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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대처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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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대처의 일생

좀 더 부연하자면 대처의 일생은 이렇다.

그녀는 1925년 Grantham이라는 중소도시에서 식료품가게집 주인의 딸로 태어나 옥스포드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지만 이미 대학시절 학내 보수연합이란 조직의 제3대 여성회장이 될 정도로 정치적인 의욕을 갖고 있었다.

1950년부터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여러 번 고배를 마시고, 1959년 드디어 의회 입성에 성공한다. 여기에는 1951년 26세가 되었을 때 이혼경력이 있는 사업가인 Denis Thatdher와 결혼한 이후 남편의 재정적 지원과 눈에 보이지 않는 외조가 한 몫을 한다.

1970년 Ted Health가 수상직에 오른뒤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게 되고 이 당시 부처의 예산 절감을 기치로 내걸며 초등학교에서의 무료우유 지급을 철회하여 '우유 탈취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1975년 Health가 보수당의 경제정책 노선을 버리려하자 이를 맹비난하며 당권에 도전, Health와 Willie Whitelaw를 연달아 제치며 영국 정당사상 주요정당의 첫 여성당수가 되는 이변을 연출한다. 1976년 소련의 폭압적인 정치를 맹비난하여 소련으로 부터 '철의 여인 the Iron Lady'이란 호칭을 얻게 되자 오히려 이를 반갑게 여길 정도로 호기어렸던 그녀였다.

1979년 '불만의 겨울 the winter of discontent'에 치루어진 총선에서 그녀는 마침내 주부라는 잇점을 십분 활용,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가계와 실업에 고통당하는 서민의 애환을 아는 정치인으로서의 공감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며 마침내 보수당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고, 최초의 여수상으로 1979년 3월 28일 꿈에 그리던 다우링가 10번지의 주인이 되고 만다.

수상이 되자마자 그녀는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자유시장을 부흥시키기 위해, 세금을 깍고 정부지출을 줄이는 통화주의자의 전략을 충실히 따른다. 또한 노조의 전투적인 움직임에 철퇴를 가하고 국영기업을 민간에게 팔어넘긴다. 가스, 전화, 철강, 항공, 수도 및 전기 등이 민영화되었고, 국민들은 이 과정에서 다량의 국민주를 갖게 되어 만족감이 극대화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지방정부가 소유한 공영주택을 세입자가 매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주택의 사유화 붐과 주택가격 상승으로 인한 자산 증식 효과를 국민들이 만끽하게도 되었다.

또한 탄광이나 자동차, 선박제조와 같은 사양산업을 과감히 구조조정하고 영국 산업의 중심을 금융업과 서비스업으로 신속히 이동시키는 산업정책을 구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1980년 한해에만 3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도심에서 심상치않은 폭동이 일어나자 보수당 내에서조차 대처의 정책이 순화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80년 당 회의에서 그녀는 "당신이 원한다면 돌아가시오. 그러나 나는 결코 돌지 않을 것이오!"라는 일성으로 확고한 강행의지를 천명하고 열렬한 지지자를 낳게 된다.

1981년 수상으로서 인기의 최저점-최정점이 아님!-을 찍고 1982년 들어 경기회복 조짐과 함께 선거국면에 접어들면서 레임덕이 일어날 수도 있는 시점에 아르헨티나와의 유명한 영토분쟁, 즉 포크랜드 사태가 벌어지자 그녀는 과감하게 군대를 파견하고 2개월만에 아르헨티나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1983년 거뜬히 재선에 성공하는 천운을 맞이한다.

1984년 전국광산노조가 전국적인 파업을 일으켰음에도 역대 다른 수상들과는 달리 단호히 맞서면서 이미 발전소에 석탄을 충분히 비축하는 등의 전략에 힘입어, 비록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은 있었지만 강성 탄광노조의 파업은 진압되고 탄광업 역시 사양길로 빠져든다.

1984년 IRA에 의한 폭탄테러 이후 평화협상 수용, 소련의 붕괴의 조짐과 고르바쵸프와의 협력적 관계 유지, 무엇보다도 미국의 레이건대통령과의 쌍둥이같은 동일정책의 추진에 의한 시너지효과 등 외교적인 성과도 이어져 1987년 선거까지 세번 연속 총선승리와 3연속 재임에 성공하는 수상이 되고 만다.

그러나 대처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는 계기는 결국 그의 옹고집에서 시작된다. 1988년, 지방정부로부터 받는 서비스의 댓가라고 생각하여 모든 국민은 자산수준에 관계없이 인두세를 내도록 세제를 바꾸는 의욕적인 시도를 펼친 대처는 결국 엄청난 국민적 저항과 보수당 내의 불만세력을 키워낸다. 결국 그녀의 사임을 불러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계기가 다시 발생하는데, 평소 유럽연합의 탄생에 열의를 보였던 그녀는 그녀의 가까운 동료들과 이에 대한 정책대립을 보이면서 외무장관의 사임 등의 국면에 봉착하자 1990년 임기를 끝내지 못하고 사임하고 만다.

이후 1992년 작위를 받으며 상원의원으로 의회에 들어오고 2권의 회고록을 집필하고 정치인으로서 활동을 해나가지만 2001년 건강의 악화로 정치일선에서 완전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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