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울산북구 연합공천을 위해 샅바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우국지사들은 연합공천이 결렬되면 이명박 정권에게 너무 다행스러운 결과가 될까봐 걱정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중요하게는 보지 않는다. 이 일은 여전히 국회 299석 중 한 석이라는 의미에 비해서 조금 더 무게가 실릴 뿐이지, 정권에 대한 심판의 의미는 비유적으로만 가능하다.
물론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한 석도 못 건진다면 면목은 안 설 것이다. 한나라당 의원들로서는 대통령의 강권통치 방식을 수정하라고 목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대통령이 누구인가? 정치를 혐오하고 경멸하는 CEO 대통령, 진시황식 법치 대통령이 아닌가? 반대 비슷한 것은 다 "반대를 위한 반대"로 몰아붙이고, 무조건 "긍정의 바이러스"와 "희망"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잘된다는 소망교회 장로님 아닌가? 국민 눈치를 안 보는데, 국회 눈치를 볼까? 한나라당 덕분에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영입 당해줘서 한나라당이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한나라당 눈치를 볼까? 더구나 우익신문들은 물론이고, 방송마저도 목구멍이 포도청인 노조들이 은인자중 "장기전" 모드로 들어갔지 않은가? 노무현 정부 때 지방선거 "40대 0"이라는 표어가 가졌던 만큼도 파괴력을 가지기 어렵다. 물론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한 석도 못 건진다면 진보 쪽에게 큰 힘은 될 것이지만, 그것이 정부에 대해 직격탄이 되기에는 거리가 있다는 정도의 말이니 오해말기 바란다.
중간심판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번에 한나라당이 전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사람이고, 울산북구에서도 연합공천이 이루어지리라고 낙관하는 사람이다. 단,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년의 지방선거, 2012년의 국회의원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반MB 정서가 선거에서 표로 응결될 수 있을지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2002년 노무현의 역전은 국민경선제라는 새로운 시도가 불러온 흥행효과 없이는 불가능했다. 2007년에 정동영과 문국현이 나름대로 흥미로운 경기방식을 고안해서 단일화에 성공했더라면, 이명박의 승리를 막기는 어려웠을지 몰라도 지켜볼 만한 승부는 벌였을 것이다. 회고해보면 1971년 김대중의 선전도 당시 신민당 후보 결정과정의 흥행에 크게 힘입었었다.
진보진영이란 원래 고질적인 분열의 체질을 가진다. 현실은 하나지만 대안은 항상 무수하기 때문에 사실 진보의 노선이 통일되어 있다면 지극히 비정상이다. 영국과 미국이 지구상에서 대표적인 양당제 체제라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상대적 진보 쪽에 해당하는 진영에서 많은 이합집산이 있었다. 하물며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어느 나라에서나 기득권 수호 계급은 대략 30%내외의 고정보수층을 형성한다. 나머지 70%가 모두 하나의 진보를 지지한다면 보수파는 영원히 집권을 못할 텐데, 당연히 그렇게는 안 된다. 나머지 70% 중에는 무관심층과 부동층이 있고, 그 나머지가 안정적 진보층인데, 이들마저 여러 갈래의 정파로 나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략 주먹구구로 근사치를 구해보자.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전체 유권자 대비 득표율을 보면 이명박 후보는 30.5%을 얻었는데 이는 대략 현재 지지도와 맞먹는다. 정동영과 문국현 후보가 얻은 표를 합하면 20.0%가 되는데 이는 대략 자유주의에 대한 고정표로 간주할 수 있다. 2009년 1월에 잠깐 민주당 지지율이 찍은 순간고점과 같다. 권영길 후보가 얻은 2%는 사회주의 고정표라고 하겠고, 이회창과 기타 후보들이 얻은 10%는 2002년 노무현 후보에게 간 지지표 가운데 2007년에 보수로 이동한 부동표 비율과 양적으로 대략 일치하고, 37.5%는 기권했다. 고정보수 30% 대 고정진보 20%에 부동표 10%와 무관심층 40%의 구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무관심층 중에서는 상당수가 부동층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의무투표제라도 도입하지 않는 한, 투표율이 70%를 상회할 확률은 매우 낮다. 그러므로 부동표는 최대 20%가 되고 그 중에서 진보진영은 15%p를 차지해야 보수 35대 진보 35라는 균형을 이룬다. 노무현의 승리가 얼마나 기적적이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계산이다.
투표율 70%라면 부동표 20%가 되는데, 이중 15%p 이상을 진보지지로 끌어들여야 진보세력의 승산이 있다는 말이다. 진보세력을 물론 하나로 잡았을 때 얘기다. 그런데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선거에서 연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자유주의 내부에서도 지금 민주당이 전주에서 공천이 쉽지 않듯이, 선거를 앞두고 연합이 계속 유지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사실 이권을 앞에 두고 갈라지는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진보정치세력만이 아니라 종교인들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자주 연출된다.
그래서 이번에 울산북구의 선거연합은 뜻이 다 똑같지는 않은 사람들끼리 같은 목표를 위해 전략적인 제휴를 일시적으로나마 엮어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차후 정치일정에 대해 중대한 시범효과를 줄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쌍방의 줄다리기가 대단히 팽팽해 보인다. 나는 결과를 일단 낙관하지만, 이러다 판 자체가 깨져버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두 세력이 일단 마지노선을 하나 정해둔 위에서 계속 협상하라고 제안하고자 한다.
▲ 3월 24일 울산시 북구 현대자동차 문화회관에서 열린 민주노동당-진보신당 간 4.29 울산 북구 재선거 후보단일화 회담에 앞서 신당 노회찬 상임대표와 민노당 김창현 후보, 신당 조승수 후보, 민노당 강기갑 대표가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
마지노선이란 제비뽑기다. 지금처럼 투표권자의 범위와 투표방식에 관해 계속 샅바싸움은 벌이되, 무슨 일이 있어도 연합은 성사시킨다는 결의로서 협상이 결렬되는 순간 제비뽑기에 들어가기로 보험을 들어놓는 것이다. 두 후보를 일대일로 제비뽑는다면 민주노동당 쪽에서 동의하지 않을 테니, 투표방식에 관해 두 세력이 각각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카드 두 패를 대상으로 하면 된다. 쌍방이 각자에게 유리하도록 최선을 다해 줄다리기를 하되, 더 이상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바로 그 시점에서 양쪽이 고수하는 카드 중에서 제비를 뽑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실 협상을 촉진하는 효과도 일면 기대할 수 있다. 상대안과 자기안이 채택될 확률이 반반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차이를 좁히도록 압박효과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너무 유리한 안을 고수하면 그만큼 상대의 안은 상대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는데, 반반의 확률에서 상대안이 채택되어 버리면 실제 경선에서 자기편의 패배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중한 사람일수록 자기에게 유리한 안을 고수하기보다는, 상대안이 채택되었을 때 자기편에게 가장 덜 불리하도록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즉, 쌍방의 차이를 좁히라는 압박이 제비뽑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제비뽑는 방식도 동전던지기는 너무 싱겁기 때문에, 일정한 격식과 의례를 보태서 장엄미와 더불어 파격의 재미까지 섞을 수 있다. 예컨대 쌍방에서 노동절 날짜를 딴 51명씩 대표로 나와 진보신당 안과 민주노동당 안 중에서 제비를 뽑는 것이다. 102명이 뽑은 제비를 합산해서 더 많은 쪽을 채택하면 된다. 의례를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들려면, 102명이 뽑은 결과를 합산한 다음 단순과반수보다는 점수차가 예컨대 10점 이상 나올 때까지 제비를 반복해서 뽑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경우에 따라서 상당히 오랫동안 제비를 반복해야 할 수가 있는데, 제비 차수가 달라질 때마다 선수를 바꿀 수도 있다. 참여자들이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짜증을 내기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게임하듯 의례를 수행한다면 흥행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애물로는 우리사회의 엄숙주의와 진보진영의 유물론적 합리주의가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정권에 대한 중간심판이요, 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후보를 간택하는 엄숙한 과업에서 제비뽑기라니 경망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보통 고수하는 유물론적 합리주의에서는 맹목적인 우연에 운명을 맡기자는 제안을 지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사회주의적 품위 대신에 경망함을 감수하고, 지적인 위신을 포기하더라도 전략적 고려를 우선시한다면 너무나 세속적이고 실용적이라고 비난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왕 정치판에서 활동할 거라면 저 정도의 경망은 새로운 세대에 대한 추파고, 저 정도의 불확실성에 대한 용인은 지적 겸손으로 해석해 줄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양쪽 지도층의 개방적인 태도와 결단이다. 그리고 위에 제시한 방법은 고리타분한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니, 참신한 흥행사적 상상력을 빌리면 훨씬 매력적인 제비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제비뽑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에는 가장 공평한 선거방식이었다. 지금도 로토나 월드컵 대진표 등, 공평성이 가장 중요한 경우에는 예외 없이 제비뽑기가 동원된다. 울산북구도 그렇지만, 사실상 모든 선거에서 이제 경선이 공천 방식의 대세로 자리 잡은 이상, 모든 정당에서 경선투표자의 범위와 투표방식에 관한 샅바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미국에서 예비선거제가 처음 시도되어 전국적으로 정착되는 데에는 100년 이상 오랜 기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각 주와 정당별로 무수한 샅바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다보니 지금처럼 첩첩산중인 선거제도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예비 선거를 제도화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지 불과 7년이다. 앞으로 갈 길이 꽤나 멀 것이고, 정착된 다음에 보면 굉장히 여러 단계로 이루어지는 복잡한 선거제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후보들은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경선방식을 주장하느라 서로 밀고 당길 것이다. 보수당에서는 이런 다툼이 일어나도 당이 깨지는 일은 잘 없다. 특히 우리 사회는 더욱 보수파의 단결력을 의심할 나위가 별로 없다. 1997년 이인제가 김대중의 당선을 결과적으로 도운 경우를 빼면, 깨고 나가도 파괴력이 별로 없는 것이다. 반면 진보는 여차하면 깨지고, 깨지면 파괴력이 매우 크다. 위에서 계산했듯이, 진보가 선거용으로 연합해도 부동층 가운데 4분의 3을 끌어와야 보수와 동점이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후보들이 나름대로 유리하도록 고안한 경선방식들을 내놓고, 그것들을 대상으로 제비를 뽑게 되면 적어도 결정절차의 공평함에 관한 한, 불복할 만한 합리적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상대를 설득하지도 못하고 상대에게 양보할 수도 없어서 협상이 벽에 부딪힌다면 불확실성이 가장 공평하지 않겠는가? 사회주의자들이여 조금만 더 경망하게, 그러나 담대하게 불투명한 미래에 몸을 던져보면 어떻겠나? 대장부라면 천길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