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리영희 선생님의 빈소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많은 조문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선생께서 이룩한 지적 성취와 실천적 양심을 흠모하는 학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정치권까지 선생의 영정 사진 앞에 분향을 하며 작별인사와 다짐들을 했을 것이다.
살아생전 선생님을 추억하고 기리는 조문객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영정 사진 속 선생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엄혹했던 냉전독재 시절 무수한 해직과 투옥의 시련 앞에서도 민주와 평화, 인간지향적 정론 직필을 고집했던 실천적 지성이라는 후배들의 찬사가 과찬이라고 손사래를 치고 계실 것이다.
사상적 실천에는 추상같으면서도 젊은 시절 고생시켜 미안한 아내를 위해 설거지를 마다하지 않는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평가에는 "녀석들 날 놀리는구먼!" 하시면서 부끄러워 얼굴이 발그레해지셨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다수 조문객들은 한탄할 것이다. 선생께서 바라고 실천하신 냉전의 구름이 걷힌 평화로운 한반도는 이 정부 들어 먼 이야기가 되었다고, 선생께서 아직 더 하실 일이 있는데 이렇게 가셔서 안타깝다고 말이다. 영정 사진 속 선생께서는 눈을 부릅뜨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런 머저리들!! 그런 푸념일랑 집어 치우라"고….
80년대생이며 2000년대 학번인 나는 사실 리영희 선생님을 알 기회가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소위 전론세대(70년대 리영희 선생의 저작 '전환 시대의 논리'를 통해 분단 냉전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깨닫고 사회적 실천에 나선 세대)와 같이 선생을 통해 인식의 전환을 통한 감동을 맛볼 기회는 없었다.
나는 남북 공동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상징하듯 남북관계가 숨통이 트여가던 시기에 대학에 입학했고, 그때 내가 관심을 보였던 사회과학 분야에서 소장 학자들의 학술저작이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리영희 선생을 접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민주화 운동 세대의 사상의 은사로서 리영희 선생으로부터 받은 지대한 사회과학적 영향 혹은 생활 학문적으로 리영희 선생과의 추억을 회고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늦은 입대를 앞두고 리영희 선생의 저작 '반세기의 신화'를 읽게 되었다. 군대를 늦게 가는 만큼 대학을 마치고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남북관계를 더 공부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펼쳐 본 책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리영희 선생님에 관심으로 선생님의 저작과 선생님에 대한 소식을 오늘에까지 접하게 되었다.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학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평가는 한결같다. 프랑스 르몽드지가 평가했듯 반공의 장막으로 가려진 냉전사회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 그는 사상의 은사였다. 이성의 불완전함은 직접 실천으로 보완해가며 참 지성인으로 살아갔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다던 모 라디오 인터뷰 내용 중 후회되는 삶은 없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공적으로는 후회할 만한 일이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만큼 자타가 인정한 그를 20세기 한반도에서 살아간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고인의 제자가 추도사에 표현했듯 고인은 이제 역사의 육신이 되었고, 고인의 학문적 사상적 성취를 계승하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리영희 선생의 학문적·사상적·인간적 성취를 계승하려는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노력이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인의 사상과 실천은 70년대 80년대 민주화 시기를 정점으로 이루어졌다. 남은 이들의 계승작업은 자칫하면 90년대 후일담 소설처럼 리영희 선생님 주변의 몇몇 지인들의 넋두리와 회고로 화석화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물론 전론세대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리영희 선생님의 학문적 사상적 성취의 현재적 의미를 돌아보는 출판사업이 진행된 바도 있으나 <리영희 선생님 80세 기념 문집 (리영희 프리즘 ) 발간> 여전히 리영희 선생님은 21세기 젊은 세대에게는 장준하 혹은 함석헌 선생같이 훌륭하다고 들었지만 무얼 했는지 잘 모르는 역사적 인물로 남을지도 모른다.
슬픔을 뒤로하고, 이제 곧 후배 학자들과 시민 사회 활동가들은 리영희 추모사업회를 만들고 선생님의 사상과 실천을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한 출판사업을 펼칠 것이다. 또한 언론계에서는 개인의 일신과 영달보다 사회적 책무에 충실한 정론직필의 언론인을 기리는 리영희 기자상을 제정할지도 모른다. 아울러 학계에서는 한반도 분단과 냉전 해소를 위해 노력한 고인의 평화지향적 글쓰기에 대한 커리큘럼을 신설하여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고인의 생애에 대한 전기를 통해 지사다운 풍모 이면의 냉전으로 인한 비극적 가족사와 옥바라지로 고생시킨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마음 등 인간적인 내면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고인을 친근하게 어필시키려는 선생님의 지인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내세울 줄 모르고 소박했던 선생님의 성품으로는 역정 낼 일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루뭉술하게 진보의 아이콘으로 화석화하기에는 고인이 남긴 학문적 실천적 유산이 깊고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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