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사들이 뿔 났다. 최근 일어난 역사 교과서 논쟁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교육과학기술부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권고 지침을 내렸다. 그런데 지난 4일에는 집필진들이 지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역사 교과서 논란이 확대되는 모양새다. (☞관련 기사: 교과서 집필진 "교과부 수정 권고안 거부")
이렇게 되면서 곤란해진 것은 일선 교사들이다. 논란이 되는 부분을 가르치기 애매해서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수업을 하면서 역사를 해석하는 다양한 시각에 대해 가르칠 수 없다는 답답함을 호소하는 일도 잦다.
"교과서 검·인정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졌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교과서 검·인정 제도는 한 과목의 교과서를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하면 국가가 평가해 통과시키는 제도다. 학생과 교사에게 다양한 유형의 교과서를 선택하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취지에서 나왔다.
"이승만 정권? 시험에 안 나온다"
광주에서 고등학교 3학년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교사 ㅊ(38) 씨는 최근 난감한 일을 겪었다. 수능시험이 코앞인 학생들이 "선생님,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어떻게 공부해야 해요"라고 질문하자 최 교사는 얘기하기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고민끝에 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 글쎄, 시험에 안 나올 것 같은데…."
그는 "이승만 정권 시기는 역사 수업에서 좋은 토론거리다. 하지만, 요즘은 조심스러워서 얘기를 꺼낼 수가 없다"며 "정치권에서 역사 서술에 대한 논쟁이 일면 교사들은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이 다양한 시각 접할 기회 마련하기는커녕…"
의정부에서 고3 학생들에게 같은 교과를 가르치는 ㄱ(36) 교사도 "이 사태는 교과서 서술을 수정 하냐 마냐의 문제를 넘어선 듯하다"며 "이런 문제가 터져 네 편, 내 편을 가르면 학생과 교사들만 혼란스러워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사가 수업에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을 두고 '이게 정답이다, 아니다'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며 "정부가 학생들에게 다양한 역사 서술을 접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하나의 역사 서술만 제시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 또한 "얼마 안 있으면 수능을 보는 학생들에게서 '교과서 내용이 바뀌는 것이냐, 만약 내가 재수하면 새로 공부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들어오고 있다"며 "정부가 최소한 학습 여건을 불안하게 만들지는 말아야 하는것 아니냐"라고 지적했다.
"교과부의 자기모순…자신이 통과시킨 교과서, 정권 바뀌었다고 부정해서야"
부천에서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국사를 가르치는 교사 ㅈ(44) 씨는 이 문제에 대해 "이 상황에서 내가 못마땅하게 느끼는 것은 중심을 잡지 못한 교과부"라고 꼬집어 말했다.
그는 "뉴라이트 쪽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겠는데, 정부가 나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더군다나 검정 제도를 총괄하는 교과부가 일부 시각에 맞춰서 교과서를 수정하려고 하다니, 검정 제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권이 바뀌긴 했지만, 교과서 검정은 교과부 소속"이라며 "이런 교과부가 자기모순에 빠져 자기들이 검정해준 교과서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양한 역사 서술 가르치는 게 교과서 검·인정 제도의 취지"
그는 "교과서 검·인정 제도는 그동안 많은 논란을 거치며 힘들게 마련된 것"이라며 "유신 정권 시절에는 국정 교과서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검·인정 제도의 커다란 장점은 다양한 교과서"라며 "교사들 처지에서는 다양한 관점도 중요하지만, 가장 수업하기 좋은 교과서를 고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라고 말했다.
여주의 모 중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는 ㄱ(47) 교사도 "국정 교과서 제도는 교과서가 하나만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거기 나온 내용을 진리인 양 느낄 수 있다"며 "거기에서 잘못된 인식이 생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영어와 수학 등의 교과와 달리 역사 교과는 해석의 다양성이 교과 내용의 핵심이다. 그래서 검·인정 제도가 더욱 필요한 과목이라는 설명이다.
의정부의 또 다른 고등학교의 ㅂ(35) 교사도 "정부가 바뀔 때마다 역사 교과서 내용이 오락가락할까 봐 걱정된다"며 "애초에 다양한 방식으로 수업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로 만들어진 검·인정 교과서를 교과부가 나서 국정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그는 "교사들의 자율성을 뺏기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논란 제기한 목적은 2011년 역사 교과서 검열?
국가 주도의 역사 서술은 역사 교육의 목표와 맞지 않다. 따라서 최근 역사 과목 교과서는 검정제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오는 2011년에 현행 역사 교과서가 대폭 바뀌어 새로 나올 때, 그동안 국정 교과서였던 국사 과목에 검정 교과서가 처음 나오게 된다.
하지만, 이번 논란으로 새 교과서를 둘러싼 집필진들은 고민이 많다고 한다. 서울의 모 중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는 교사 ㅇ(35) 씨는 이번 교과서 논란에 대해 "핵심은 2011년에 새로 나올 교과서를 쓰는 이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현재 한 출판사에서 새 교과서 집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정부 측에서 의도했던 것은 당장 1,2년간의 내용을 고치는 것이겠지만, 현 상황은 그다음 집필자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며 "예전 같은 분위기라면 교과서에 다양한 자료를 실어볼 시도를 하겠는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집필진들 스스로 자기 검열에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검정에서 통과가 안 되면 출판사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된다"며 "그게 집필진들에게 역사 서술에 일정한 선을 긋게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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