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논의가 촉발됐다. 제헌절이라는 계기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으나 과거 어느 때보다 발아의 조건은 풍성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피곤증이 누적된 바탕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대통령에게 과도한 권력이 집중되는 5년 단임제를 바꾸자는 주장이 쌓여있다. 더욱이 지난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했던 5년 단임제를 4년 연임제로 고치는 '원 포인트 개헌'이 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산된 뒤 개헌은 18대 국회의 큰 숙제로 남아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제헌절을 계기로 개헌 논의를 시작해 9월 정기국회에서 개헌특위를 구성하고 내년 1~2월 중 개헌안을 발의, 6월 지방선거 이전에 개헌을 완료하는 구상을 제시했다.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반환점을 도는 지방선거를 넘기면 차기후보들의 부상 등으로 개헌이 사실상 어려워진다는 이유에서다.
한나라당 친이명박계도 개헌에 적극적이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지난 6월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는 모든 것을 얻거나 잃는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 게임'이라며 지더라도 다른 기회가 있도록 분권형 대통령제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은 직접 선거로 뽑고 총리는 국회에서 뽑아 권력을 나누면 지금 같은 치열한 싸움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헌에 대한 친이계의 입장은 '분권형 대통령제'로 기울어 있다.
그러나 '분권형 대통령제'에는 늘 '박근혜 견제용'이라는 정치적 주석이 따라 붙는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가 16일 "이원집정부제를 분권형 대통령제로 포장해 추진하는 친이계의 의도 속에는 복잡한 정치적 복선과 이해관계가 깔려있고 내부 권력투쟁 성격도 담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산통을 깼다.
이 원내대표는 "친이계는 박 전 대표가 현행 헌법 체제에서 대통령이 된다면 굉장히 커다란 정치적 부담과 위험과 부담, 일종의 공포감마저 갖는 것 같다"며 "차제에 개헌을 통해 권력을 분점토록 하면 총리만큼은 자기들이 가질 수 있어 결국 권력에 동거하고 (세력을)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정국 흐름이 지금처럼 계속되면 친이계는 다음 대통령이 틀림없이 박근혜 전 대표가 되는 걸로 보는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실제로 권력구조 개편 논의의 핵인 박근혜 전 대표는 4년 중임제에는 찬성하지만 분권형 대통령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는 개헌시점에 대해선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나 청와대의 암묵적 용인 하에 친이계가 주도하는 개헌 시나리오에 순순히 따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이강래 원내대표의 발언은 개헌 논의의 향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물밑으로 회자되던 개헌의 '정략성'을 수면위로 끄집어 낸 점에서, 특히 이명박-박근혜 사이의 보이지 않는 권력 암투를 명시화한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이낙연, 박지원 의원 등 일부 의원들이 개헌에 적극적이지만, 당 지도부가 "지금 시점에선 개헌 논의가 적절치 않다"고 공식적으로 선을 그음으로써 정치권의 한 축인 민주당이 당분간 개헌 논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민주당이 내년 지방선거 이전 개헌에 반대하는 이유는 또 있다. 지방선거는 이명박 정부 '중간 심판'의 성격을 분명히 띠어야 하는데,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가 함께 진행되면 '심판'의 의미가 희석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정당도 현시점에서의 개헌 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진보신당 노회찬 의원은 이날 "지금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의 출발지는 헌법이 아니라 대통령"이라며 "이명박 정부 들어 민생파탄과 민주주의 위기가 심각한데 과연 지금이 개헌을 논의할 때냐"고 견제했다.
이에 따라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 개헌 논의가 순항할지는 불투명하다. 일부 여론조사에서 개헌 찬성론이 60%를 상회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다음 대선을 향한 세력과 주자들의 첨예한 이해가 드러난 이상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가능성도 다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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