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쇠고기는 사실상 처음 조건 그대로 수입됐다. 두 번이나 국민 앞에 머리 숙였던 대통령은 이제 촛불 따위에 기죽으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은 사실상 이명박 정부를 호령하는 '상왕' 역할을 하고 있다.
민영화 정책, 감세 정책, 대기업 규제 완화 등 이명박 정부는 애초 계획했던 경제 정책을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다. 그런 한 쪽에서 들리는 것은 서민의 곡소리다. 정부는 '9월 위기' 같은 것 없다고 강변하지만, 서민 경제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한국방송(KBS), YTN은 이미 이명박 정부가 장악했다. 문화방송(MBC) <PD수첩>은 뭇매를 맞고 있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8명의 수배자는 서울 조계사에 도피 중이다. 조·중·동 광고 중단 운동을 했던 이들, 포털사이트에서 활동하던 누리꾼을 향한 검경의 압박은 갈수록 거세다.
100일이 넘게 계속된 촛불 집회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촛불을 들었던 이들이 이룬 건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이 100일 넘게 촛불을 밝힌 그들을 다시 만나 이 질문을 던졌다. <편집자>
"촛불은 이제 꺼졌다!"
연일 계속된 이명박 대통령의 강경 발언과 검·경을 위시로 한 공안 정국 조성은 대체로 이 같은 판단에 근거한 듯 보인다. 관료들은 광화문 사거리와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던 인파가 '사라졌다'고 판단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우리의 작전이 먹혔구나'라며.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 만약 이 대통령이 인터넷과 조금이라도 더 친했다면 쉽사리 "촛불 따위에 기죽으면 안된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70여 개가 넘게 개설돼 있는 각 지역별 '촛불 커뮤니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을 테니.
촛불 집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난 5월부터 최근까지 만들어지고 있는 이들 모임의 성격과 규모는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다. 서울에서는 거의 모든 구 단위별로 촛불 커뮤니티가 개설됐으며, 전국 주요 도시는 물론 각 시·군 단위까지 모임이 만들어져 있다. 개설자와 참가자는 지역운동을 하는 활동가부터 개인적 참여까지 천차만별이다. 이곳에서는 촛불 정국에 관한 소식부터 각종 사회 의제와 정보가 활발히 오간다.
이들 대부분 지역에서는 지금도 매일 혹은 매주 1회씩 모이고 있다. 새롭게 모임이 생겨나는 지역도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온라인에 마땅한 커뮤니티 공간 없이 '알아서' 지역별로 모이기도 한다.
방법도 굳이 집회의 형식을 빌리지 않는다. 어떤 지역에서는 일반적인 촛불 문화제 형식을 따르기도 하지만, 굳이 촛불을 들기 보다는 동네 공원, 놀이터에서 모이는 수다 모임, 혹은 반상회에 가까운 모임을 이어가는 곳도 많다. 규모도 100명 이상씩 모이는 지역부터 10여 명씩 모이는 지역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광화문 등 도심에서 열리는 촛불 집회에 함께 '깃발'을 들고 참가하기도 하며, 지역에서 벌이는 미국산 쇠고기 불매 운동, 조·중·동 반대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각 지역에서 꾸준한 활동을 벌여온 이들은 최근 서로간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오는 6일 지역 촛불들끼리 한 자리에 즐겁게 모여 보자며 '정모'가 열릴 예정이다.
'쇠고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원 주민들'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목요일 노원역 롯데백화점 앞에서 집회를 갖는 노원 주민들도 그런 수많은 지역 촛불 중 하나다. 이곳은 노원 지역에서 지역주민자치운동을 전개하는 마들주민회를 비롯해 지역환경단체 '중랑천 사람들', 장애인단체 '청우', 그리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지역구에서 문화제 준비를 도맡아 하고 있다.
마들주민회 사무국 간사이자 촛불 문화제 준비에 참여해 온 '햇살' 씨를 만나 그간 촛불 문화제에 관한 이야기와 촛불 정국에 관한 생각을 들었다.
꾸준히 이어지는 지역 촛불…연대는 이미 모색 중
"7월 첫주 목요일에 처음으로 지역 촛불 문화제를 열었다. 참가자는 300명 정도가 왔다. 3~4회때까지 꽤 많이 왔다. 그 이후 광복절 연휴와 휴가가 맞물리면서 인원은 줄었지만 지금은 100여 명 정도가 정기적으로 참여한다."
100만 명이 모인 6월의 촛불 집회가 끝나고,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에 대한 장관 고시를 강행하던 지난 7월, 지역에서도 촛불을 밝히자라는 단순한 제안이 노원에서도 제시됐다. 이후 두달동안 총 9차례의 문화제가 열렸다.
햇살 씨는 "캠페인성으로 진행되는 다른 지역과 달리, 노원에서는 자유발언과 공연이 이어지는 문화제로 준비했다"며 "영화 상영도 준비하는 등 다양한 내용의 행사를 마련해 왔다"고 말했다. 아직 활성화되진 않았지만 다른 지역과의 교류도 이뤄지고 있었다. 그는 "중랑구 촛불 카페지기가 연락을 해오기도 하고, 마포 촛불에서도 찾아와 촛불 사진전을 벌였다"고 덧붙였다.
젊은 층이 많은 주민 구성 덕분인지, 지속적으로 야당 지지가 높았던 지역의 성향 때문인지, 노원 촛불 문화제는 특별히 지역 내 다른 주민들과 충돌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암묵적 지지자들이 꽤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서대문에서는 촛불 집회를 한번 시도했는데, 주민들이 엄청나게 반발을 해서 못했다고 했다. 광화문 가서 하지 왜 여기서 하냐면서. 그런데 사실 노원에서는 욕하는 주민을 찾아보긴 힘들다. 오히려 발언할 때 지나가다 서서 듣는 분위기다. 적극적으로 참여는 안 하지만, 반대하기 보다는 들어본다는 식이다."
광화문과 시청 일대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하고 있는 경찰은 어떨까. 햇살 씨는 "노원 지역에서도 경찰이 으름장을 놓긴 하지만 아직까지 소환 통보나 구체적인 제지는 없었다"며 "그래도 경찰버스는 보이지 않는 곳에 매주 와 있긴 한다"며 웃었다.
"다섯 번째 문화제까지는 정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못 하게 하더라. 처음에는 행진만 하지 말라고 하다가, 대통령 이름이 들어간 구호를 외쳤더니 그건 불법 집회이지 문화제가 아니라면서 갑자기 메가폰으로 얘기하더라. 그래도 어쨌든 지역 주민이다보니 경찰도 충돌 없이 최대한 부드럽게 가길 원하고 있고, 그렇다고 우리가 할 얘기를 안 할 수도 없는거니까….
노원이 아무래도 지역 촛불 중에서 꾸준히 가고, 규모도 적은 인원은 아니니까 시경(서울지방경찰청) 쪽에서도 예의 주시하는 것 같다."
"지친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즐겁게 함께 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꺼지지 않고 있는 지역 촛불. 그러나 마냥 이대로 같은 방식으로 갈 수 없다는 게 햇살 씨 본인은 물론 노원 촛불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일단 체력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고, 방법적으로도 지역에서 촛불만 드는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견도 있어서 '노원 촛불은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9월 첫째 주에 토론회를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오고 시기가 지나면서 우리 안에서도 할 수 있는 실천을 바꿔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촛불을 드는 것은 상징성이고 구체적인 방도가 아니니까. 그래도 완전히 끌 순 없으니까 좀 더 넓은 간격을 두고 가는 식으로 하는 방법이 얘기되고 있다."
그는 "대안을 갖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현재까지 나온 아이디어 중에는 노원구에서도 아이들의 급식에 미국산 쇠고기를 넣지 않는 급식 조례를 만드는 일이다. 또 미국산 쇠고기는 사지도 팔지도 않겠다는 스티커를 만드는 방법이나 불매 제품 목록을 작은 크기로 제작해 나눠주는 방법 등도 제안됐다.
"무조건 반대만을 외친다면 사람들도 많이 지치고, 분노가 분노를 낳게 만드는 상황을 만드는 것 같다. 희망을 잡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자꾸 촛불에 집중하자고 하는 의견도 나오는데, 조금만 더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되는 문제니까 신중해야 한다고 본다. 지쳐서 떨어지는 사람을 포기하고 남은 사람들이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처음에 촛불이 시작할 때는 다양한 방식의 행동이 있어서 좋았는데 갈수록 한 가지 방식만 강조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며 "지금은 서로를 다시 돌아보고, 현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표현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길게 보고 가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야 즐겁게 싸울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끈을 놓지 않는다면"
촛불은 앞으로도 계속 살아날 수 있을까? 햇살 씨는 "그렇겠죠"라고 답한 뒤 "끈을 놓지 않는다면…지역에서 작게라도 이렇게 계속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고…"라며 말을 이었다.
"사실 2006년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직전까지만 해도 지역에서는 작지만 꾸준히 활동이 이어져 왔다. 이게 과연 될까? 왜 모르지? 하는 답답함과 함께. 그러다가 올해에 촛불로 확 번진 것처럼, 지금 사그러드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또 다시 계기가 와서 촉발이 된다면 행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희망이 있으니까 (활동을) 하는 것 아니겠나."
그는 "광화문과 시청에서 매주 이어진 촛불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당연히 지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며 "잠시 숨을 고르는 시기가 아닐까"라고 말했다. 또 그는 "곳곳에서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광우병 반대라던지 촛불 스티커와 뱃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날 수 있다"며 이를 촛불이 꺼진 게 아닌 '숨 고르기'의 징표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어쨌건 우리 의식의 성숙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본다. 전두환 물러나고 노태우가 되는 것처럼 다 이기고 실패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해서 '역시 우리는 안 돼'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자성할 수 있는 마음은 누구나 다 있으니까."
혹시 촛불 집회가 지역운동이나 단체 활동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진 않았을까? 1990년대 철거민 운동에서 출발한 마들주민회는 18년 간 지역에서 주민자치 활동과 공동체 운동을 일구어온 단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역에서 활동을 하긴 했지만 주민들의 의식을 따라가기에는 못 미친 부분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이 촛불 집회에 많이 나온 것도 우리가 잘 해서 나왔다기 보다는 주민들이 그만큼 생각과 의지가 있으니까 나왔다고 생각한다. 많이 반성되는 부분이다."
"내가 이럴 줄 몰랐다는 말이 가장 많았다"
그렇다면 촛불이 이룬 성과는 무엇일까. 그는 "일단 정치적 무관심이 없어졌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촛불 문화제에 참가한 주민이나 회원들과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온 얘기는 '내가 이런 걸 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데모꾼도 아니었고, 이런 걸 할 줄 몰랐었다', '내가 이 시간에 이런 거리에 있다니', '이렇게 만든 이명박 정부가 너무 한심해' 등등. 이전에 없던 일이다. 그만큼 이명박 정부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이고 소통없는 문화와 태도에 대해서 많이 분노한다.
성과?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아닐까. 어쨌건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것이 아니고 우리 것이니까."
강경 진압과 원천 봉쇄로 광화문과 시청 일대 촛불 집회를 막았던 이명박 대통령과 어청수 경찰청장은 '우리의 작전이 먹혔구나'라며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 지역별 모임은 '촛불 집회가 아닌 촛불'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경찰이 반상회와 수다 모임에도 물대포를 겨누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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