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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광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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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광신자들

[박동천의 집중탐구]<42>중립성이라는 전횡

제4장 중립성이라는 전횡

선험주의 사고방식이 초래하는 불행한 결과 중에는 중립성, 또는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횡과 방관도 반드시 고찰해볼 가치가 있다. 우선 간단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축구 경기에서 갑 팀은 정신력과 태권도 실력이 뛰어나서 주로 반칙으로 점수를 내려고 하고, 을 팀은 패스와 슈팅이 뛰어나서 주로 기술로 점수를 내고자 한다고 가정하자. 이때 심판은 어떻게 해야 중립적일까? 갑 팀의 반칙을 잡는다면 을 팀에게 유리하고, 갑 팀의 반칙을 눈감아주면 갑 팀에게 유리하다. 그래도 갑 팀의 감독과 을 팀의 감독은 공히 심판에게 "중립"을 요구할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이 뜻하는 "중립"의 내용이 다를 따름이다.

중립이라는 말은 대개 중립적이지 않은 요구를 주장할 때 사용되는 단어다. 갑과 을이 이익을 두고 서로 다툴 때, 문명사회라면 대개 쌍방은 공히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형태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차지하는 것이 옳다", 즉 모종의 권리(right)라는 명분을 내세우게 된다. 이때 제삼자가 갑의 명분을 지지한다면, 갑은 그를 "중립적인" 심판이라고 보겠지만 을은 오히려 그가 편파적이라고 보면서 "중립을 지키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런 경우 "중립을 지키라"는 을의 주장은 사실 "끼어들지 말라"는 발가벗은 뜻을 "중립"이라고 하는 명분으로 포장해서 주장하는 수사가 되는 것이다. 같은 뜻이라도, 중립이라고 말하면 즉각적인 이익에 따른 배척이 아니라 뭔가 원칙에 의한 매개가 바탕이 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수사만으로는 아무런 원칙도 표상될 수 없고, 따라서 매개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순전히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정해진 파이를 갑과 을이 나눠 먹는 전형적인 제로섬 게임에서, 당사자끼리 결정하게 내버려둔다면 8 대 2로 분배된다고 가정해보자. 여기 병이 개입한다면, 논리적으로 세 가지 결과만이 가능하다. 갑의 몫이 늘고 을의 몫은 줄거나, 갑의 몫이 줄고 을의 몫이 늘거나, 아니면 변함이 없을 수 있다. 변함이 없는 경우는 병이 개입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개입한 결과로는 갑에게 유리해지거나 을에게 유리해지는 경우만을 보자.

갑에게 유리해진다면, 을은 병이 차라리 중립을 지키기를 원할 것이다. 을에게 유리해진다면, 갑은 병에게 중립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결과적인 차이만을 가지고 "중립"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병은 어떤 입장을 취해도 "중립"일 수만은 없게 된다. 개입을 하지 않는다면 곧 현상유지를 묵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갑이 8을 가지고 을이 2를 가지는 상황을 방임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8 대 2로 분배하면서, 갑과 을이 서로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공존한다면 얘기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쌍방 누구든지 그 상황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병의 중립이란 그러한 불공정의 여지를 검토해보지도 않고 무시한다는 점에서, 만약 그 불공정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불공정의 편을 들고 공정을 억압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마찬가지 이유로, 중립적이기만 한 사회질서는 있을 수 없다. 정의와 진실을 기둥으로 삼아 개인들 간의 평화로운 협동 또는 경쟁을 추구하는 문명사회는 자신의 의지를 완력으로 해결하려는 왈패들에게는 편파적으로 차별적이다. 반대로, 깡패들의 무용담을 허용하고 존중하는 사회는 남을 누르는 데서가 아니라 생산적인 연구나 과업의 성취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불공평한 사회가 된다. 열심히 일해서 곡식을 수확해놓으면 깡패들이 뺏어갈 뿐만 아니라, 항의했다가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약탈주의적인 깡패들이 국가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회는 인민의 의욕을 죽여서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생산성이 높은 사회보다 중립적인 의미에서 열등한 것은 아니다. 인민 대부분이 굶주리더라도 국가권력을 차지한 깡패들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고, 오히려 체제를 바꾸면 지위는 물론이고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수단을 써서 변화를 막으려고 기를 쓰게 된다.

사회질서를 어떻게 편성하더라도, 질서라는 것은 언제나 특정한 방향의 행동 패턴을 우대하고 거기 어긋나는 행동 습관을 제재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우대되는 행동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기질이나 성향이나 가치가 당연히 우대를 받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질서에서 불리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회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평등과 공정이라는 명분에 실어서 주장하게 된다. 이럴 때 중립이 아니라는 지적은 어느 쪽 편을 의도적으로 들어도 당연히 받게 되겠지만, 의도적이지 않고 단지 결과적으로 어느 쪽 편을 드는 셈이 되더라도 그런 지적은 피할 수 없다. 아예 개입을 안 하고 방관만 하더라도, 도와 줬다면 싸움의 결과를 다르게 만들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만큼 중립일 수만은 없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삶에 중립 그 자체란 있을 수가 없다. "중립"이란 단어는 특정한 정치적 공방에서 각자의 입장을 변호하고 상대의 입장을 공박할 때 쓰이는 수사일 뿐이다. 모든 종류의 특정성에서 초월한 행동이나 삶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누구에 대해서든지 중립성을 시비걸 수가 있다. 앞장에서 완벽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중립이라는 개념도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한다면 아무에게나 휘두를 수 있는 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태를 중립적이지 않다고 공격하는 것은 완전히 얼빠진 짓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어차피 중립적이지만은 않은 행태들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해서 중립적이지 않다고 비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말은 "중립성"을 시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초점이 다른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중립적이지만은 않은 모든 행태들 가운데 공격대상을 따로 선별했다면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를 밝혀 말하기가 켕길 때 "중립"은 편리한 연막장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가 유의미하게 쓰일 수 있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이와 관련한 엄청난 오해의 기원이 되기는 했지만, 막스 베버가 "가치중립"이라는 문구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진의는 음미해서 수용할 가치가 많다. 베버의 논지는 어떤 주제와 관련된 실상을 탐구하려면 그 문제의 본질에 시선을 맞춰야지, 연구자가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가치를 거기 섞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흑인과 백인 사이에 태생적인 지능의 차이가 있는지를 조사한다면, 표본 구성에서 최대한 대표성을 확보하도록 노력하고, 검사방법에서 최대한 오류나 편향성이 스며들지 않도록 한 다음, 조사한 결과를 발표해야 한다는 얘기다.

만약 백인이 흑인보다 지능이 높아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연구자가 예상과 다른 조사결과에 마주쳤다고 해보자. 뭔가 조사가 잘못 되었으리라고 추정하고, 조사과정의 오류를 잦는다. 오류가 나오면 "그러면 그렇지" 하고 무릎을 치면서 재조사의 명분으로 삼고, 오류가 딱히 나오지 않아도 다시 한번 확인한다는 이유로 재조사를 해본다. 이런 식으로 표본을 바꿔가면서 기어이 찾는다면, 언젠가는 백인이 흑인보다 지능이 체계적으로 높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행해진 모든 조사를 "과정의 오류"가 있었다고 일축하고, 자기 예상에 부합하는 결과만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조사는 실제 세계의 진상을 발굴하는 경험적 조사로서는 하나마나한 일이라는 것이 베버의 지적이다.

조사를 저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정도는 초등학생이라도 나름대로 생각을 할 줄 안다면 모를 리 없다. 저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더라도, 어떻게 하면 저런 식이 아닌지는 답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쟁점이 되는 경우라면, 어떤 사업에 대한 환경영향평가를 해도 조사의 "공정성"과 "타당성"을 둘러싼 시비는 끝이 없고, 어떤 재판이나 수사도 "진상"을 시원하게 밝혔다는 평을 받지 못한다. 한 쪽은 "조사는 할 만큼 했다"고 버티고 다른 쪽은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우기면서 서로 "중립적인 결정"을 원한다고 하지만, 그 와중에 결정은 제도적 권력 또는 여론의 향배에 따라 중립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만다.

애당초 형체를 갖출 수 없는 선험적인 "중립"을 멍하니 쫓아다닌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다. 중립이란 자체로 가치인 것이 아니고, 베버가 말하듯 경험적인 사태의 진상을 밝힐 때 일체의 선입견으로부터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맥락적인 가치만을 가진다. 물론 경험적인 사태의 진상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예컨대 1980년 광주의 발포가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의해 치밀하게 유도된 것인지, 아니면 "우발적 사고"로 촉발된 것인지는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용산참사와 관련해서 사망자들의 시신을 경찰이 왜 서둘러 부검했는지를 집요하게 추궁해서 밝힐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농성자들이 화염병을 던졌다는 사실만으로 화인을 추정하고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과실치사죄"를 물을지는 결코 중립적일 수가 없다. 베버의 가치중립은 이런 경우 진상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숱하게 남은 의혹들에 대해 선입견 없는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볼 것이다. 검찰이 수사기록 공개를 거부한다는 것은 재판을 통한 실체적 진실의 발굴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로, 베버가 판사라면 당연히 공소를 기각할 것이다.
▲ ⓒ뉴시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회과학계와 법학계에는 베버의 "가치중립"을 들먹이면서 엉뚱하게 마치 선험적인 중립성을 지킬 수가 있다는 듯한 착각이 아직도 주류를 점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중립성의 이치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중립성"이라는 간판을 차지하고 전횡을 부리느냐고 하는 무력대결일 뿐이다. 학자들과 법조인들은 권력과 보상의 편리한 먹이사슬에 편입되어 기득권을 즐기기로 스스로 선택한 사실을 호도하기 위해 "중립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고, 그 사이에 사회질서는 이치보다 무력에 좌우되는 습성을 줄기차게 이어간다.

"소인배들은 똑 같은 놈들이 서로 싸운다"고 공자는 말했다. 허망한 선험주의적 "중립"을 교육받는 사이에 억지 쓰는 방법을 배우고, 그것을 또 후배들에게 "사회과학"이랍시고 가르치는 풍토에서는 결국 부화뇌동밖에는 남을 것이 없다. 논쟁의 주제를 파고들어가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일 진상을 찾는 데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그런 진상이나 그런 상식 자체의 존재를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는 심성은 모든 일이 이익에 따른 편가르기일 뿐이라는 자포자기로 채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립"이나 "객관"이나 "과학"는 모두 이익에 봉사하는 견강부회의 무기, 또는 엉큼한 속셈을 호도하는 무별주의적 가리개일 뿐이다. 자기 나름의 판단력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침묵하면서 줄이나 잘 서는 것이 우선이다. 이런 현상은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기득권 세력에게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지만, 자칭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이라고 정도가 결코 덜하지는 않다. 진보진영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정치, 경제, 문화, 도덕적으로 열세에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기득권 세력에 비해 눈에 덜 띌 뿐이다.

인간의 삶은 가치에 관한 선택의 연속이므로 가치에 관해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애당초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가치중립"이란 오로지 경험적인 진상을 밝히기 위해 외부적인 요소들을 배제한다는 차원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때 외부라 함은 직업적 영토의 구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찾아내야 할 진상에 상관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구분을 말한다. 노무현의 발언에 대한 선관위의 기계적인 판정에서부터, 문화방송의 피디수첩에 대한 검찰의 공격, 그리고 황석영이 정치권력에 빌붙었다고 흥분하는 결벽증 환자들의 발작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중립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광신자들은 자기 패거리의 이익을 "중립"으로 부르면서,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게 횡포를 맘껏 부리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이라고 평해도 좋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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