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위대한 진전을 이뤘습니다. 합의안은 시장에 효과적으로 적용될 것입니다."
월가의 금융위기를 달래기 위해 가히 '역사적'이라 부를 만한 규모의 구제금융 투입이 명기된 협상안이 9일간의 진통 끝에 지난 주말 발표됐다. 기업구제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어 민주당의 강력한 반발을 샀던 내용은 주택보유자 보호 조치가 포함된 110페이지짜리 보고서로 보강됐다. 이 외에도 협상 결과 경영자의 '황금낙하산' 제한 등 새로운 내용이 많이 담겼다.
이제 공은 의회로 넘어갔다. 하원과 상원을 모두 통과하게 된다면 이 1년짜리 구제금융 법안은 즉시 효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공화당 등 일각에서 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만만찮아 낙관은 금물이다. 법안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새로운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사상 최대 규모 구제금융 기업자산 매입에 투입
긴급경제안정법(Emergency Economic Stabilization Act of 2008, EESA)으로 불리는 새 법안은 정부가 공적자금을 이용해 최대 7000억 달러에 달하는 부실자산을 인수해 시장의 신용을 높이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만약 법안이 상원까지 일사천리로 통과된다면, 재무부는 그 즉시 2500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부도 위기에 몰린 기업 회생에 투입할 수 있다. 대통령의 추가 요청이 있다면 1000억 달러의 추가 투입도 가능하다. 미국 재무부는 이번 법안 통과에 따라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400조 원에 가까운 금액을 시장 안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쥐게 된 셈이다. 나머지 3500억 달러는 의회가 별도로 결의안을 통과시켜야 시장에 투입할 수 있다.
구제금융 투입 대상 금융기업은 정부에 매각가격을 제시하게 된다. 정부가 가격을 정하는 게 아니라 대상 기업이 '역경매' 방식을 통해 구제금융 투입 범위를 결정하게 되는 셈이다. 이에 따라 대상 기업이 정해지더라도 실제 자산 매입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자산 매각 범위 산정에 시간이 걸릴뿐더러, 회사가 자발적으로 자산 매각분만큼의 손실을 장부에 반영해야하기 때문이다.
당초 원안에 비해 재무부의 권한남용을 규제할 최소한의 제한조치도 마련됐다. EESA는 정부의 부실자산 매입은 어떠한 경우에도 7000억 달러를 넘어설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 등이 포함된 위원회가 재무부의 금융구제 업무를 감독하게 된다. 의회는 감찰관을 지정해 재무부 활동을 감시하게 되며 회계감사원(GAO)의 감사 또한 실시할 방침이다. 특히 EESA와 관련된 모든 활동 내용의 책임자인 재무장관은 관련 내용에 대해 사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 막강한 권한만큼 막중한 책임도 뒤따르게 조치한 것이다.
민주당·공화당 의견 추가 조치
민주당이 집중적으로 제기한 경영진에 대한 견제장치도 일부 마련됐다. 부실기업 경영진의 보너스와 수당이 제한됐다. 특히 예상수익을 기초로 해 지급 결정된 보너스는 예상이 틀릴 경우 연간 50만 달러 이상 줄 수 없도록 했다.
최고위층 경영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해 '먹튀' 논란까지 일으킨 황금낙하산 조항도 금지됐다. 이에 따라 부실기업 최고경영자(CEO) 등 간부급 경영진은 구제대상 기업에서 사임하게 되더라도 거액의 퇴직금 등을 받을 수 없게 됐다. EESA에 따르면 공적자금 투입 대상 기업은 재무부가 채권을 갖고 있는 이상 황금낙하산 조항을 정관에 집어넣을 수 없다.
황금낙하산은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영권 보호 제도로, 인수합병이 이뤄질 경우 피인수 대상 기업 경영진이 사임 때 거액의 퇴직금과 스톡옵션, 상당액의 보너스 등을 받을 수 있게 마련한 조치다. 국내에서도 도입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제도로, 경영진의 보호를 위해 소액주주의 권리를 무시한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당초 경영진 제한 안은 민주당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에서 난색을 표한 내용이었다. 기업인의 사기를 떨어뜨려 새 법안 참여를 독려하는 데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도덕적 해이로 빚잔치를 거듭한 경영진을 문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론 앞에 고개를 숙인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월가의 기업인들을 직접적으로 처벌할 조치는 마련되지 않았다.
행정부가 지난 20일 제출한 원안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주택보유자 보호 조치도 추가됐다. 이번 금융 소용돌이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 주택압류 도미노를 막기 위해 EESA는 대출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주택보유자를 대신해 정부가 담보대출 재협상에 나서도록 명시했다. 지난 80년대 저축대부조합(S&L) 사태 때 정부가 정리신탁공사(RTC)를 만들어 부실주택 소유자 구제에 나섰던 일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또 미국 주택금융의 실핏줄 역할을 하는 지방 소규모 은행 지원에도 나서도록 했다. 이에 따라 원안에서 대형 금융사에 그쳤던 부실자산 매입 대상이 저소득층과 지방 은행으로까지 확대됐다. 공화당의 주장도 반영돼 모기지유동화증권(MBS) 보험도 구제대상에 포함됐다.
재정 적자의 심각화를 예방해야 한다는 공화당의 주장도 법안에 녹아들었다. EESA는 구제금융 방식을 부실기업 자산 직접 매입이 아니라 정부 지급보증안으로 확정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공적자금을 이용해 부실기업 채권을 매입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기업 지분을 갖게 됐다. 부실기업이 정상화된다면 정부 채권을 다시 시장에 매각해 그 돈으로 재정적자를 메운다는 방안이다.
아울러 법안 집행 15년 뒤에도 매입 부실자산 가치가 회복되지 않을 경우, 금융회사가 정부 손실 보전에 나서고 정부는 의회에 구체적인 자금 회수방안을 제출토록 했다. 다만 구체적인 상환 계획은 아직 파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낙관은 아직 이르다…"이익은 사유화하면서, 손실은 사회에 돌리다니"
새 합의안은 대체로 원안에 비해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낙관은 금물'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가장 큰 이유는 국회의원 중 일부가 구제금융 투입안 자체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 보수파들은 이번 조치가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반대되는 조치라고 비난하며, 민주당 일부는 "방만한 월가에 퍼주기 조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리처드 셸비 공화당 은행위원회 대표(앨라배마)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종합적이지도 않고 실행가능성도 없다"라고 평가절하한 바 있다.
대규모 빚잔치와 함께 고액의 연봉을 챙겨가던 기업주들이 저지른 잘못을 서민의 세금으로 메워준다는 이번 법안의 성격 때문에 미국 서민층의 민심도 흔들리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주택 압류 피해자들의 대변인을 맡은 가브리엘 오노프리오 씨는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시장을 자유화하고 이익도 사유화해놓고, 손실은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한 마디로 위선"이라고 비판했다.
"7000억 달러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제조업 위기'도 변수
구제금융안이 최종 확정되더라도 과연 이 정도 금액으로 시장 안정이 이뤄질지에 대한 의문도 계속해서 나온다. 이번 조치의 핵심이 기업 부실자산 매입에 있는 만큼 문제의 근원인 주택담보대출 시장 안정과 부동산 시장 안정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과연 7000억 달러로 부실자산을 모두 정상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마저 나온다. 구제금융안 통과가 거론되는 지금도 미국 4위 상업은행(미국 전체 은행 순위는 6위)인 와코비아 은행도 파산 직전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는 마당이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전체 8400개 은행 가운데 117개 은행이 파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금융위기에다 장기간 경기침체와 경쟁력 약화로 미국 제조업마저 심각한 부실화 위기에 처했다는 점도 '이번 조치의 영향력은 한시적일 것'이라는 전망에 힘을 더하고 있다. 이번에 2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된 미국 3대 자동차 업체는 경쟁력 약화로 고사직전에 처했다. 크라이슬러에 이어 제너럴모터스(GM) 마저 생사의 기로에 선 지경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