화적인 부류는 환경당(Mp)을 각각 지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노인들도 큰 이익단체의 하나인 은퇴노인전국연맹(PRO, 1942)에 가입하여 스스로의 권익옹호에 철저하다. 그리하여 선거철만 되면 여당 당수인 현직 수상은 물론 야당 당수들도 노인연맹을 찾아가서 자기당의 노인복지 개선정책을 열심히 설명하고 지지를 부탁하며, 더욱 더 어르신들을 잘 모시겠다고 약속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웨덴 정치인은 정치도의상 대국민 헛소리 약속, 즉 공약(空約)을 하지 않도록 체질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랬다가는 해당 정당과 정치인은 국민을 기만한 죄 값으로 다음 선거에서 치명상을 입게 된다. 주인이 머슴을 심판하는 유일한 권리를 그들은 매 4년마다 90%에 가까운 총선 투표율을 통해 엄정하게 행사한다. 사회 각 계층, 각 직종마다 사람들은 자기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이익단체를 구성하여 단결된 힘으로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니 스웨덴 정치인들은 일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심지어 굴뚝청소부까지 조직을 통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관철시킨다.
한국 노인들의 사회적 대우
어느 나라나 젊은 세대는 구세대가 흘린 땀과 노력의 대가로 부모 세대보다는 더 유족하고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른바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발전 덕택에 오늘을 사는 한국의 젊은 중산층 세대는 현대식 아파트에 자가용을 굴리며 신혼여행은 의례 해외로 나가는 여유 있는 생활을 한다. 뿐만 아니라, 해외여행의 대중화로 매년 1000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외국관광을 즐기며 산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함께 피땀 흘려 이룩한 성장의 과실과 행복을 골고루 나누고 있는지, 아니라면 왜 그런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세계 12위 경제대국, G20 국가의 화려한 대외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이며 장기적인 복지제도의 부실로 나타난 한국사회의 극심한 빈부 양극화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중에서도 70세에서 90세에 이르는 대다수 고령세대의 삶의 조건은 매우 팍팍하다. 날씨가 웬만한 봄, 여름, 가을 날 종로4가 종묘공원에 나와 서성거리다 구호단체에서 주는 점심 한 끼를 때우고 느지막이 귀가하는 하루 2000~3000명의 노인 군상들을 보라. 영하 10도의 엄동설한에 손수레를 끌고 폐지를 주워 모으러 다니는 70대, 80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온기 없는 쪽방에서 민간단체의 구호 손길에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는 독거노인들, 그들의 삶은 어느 텔레비전 아침 방송의 함축적인 제목 그대로 '준비 없는 노후는 재앙이다.' 그렇다면 재앙 속에 구차한 여생을 이끌어가는 이 땅의 노인네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 후 혼란기, 6.25 전쟁, 경제개발 시대에 배고픔을 참아가며 국방에, 새마을 운동에, 모든 국가시책에 순응하며 묵묵히 일해 온 조국 근대화의 주역들이 아닌가. 현대화와 개발의 성과를 일부 정치 지도자들의 업적으로 치하하면서 이 사회의 저변에서 온몸으로 봉사해온 어른들을 이제 쓸모없는 짐스러운 존재로 천대한다면, 그곳은 인간다운 사회가 아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1999년 김대중 정부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하여 전 국민의 기본생활에 대해서 국가의 책무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은 획기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만 60세 이상 노인가구 중 25%에 해당하는 '절대빈곤층'은 3인 가정 최저생계비인 월 108만 원의 3분의 1 밖에 안 되는 36만 원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되니, 이것이 어떻게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한국개발원 고령화종합보고서, 2008). 앞서 소개한 스웨덴의 각종 복지급여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관대한 액수로서 괜찮은 수준의 생활(ett dräglit liv)을 보장해 주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의 경우는 정부나 지자체나 똑같이 빈민구호 수준의 지원비를 지급하면서 예산부족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게 구실이요 설명이다.
▲ 서울 보문동에 사는 어느 할머니의 집. 이 할머니가 종이 상자를 모아서 버는 돈으로는 기본적인 의료비를 감당하기에도 무리다. 이 할머니는 치료비가 없어서 한 쪽 눈의 상처를 방치하다가 시력을 잃었다. 현재 한국에서 만 60세 이상 노인가구 가운데 25퍼센트에 해당하는 '절대빈곤층'은 3인 가정 최저생계비인 월 108만 원의 3분의 1 밖에 안 되는 36만 원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한다. ⓒ인권오름 |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면 그런 이유가 타당한지 의심스런 사례가 많다. 시민의 세금으로 멀쩡한 보도블록을 해마다 갈아치우는 일, 도심 한복판 복잡한 보도 옆을 파서 잘 보이지도 않는 실개천 만들기, 아파트 주변에 수십억 원을 들여 공원 만들기, 정자 짓기, 값비싼 운동기구 설치하기, 멀쩡한 등산길에 난간다리 설치하기, 이 모두가 시민의 휴식공간과 건강증진을 위해 필요한 문화시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공적 사업에는 완급에 따른 우선순위가 있다.
'서울 디자인'과 호화 공원시설에 앞서 가장 시급한 일은 극빈층 주민의 생계보장이다. 이런 분들에게 먼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과 인격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인륜의 도리요, '사람 사는 세상'이다. 늙고 병들어 항의할 힘도 방법도 모르는 소수자라해서 버러지 같은 인생으로 방치해 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평등사회가 아니다. 이들 가련한 노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선거철만 되면 선량 후보들이 골목골목 찾아다니며 어르신의 충실한 일꾼이 되겠다고 큰절 올리던 바로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닌가.
요즘 갑자기 국가 브랜드 높이기, 선진국 품위 제고를 내세우며 적지 않은 예산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런 프로젝트 형 정책에 앞서 구성원 모두의 기본생활이 보장된 사회, 상호간에 약속을 지키는 신뢰사회, 법질서를 지키라고 위압하기 보다는 권력자 스스로 준법생활에 모범을 보이는 사회가 열릴 때 국민은 물론 국제사회도 한국을 품위 있는 나라로 높이 평가해 줄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나라가 21세기에 품격 있는 문명사회로 들어서려면 측은지심에서 나온 동냥문화, 종교단체나 부자들의 적선지심에서 나온 기부문화, 이런 것들이 혼합된 시혜적 잔여주의 복지를 넘어서 다 함께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가며 공평하게 살 수 있는 보편적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가의 올바른 역할이자, 국민통합과 총화, 경제사회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해서도 최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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