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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도 '비즈니스 프렌들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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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중음악도 '비즈니스 프렌들리'하면 된다?"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⑫·끝]

계절을 바꾸는 바람이 분다. 음악계에도 예전과 다른 습기를 품은 바람이 일고 있다. 어느 예술인단체의 모임에서 한 연극평론가로부터 음악평론가로 살기엔 불운한 시절 같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불과 1년 몇 개월 전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은 매 10년 후반부마다 전기를 맞아왔고, 그간 상승곡선과 하강곡선을 주고 받아온 영화의 침체와도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반전에는 그럴만한 배경이 있으며, 명백한 한계 또한 존재한다.

립씽크 등 '습관'에 대한 반성과 비판적 견해의 존속, 그리고 문화운동에 가깝게 이어진 어떤 노력들이 있었다. 음악인들은 창작을 지켜냈고 인디음악은 성장했다. 음악을 즐기는 장이 확장되고, 일부 미디어가 대중음악을 주요 콘텐츠로 다루어 화제를 생산하는 데에 늦게나마 동참하기 시작했으며, 가요계 역시 산업구조의 급변 이후 차차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해가고 있다. 그러나 시야를 확장하지 못한 호객성 기사들이 복제되는 현상이 노출하듯 질과 내용에 대한 동의는 미진하다. 산업의 '의미 있는 지속'은 아직 저 멀리에 있다.

음원산업 성장의 그늘, 파이가 커져도 접시는 비어있다

한국음악산업협회의 2008년 음반판매집계에 의하면 10만 장 이상 판매된 음반은 현재까지 네 장에 이른다. 지난 2007년 내내 10만 장을 넘긴 음반이 불과 세 장이었음에 비하면 선전하는 셈이고, 바닥을 쳤다고 볼 수도 있다. 음반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록물(record)이자 작품으로서 단순한 물건 이상의 함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음반을 포기하고 음원 단위의 활동을 요구하는 것은 시인에게 시집을 내지 말고 시 한편씩만 팔라는 얘기와 비슷하다. 소설처럼 앨범 전체를 유기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앨범아티스트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해외에서는 수백만 장씩 팔리는 히트앨범들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유독 큰 낙차를 기록한 한국의 음반시장은 단순히 매개체의 변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은 음반산업과 음악산업의 구분이다. 불법다운로드 때문에 음반이 팔리지 않아 음악계가 어렵다는 아우성은 틀리지는 않으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기계적 팩트와 실제 간에는 차이가 있으며, 자기위주로 통계와 자료를 해석할 때 사실은 왜곡된다. '음악산업백서2007'에 의하면 2006년 기준으로 음악산업의 규모는 4400여억 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이중 음반산업이 848억 원대이고, 2000년에 450억원 규모였던 디지털음악산업은 3562억 원으로 크게 성장했다. 이처럼 음악을 구매하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소비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파이의 크기와 무관하게 생산자(창작자)는 여전히 빈 접시를 들고 서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음악산업의 팽창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질적인 발전과 수용자 층의 확대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를 동력으로 산업규모가 커진 1990년대 중후반은 외형적으로는 호황기였지만 다양성과 창작기반은 심각하게 악화된 시기였고, 이것이 2000년대 대중음악 전반의 위기를 초래한다. '뮤직비지니스'에서 '뮤직'은 빠지고 '비지니스'만 남은 성장은 내실과 무관했다. 쉽게, 다수의 청자가 원하는 수준으로, 가시적인 실적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수준으로 만들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하면 결과는 비슷해진다. 음악애호가들은 그러한 결과물을 좋아할 수 없었고, 음악이 생명력을 갖기 위한 전제조건들이 무너졌다. 확대로 축소를 초래한 황폐한 번식이다. (주류가요음반시장과 달리 인디음반시장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입장권을 사재기한 암표상들이 텅 빈 경기장 밖에서 서성대는 모습은 비단 다른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인터넷시대가 열리자 일부는 순진한 기대를 품기도 했으나, 새로운 시스템 역시 강자가 장악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편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속성이다. 사람과 사회는 늘 시간과 시대 순으로 성숙하지는 않는다. 작은 순기능, 즉 직접홍보와 판매 등은 발견이라기보다는 기존에 있던 것의 변형에 가까웠다. 2001년 이후 음원산업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전체 음악산업의 규모는 더욱 커진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성장한 음원시장의 수익이 이동통신사 중심으로 분배되고 음악의 재생산에 재투자되지 않아 치명적이다. 이른바 음원시대에 음원수익에 강조점을 찍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유이다.

현실은 이렇다. 온라인음원의 수익은 이동통신사가 50%를 가져가고, 나머지를 제작사가 22%, 음원제공업체가 19%씩 나눈다. 저작권자 및 실연자, 그러니까 음악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고작 9%이다. 해외의 경우는 대체로 이와 반대의 분배율이라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한국적 상황'을 알게 된 해외 음악인들과 음악 관계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구조이다. 이처럼 덩치가 커지고 있지만 수익의 극히 일부만이 제작자와 음악인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재생산의 기반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법다운로드보다 합법적이지만 비상식적인 음원수익분배에 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타당성을 얻는다. 이러한 수익분배율이 정해지게 된 과정은 어떻게 하면 기업은 살고 생산자는 도태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익추구가 문화산업의 근간마저 흔드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참고사례라 할만하다.

신문의 판매부수와 마찬가지로 이용자수 경쟁을 하는 이동통신사는 덤핑에 가까운 음원 서비스 가격을 유지한다. 누가 음반을 사겠는가라는 말이 나오고 실제로 그렇게 길들여진다. 더구나 음원시장이 포화상태에 가까워지고 성장세가 정체되기 시작한 상황이라 이익 조정은 업체에게도 부담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용료를 현실화하여 수익을 유지해야겠지만, 심리적 저항과 회원유치 문제가 만만할리 없다. 그런데 2007년, 대형제작자들은 대통령선거 후보들을 불러놓고 불법음원의 근절이 음악인들의 숙원인양 사뭇 비장한 '쇼'를 했다.

외형만 중시하는 관점은 이 문제를 포착하지 못한다. 아니, 외면한다. 1조2000억 원대에 달하는 노래연습장산업이 존재하지만 음악저작권협회는 얼마 전에 있었던 스캔들이 새로이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아예 저작권협회 등록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음악인들까지 있다. 음반수요가 음원수요로 이동하면서 발생한 이익마저 1차생산자에게 돌아가지 않는 구조는 음악의 존립기반을 위협한다. 주류 가요계에서도 음원판매는 '가교역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성장이 후퇴를 견인해온 것이다.

공연시장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 팬타포트락페스티벌 ⓒwww.pentaportrock.com

그래서 이제는 공연시장으로 눈을 돌려야한다는 얘기가 있다. 음악활동의 출발이자 마지막은 테이블 주위에서 한담을 나누거나 방석을 깔고 앉아 문제풀이를 하거나 까나리액젓을 들이키는 것이 아니다. 공연은 클리프 리처드와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예에서처럼 새로운 세대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계기도 되어준다. '음악산업백서2007'은 공연산업이 2005년의 1451억원에서 2006년에는 1887억으로 30% 성장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음원산업과 마찬가지로 밑바닥에는 와 닿지 않는 현황이다. 해외 유명뮤지션의 내한공연마저 동원 가능한 관객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여러 회의 공연을 할 수 없으므로 대관료를 포함한 투자비를 1~2회 공연을 통해 회수한다. 공연 티켓가격이 생활수준에 비하여 높게 책정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국내 중소규모 공연의 사정 역시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거의 매일 계속되는 클럽공연들이 있지만 한국의 클럽들은 음악인에게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기획공연 또는 페스티벌의 출연 그리고 단독공연에서만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입장수익이 한정되어 있기에 적자를 감수하며 활발한 공연활동을 지속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1~2회 공연으로 대관료 등을 충당하는 소극적 활동에 만족해야 한다. 이러한 중소 공연시장의 열악함은 단지 전문적인 기획마인드의 부재와 음악애호가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라이브에는 뛰어나지만 앨범은 부실하고, 반대로 앨범은 뛰어나지만 라이브에는 약한 음악인들이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환경은 음악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연의 주요한 소비층 역시 제한적이다. 음반소비와 음원소비 계층의 상이함처럼 공연실적의 대조 역시 수용자의 계층화와 관련이 있다.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폭발이 일어날 듯한 기운이 조성된 1990년대부터 영화·공연문화의 주요 소비층이 된 일군(관계자들은 이들에게 '언니들'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이 있다. 이전까지 음악매니아의 중심축으로 수집과 몰두형이었던 '형님들'과 달리 참여와 기호형이었던 그들이 2000년대 대중예술의 주 소비층으로 영화와 뮤지컬, 그리고 공연시장의 고객이 되었다. 이러한 성향의 차이에 대한 사회·경제적 분석도 가능하다.

근 몇 년 사이 페스티벌의 성황을 개별 뮤지션의 활동은 쉽지 않은 사정 하에서 모듬 메뉴 격인 페스티벌로의 집중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페스티벌은 다양한 음악의 향유와 소개의 장이며 특별한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명반을 남기고 해산한 '유앤미 블루'의 재결합 공연이 성사된 무대 역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펜타포트락페스티벌,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다. 특화라는 이름으로 장르를 가르고 지자체가 지원하는 축제가 정치적 의도 때문에 단발성 이벤트로 전락하는 일도 있지만,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취향들이 어우러지는 장면이 언젠가는 만들어질 테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역시 출발은 중소규모 공연임에도 빈약한 인프라와 공연 관련 세금이 22%에 달하는 등의 제도적 문제가 길을 가로질러 누워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성장의 조건?

그리고 저변의 문제로 연결된다. 한국에서는 음악수용이 20대 중반 이후 급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극의 폭을 넓힘으로써 문화적 감수성을 유지시키는 데에는 영향력 있는 미디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매체환경은 그렇지 못하다. 방송의 책임도 없지 않다. 상황이 변하여 음악방송이 밀려났다는 주장을 펴지만 연예기획사시스템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자초한 측면이 더 크다. '잊혀질 만 하면' 부패 스캔들이 터지는 방송연예계에서는 돈과 커넥션이 대중스타를 만들어냈다. 관료들이 관련업체로 진출하는 것처럼 PD가 기획사로 가거나 직접 차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만약 수사가 '적정선'에서 그친다면 정직한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시청자들 역시 그들에게 사과 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보비 규모가 커지는 현상은 일반적인 추세가 되어 생산보다 홍보로의 집중이 가중된다.
▲ 홍대 프리마켓. 예술인 역시 생활인이라는 사실은 종종 잊혀진다. 상업주의에 가까이 갈수록 이윤으로부터 멀어지는 창작자와 문화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인식은 낮은 수준이다.

지상파 방송은 물론 '음악전문'으로 등록된 케이블 음악방송채널에서도 극히 제한적인 음악 외에는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 편성에 포함시키는 '띠' 관행 때문이다. 음악인의 뮤직비디오가 방송되려면 프로그램 제작협찬금 명목으로 500만 원에서 2000만 원까지의 금액을 지불해야한다. 케이블 음악채널은 대부분의 편성시간대를 이러한 계약물로 채웠다. 비용을 지불하고 편성시간의 일부를 확보하는 '띠 두르기'에 의하여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닌 신인 음악인이나 인디 음악인들은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발표한다고 해도 대중과 만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했다. '음악전문' 유선사업자는 프로그램의 전문편성비율을 80%로 유지해야하지만, 그 비율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관행을 인지해온 방송통신위원회는 2007년까지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업자 '편향'이 창작자와 수용자를 소외시키고 산업의 근간을 흔들었다. 덕분에 게토화된 방송채널에 중소 레이블들이 홍보비를 지출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방송의 권력이 분산되었다고는 해도 대안적 미디어의 역할은 미약하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할 때 소문과 유언비어가 퍼지듯이 현장의 음악 성과와 무관한 선입견이 대중음악에 씌워졌다. 문화적 가치 대신 경쟁력과 생산성만 강조하는 논리는 자기파괴적이 되고, 창작물의 원활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산업성장 역시 모래성놀이에 불과하다.

'한류'에 대한 환상이 그랬다. 한때 한류는 기업 이미지 광고와 일부 영화들처럼 애국심 마케팅과 맥을 같이함으로써 심정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2006년에 '삼성경제연구소'는 "(현지에서) 미국·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경쟁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개발도상국이 자국 문화산업을 육성하도록 자극을 준다"는 요지의 분석을 낸 바 있다. 해외 진출과 '국가 브랜드'를 연결시키며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할리우드와 뉴욕을 누빈다는 어떤 건장한 청년의 성공담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껌엑스, 할로우잰, 스트라이커스, 윈디시티 등의 경우처럼 음악은 작은 규모이더라도 장르와 씬에 연계할 때에만 유효하다. 그런데 올림픽 개막식에서 립싱크를 할 정도로 국익에 함몰된 촌극은 지금도 연속방송 중이다.

"성장보다 성숙을"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기성 대중음악의 산업적 위기는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의 본격적인 상륙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자본의 욕구를 개인의 욕망으로 내면화한 거대한 착시현상 속에서 사람이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소비자를 선택하는 시대가 왔다. 극단적 상업주의와 성과주의 속에서 음반의 제작과 유통, 음원서비스와 방송을 과점하는 기업이 나타났고, 시장논리는 강화되었다. '콘텐츠'라는 말은 시장에서 가치부터 따지는 용도의 유행어가 되었다. 문화예술에 개발주의를 강요하면 예술의 본질적인 출발점을 시장이 거세하는 방식, 즉 '표준화'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대중음악에 대한 성찰이 간과된 논의들은, 심지어 한가하게 음악을 논하는가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모두 농담이 되어버린다.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사고와 실력이 부족해 인지도가 낮지 않느냐는 빈정거림은 과연 질적으로 다를까. 그 와중에 예술인 역시 생활인이라는 사실은 종종 잊혀진다. 상업주의에 가까이 갈수록 이윤으로부터 멀어지는 창작자와 문화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인식은 낮은 수준이다. 음악(음악인과 창작)이 있기에 산업이 의미를 갖고 존재할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하는 단계인 것이다. 그럼에도 창작이 없으면 산업도 존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대중음악의 산업적 효능과 문화적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문제는 강조는 되고 있으나 중요한 부분들이 현실성을 근거로 간과된다는 데에 있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시행한 '인디레이블육성지원사업'을 폐지했다. 실적이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지원사업이 중단·변경된다는 것은 문화예술정책의 기조 자체가 현장의 바람과 다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역시 기초예술지원규모와 대상을 대폭 축소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대중음악인이 공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창구는 거의 막힌 셈이다. 이런 것이 소위 '정상화'는 아니다. 선진국들처럼 예술인 출신 인사가 문화부장관이 된다고 해서 좋은 정책이 보장되진 않는다.

결국 음악산업의 안정화는 주류 가요의 체질개선과 방송 등 매체환경에 대한 점검, 전문성과 사명감 그리고 현장주의에 기초한 정책, 비평·연구 활동의 심화와 부가판권시장에 대한 연구가 병행될 때 가능해진다. 이미 전문화된 축제와 공연기획이 시도되고, 영상과 음악을 접목하는 등 대중예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자업자실'의 결과였던 위기를 겪고도 강자경제에 의하여 조직은 살고 사람은 죽는 현상이 지속된다면 음악산업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산업에는 양질의 생산자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창작자의 풀이 필수적이다.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리기만 해도 보이는 일이다.

대중이 음악의 숨결을 잊어가고 음악이 단순 소비재로 전락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우려할만한 징후이다. 수동적 소비를 벗어난 수용이 능동적 창작과 만날 때에 새로운 상상력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또한 자율과 공존이라는 문화다양성이 세대별로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문화선택권과 창작자의 재생산 환경을 가능케 한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함께 중시되어야 안정적인 산업과 선순환구조가 가능함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병은 치료법을 알려준다. 아직 상상과 현실의 간극은 멀지만 증산보다 분배, "성장보다 성숙"이라는 가치는 대중문화예술에도 적용된다. 지금 음악은 희미한 가능성을 안은 채 언젠가 건너야할 다리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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